소설리스트

90화 (91/109)

90화

17.

하얀 수리와 검은 잉어 사이의 마법사 아델리어

북쪽의 거룩한 땅, 루퀼렘의 긴 만년설 안에서 태어났네

영원한 밤 속에서 찾아온 다섯 뿔의 여신

아델리어는 여신의 구원을 위해 새벽하늘 두 개의 달을 쏘아 올렸네

가슴속 마른 심장을 내어 두어라, 아델리어

너의 마법만이 나를 숨 쉬게 만든단다

아델리어는 다섯 뿔의 여신에게 심장을 건넸더라

그녀의 등에는 긴 꼬리 수리의 날개가 힘차게 돋아났네.

***

익숙한 노랫가락이 욕실에서 그윽이 메아리쳤다. 이리아는 덱스터의 흥얼거림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느릿느릿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욕조 물 안쪽으로 루퀼렘인의 창백한 피부와 하얀 머리카락이 보였다. 이리아는 그녀의 원래 모습이 참 익숙해지기 힘들다고 생각하며 자세를 고쳤다.

잠에서 깨어난 이리아가 품 안에서 바르작대니, 노래는 단번에 뚝 끊겼다.

덱스터가 이리아의 이마 위로 부드럽게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일어났어?”

입을 열면 목이 잔뜩 쉬어 이상한 목소리가 나올 게 뻔했다. 이리아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몸 상태는 어때? 아프지는 않아?”

“아프지는 않아요.”

아. 역시나, 목소리가 참 볼품없구나.

목은 쉬었고, 허리와 아랫배는 겨우 참을 만큼 뻐근했다. 이리아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덱스터를 돌아보았지만, 그는 어깨에 생긴 자잘한 손톱자국들만 제외하고는 변함없이 완벽했다.

‘하워드 공은 ‘그날’의 다음 날 아침에도 분명 이랬었지…….’

대체 왜 밤을 함께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과 달리 덱스터는 아픈 구석 하나 없이 멀쩡한 걸까. 괜스레 억울해진 이리아는 그의 맨가슴에 뒤통수를 폭 파묻었다.

덱스터가 울긋불긋한 자국들이 가득한 이리아의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당신 목소리가 많이 쉬었어.”

“목소리만큼이나 몸도 엉망이에요.”

“……아프지 않다면서?”

“‘아프지만’ 않다는 뜻이죠.”

정수리 위에서 끙,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리아는 이어, 허리를 감아 오는 단단한 팔뚝과 관자놀이에 닿은 입술을 느낄 수 있었다.

“나도 나름 상당히 많이 노력했는데, 리리…….”

“오랜만에 했잖아요.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사실은 밤까지 종일 뻐근할 것 같지만.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이리아가 뒤를 돌아 덱스터의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향유를 듬뿍 푼 욕조 안인데도, 그만의 박하 향은 여전히 진하고 상쾌했다.

덱스터는 제 너른 가슴팍에 온몸을 맡긴 채, 새근새근 숨을 내쉬는 여인의 어깨선을 천천히 따라 그렸다. 루퀼렘인 특유의 창백한 피부는 옅은 생채기조차도 눈에 띄게 했기에, 밤새 새겨 둔 자국들이 선명했다.

평소 기상하는 때보다 훨씬 늦은 아침이었지만, 덱스터는 느긋했다. 그는 뽀얗고 보드라운 여체를 품에 안고선 느긋하게 흘러가는 시간을 즐겼다.

그리고 이는 이리아도 마찬가지였다. 덱스터의 손길을 느끼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그녀는 눈앞에서 흔들거리는 무언가를 확인한 후에야 몸을 일으켰다.

은줄 끝에 달린 보석은 빛을 온 사방으로 퍼뜨리며 별처럼 반짝였다. 이리아는 덱스터가 들고 내민 보석의 정체를 잘 알고 있었다.

“대마법사 엘드리지 님께서 생전 창조해 내셨던 봉인석이네요. 루가 남기고 간 건가요?”

“맞아. 루 아휜이 이걸 내게 주면서, 당신이 비센티움에 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봉인석을 몸에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당부했었어.”

이리아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단번에 봉인석을 가져갔다. 덱스터가 목걸이를 채우는 그녀를 보며 걱정스레 일렀다.

“이걸 차면 다시는 빨간 머리로 돌아가지 못할 거야, 이리아.”

“이젠 상관없어요. 앞으로 거짓투성이인 ‘씨시 힐데어’로 돌아갈 일은 없을 거예요.”

“마법도 쓰지 못할 텐데.”

“비센티움에 온 이후로 마법 없이도 잘 살았잖아요, 공.”

무지개를 담은 듯 오묘한 빛깔을 띤 봉인석은 이리아의 창백한 피부와도 꽤 잘 어울렸다. 봉인석의 정체만 모른다면 그저 평범하고 우아한 목걸이였다.

“루 아휜의 말에 따르면 부작용이 있다던데…… 기분이 어때?”

“몸이 성장하지 않는 게 부작용이에요. 그래서 루퀼렘 성에 있을 당시에는 에즈메릴다 여왕님께서 제가 이 봉인석을 구경조차 못 하게 하셨었죠.”

이젠 다 컸으니까 괜찮아요. 이리아가 작게 덧붙이고선 덱스터의 뺨에 키스했다.

비센티움에 정착하기로 다짐한 이리아는 봉인석을 차고도 별생각이 없었지만, 덱스터는 아니었다. 그는 루퀼렘인으로서의 모습을 만천하에 공개해야 하는 이리아에게 상당히 마음이 쓰이는 듯했다.

이리아는 덱스터에게 다시 제 몸을 맡긴 채, 그의 팔뚝 위 두드러진 힘줄을 따라 그렸다. 이제는 익숙해진 온기와 따스한 욕조 물이 그녀의 세상을 평화롭게 했다.

이마에 살포시 닿아 오는 입술을 느끼며, 이리아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시간이 갑자기 천천히 흘러가기 시작한 느낌이에요. 하루가 여유로워진 듯해요.”

“난 끝나지 않는 여름 한가운데에 선 기분이 들어. 시간이 지나도 낙엽이 지지 않을 것만 같아.”

덱스터의 입술은 무척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그는 둥근 이마를, 작은 관자놀이를, 뽀얀 뺨을 찍은 후 마지막으로 이리아의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가 놓았다.

자유와 사랑에 쫓기던 이리아는 언제나 현재에 안주하기 급급했기에, 미래를 생각해 본 적이 많이 없었다. 그녀는 귓가서 쿵쿵 울리는 덱스터의 심장 박동을 들으며, 침실 서랍 속 엽서들을 떠올렸다.

이리아는 언제나 자유를 꿈꿔 왔고, 온전한 자유를 찾은 후에는 글을 통해서만 만나 왔던 머나먼 나라로 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콘라드 메이필드처럼 대륙 해안선을 따라 여행하면 참 좋을 터다.

덱스터는 앞으로의 인생을 함께할 남자였다. 결혼식이나 카즈웰 4세에 관해 그와 상의할 거리는 여러모로 많았지만, 이리아는 당장은 생각지 않기로 했다.

적어도, 이 욕실 안에서는 다가온 평화를 마음껏 만끽하고 싶었다.

“공과의 결혼식을 무사히 마치면, 겨울이 오기 전에 이 나라를 떠나고 싶어요.”

“여길? 왜?”

“대륙 해안선을 따라 여행하고 싶거든요. 자유를 만끽하기에 비센티움은 너무 작은 것 같아요.”

덱스터는 둥근 이마 아래서 깜빡이는 새하얀 속눈썹을 바라보다가, 그 위에 입을 맞추었다. 그가 이리아를 고쳐 안고선 장난스레 속삭였다.

“우리의 여행 경비를 마련하려면 황실이 은퇴 자금을 많이 주어야 할 텐데.”

“하워드 대공작은 은퇴 자금 없이도 충분히 부자인 줄 알았는데.”

“루퀼렘의 대마법사가 가졌던 재력과 비교하면 난 빈털터리인데.”

이리아가 다리로 물장구를 치며 키득키득 웃었다. 둘은 한참 서로를 따라 웃다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입술을 찾았다.

욕조의 물이 크게 출렁였다.

이리아는 덱스터의 허벅지 위에 앉아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았다. 덱스터는 아직은 서투른 키스를 받아들이며, 물기가 맺힌 커다란 손바닥으로 이리아의 척추를 길게 쓸어내렸다.

덱스터의 손끝이 움직이는 대로 전율이 찌르르 흘렀다. 덱스터의 입술을 한가득 물었음에도, 이리아는 제 잇새서 새어 나오는 신음을 도무지 막을 수가 없었다.

키스를 끝낸 이리아가 숨을 할딱이며 덱스터와 이마를 맞대었다. 그녀가 보조개 자국이 남은 뺨을 부드럽게 감싸고선 속삭였다.

“어딜 가든 사람들이 쳐다봐서 저와 여행을 하면 많이 불편하실 거예요, 공. 하얀 머리는 너무 눈에 띄는 데다가, 루퀼렘인이 엘퀸즈 산맥을 빠져나오는 건 흔치 않으니까…….”

“나도 어딜 가든 사람들이 다 쳐다보는 건 매한가지야, 이리아.”

“사람들이 공을 왜요?”

“키가 커서.”

둘은 또 한 번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이리아가 다시금 덱스터의 입술을 찾으며 나직이 덧붙였다.

“대륙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부가 되겠네요.”

이어 피부가 맞닿았다가 떨어지는 소리, 두 남녀의 입술이 서로를 탐하는 소리가 욕실을 가득 메웠다. 이리아의 어깨와 날개뼈 부근에서 맴돌던 두 손은 그녀의 허리를 타고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이리아는 덱스터와 온전히 하나가 되겠다는 듯, 그의 목덜미를 팔로 감아 있는 힘껏 껴안았다. 신음성이 목소리를 먹어 버리기 전에, 그녀가 재빨리 덱스터의 귓가에 속삭였다.

“사랑해요.”

“내가 훨씬, 훨씬 더 많이 사랑해.”

덱스터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짐승의 고동이 울려 퍼졌다.

창백한 피부 위, 밤새 새빨간 꽃들 위로 또 다른 꽃송이들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이리아는 아침부터 일을 치르면 온종일 몸이 엉망이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녀를 야금야금 삼키기 시작한 남자를 막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미 늦었다.

***

저 먼 동쪽의 나라에는 여우와 관련된 설화들이 많다. 설화 속의 어떤 여우는 인간의 기(氣)를 빨아먹음으로써 연명한다고 한다.

이리아는 아주 잠시, 덱스터 하워드가 혹시 그 설화 속 여우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그가 몸속의 기를 모조리 쪽쪽 빨아가 부족한 체력을 채우는 느낌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은 완전히 녹초가 된 마당에 덱스터 하워드가 저리 쌩쌩할 리 없었다.

곧 매일 침대보를 갈아야 하리라는 로샨의 말이 이제는 다른 의미로 두려워졌다. 덱스터를 껴안은 그 순간만큼은 기분이 하늘을 날아갈 만큼 좋았지만, 후에는 기절할 정도로 힘들기 때문이었다.

욕실 안에서, 이리아는 덱스터가 전날 밤 ‘나름 상당히 노력’했었다는 문장의 뜻을 뼈저리게 이해했다. 그는 오랜만에 몸을 섞은 이리아를 배려하여 정말로, ‘나름 상당히 노력’했었던 거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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