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쿵-.
루의 온몸에서 힘이 빠져, 그의 두 무릎이 땅과 부딪혔다. 그는 이리아의 앞에 무릎을 꿇은 채로 끅끅대며 부르짖었다.
[죄송해요, 아가씨. 빨간 머리를 한 아가씨의 모습을 보니, 지난 세월 내내 제가 아가씨께 너무나도 가혹한 짓을 저지른 것 같아요.]
[아니야, 루. 네가 있었기에 그나마 그 성을 버틸 수 있었던 거야. 그러니까 제발 그리 말하지 마…….]
이리아가 황급히 달려가 루를 안아 주었다. 하지만 루는, 차마 이리아를 마주 안지 못해 온몸을 바들바들 떨 뿐이었다.
[저는 비록 여신이 준 운명에 따라 일평생을 살아왔지만, 아가씨와 다섯 뿔의 여신 중 한 주군을 선택하라 하면 저는 무조건 아가씨를 택할 거예요.]
[나 하나 때문에 신념을 접을 필요 없어, 루.]
[제 선택이에요. 제발 그리하도록 허락해 주세요.]
이리아는 금반지가 끼워진 왼손을 들어 천천히 루의 뺨을 감쌌다. 그의 눈물이 손바닥과 더불어 반지 안쪽을 흠뻑 적셨다.
눈물 젖은 루의 얼굴은 그의 외형과 걸맞지 않게 너무나도 늙어 보였다. 주름살 하나 없었으나 깊은 황금빛 눈동자는 이미 노인의 것이었고, 그 속에는 루가 여태껏 살아온 200년의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덱스터 하워드에게는 아가씨의 사랑이 조건이라 했지만, 사실은 언젠가부터 그 조건 따위는 상관이 없어졌어요. 저는 그저 아가씨의 행복을 바랄 뿐이에요. 아가씨께서 행복하시다면, 저는 아무것도 필요치 않아요.]
루가 애처롭게 미소 지으며 이리아의 손바닥에 뺨을 파묻었다.
그는 오랜 세월 기다리고 섬겼던 대마법사를, 마침내 가슴속에서 떠나보내는 중이었다.
[저는 내일 아침, 동이 트기 전에 이 나라를 뜰 거예요. 에즈메릴다 여왕님께는 제가 잘 설명해 드릴 테니 부디 걱정하지 마세요.]
[루…….]
이리아가 루의 가슴팍에 온몸을 던져, 그를 두 팔 한가득 안았다.
사실, 이리아는 루와 이렇게 영영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루는 이리아에게 너무나도 소중한 존재였고, 이리아도 루에게 분명 소중한 존재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리아 못지않게 루퀼렘도 소중했다.
루가 오랜 세월 함께한 제 고향을 저버릴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았기에, 이리아는 차마 루퀼렘에 가지 말고 함께 있어 달라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루의 고향까지 뺏어 나쁜 욕심쟁이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이리아의 뺨 위로 투명한 물기가 묻어 나왔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얼굴은 이미 루의 눈물이 묻어 축축해진 지 오래였다.
[기나긴 세월 내내 나와 함께 있어 줘서 고마워.]
[반드시 행복하셔야 해요, 아가씨. 반드시.]
루와 이리아는 오랜 과거를 추억하며 아주 긴 시간 서로를 껴안고 있었다. 인생은 만남과 헤어짐의 반복이라지만, 이리아는 평생의 기억을 나누어 가진 루 아휜과의 작별인사가 익숙지 않았다.
이리아가 저택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전체 소등을 끝낸 뒤였다. 어두운 복도를 거니는 그녀의 귓가에 나직한 빗소리가 들려왔다.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리아는 루퀼렘으로 돌아가는 루의 옷자락이 가랑비에 젖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녀는 부디 옅은 빗줄기가 조금만 대지를 적신 후 그치기를 소망했으나, 하늘은 꽤 오랫동안 물을 쏟아 내렸다.
쏴아아-. 고요한 침실에는 오로지 떨어지는 빗소리뿐이었다.
사방은 적당히 어두웠지만, 이리아는 기분이 싱숭생숭해서 도통 잠들 수가 없었다. 그녀가 천장 위에 내려앉은 나무들의 그림자를 구경하고 있을 때, 빗소리를 뚫고 짧은 두 번의 노크가 들려왔다.
이어,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나직한 남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루 아휜은 동이 트기 전에 루퀼렘으로 돌아간다더군.”
이리아가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기껏 손보았던 빨간 곱슬머리가 이불보에 눌려 엉망이 되었지만, 이를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어둠 속에 서 있는 덱스터의 위로 희미한 달빛이 내려앉았다. 음영이 진 그의 얼굴은 이리아의 눈에 상당히 무덤덤해 보였다.
그 모습이 조금 전 달빛 아래서 흐느끼던 루와 너무나도 대조되었기에, 이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실없이 웃고 말았다.
“혹시 당신도 함께 돌아가는 것이라면, 굳이 내게 숨길 필요 없…….”
“안 돌아가요.”
이리아는 긴 심호흡을 내쉰 후, 문가의 덱스터를 향해 재차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저는 비센티움에 남기로 했어요, 공.”
나뭇가지에 가렸던 보름달이 옆으로 넘어오며, 덱스터의 얼굴을 더욱 선명히 비추었다. 두 눈동자에 가득했던 그의 무덤덤함은 곧 혼란스러운 감정이 되었고, 마지막에는 의심으로 변모했다.
덱스터는 아주 긴 시간 후에야 입을 열었다. 빗소리 사이서 울리는 그의 목소리는 어느샌가 한껏 갈라져 있었다.
“……대체 왜?”
“하워드 공과 결혼식을 올려야 하니까요.”
그리고 또다시, 덱스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새까만 머리를 헝클어뜨린 그는 커다란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수차례 쓸어내리다가, 마지막에는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다.
그건 너무나도 애처로운, 한 남자의 심호흡이었다.
“루…… 루 아휜은 분명 당신이 이곳에 남는 조건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었는데……?”
새하얀 보름달은 침대에 오도카니 앉아 있는 이리아도 비추었다.
덱스터에게서 단 한 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은 그녀의 손바닥은 언젠가부터 흠뻑 젖어 있었다. 긴장과 환희로 인해 새어 나온 식은땀 때문이었다.
덱스터는 한껏 일그러진 표정을 하고선 비틀비틀 이리아에게로 다가갔다. 이리아의 바로 앞에 다다른 그는 이제는 완전히 쉬어 버린 목청으로, 한 글자 한 글자를 힘겹게 내뱉었다.
“이리아, 날 사랑해?”
덱스터는 짝사랑을 시작한 이래로 지금껏 수많은 실망을 견뎌 왔다. 그는 만일 이번에도 자신의 기대와 어긋난다면, 더는 버틸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마법으로 꾸민 이리아의 녹빛 눈동자가 서슴없이 떨렸다. 그녀는 눈동자만큼이나 요동치는 손을 뻗어 덱스터의 뺨을 쓰다듬었다.
이리아의 목소리 또한, 어느덧 덱스터의 것과 마찬가지로 완전히 쉬어 있었다.
“인제 보니 노력뿐만이 아니라 용기도 필요한 말이네요, 공. 짧디짧은 이 한마디를 도통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어요.”
“당신이 운을 띄워. 그럼 내가 완성할게.”
달빛이 내려앉은 방 안에서,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의 이마를 맞대었다.
이리아는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해진 덱스터의 숨결을 느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
“사랑해.”
호흡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급하게 내뱉은 한 마디 속에는 고통이 스며들어 있었다.
덱스터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버티기 힘든지 옅은 신음성을 흘리다가, 이리아의 뺨을 감싸며 속삭였다.
“당신도 나를 사랑하게 된 거지?”
그리고, 이리아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네.”
덱스터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와 이리아는 이마를 맞댄 채, 이 순간을 영원토록 기억 속에 담고 싶다는 듯 가만히 서로의 온기를 느낄 뿐이었다.
이리아는 그녀의 손등 위로 낯선 물기가 떨어지고 나서야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물기의 정체가 눈물이라는 사실을 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 하워드 공?”
덱스터가, 울고 있었다.
덱스터는 그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는 고통도, 혼란도 없이 멍하게 풀려 버린 얼굴을 하고선 투명한 눈물만 뚝뚝 떨어뜨렸다.
무표정하게 눈물을 흘리는 덱스터는 보름달 아래서 울던 루의 모습과 참 비슷했으나, 그만큼 다르기도 했다. 보름달 아래의 루가 세월을 후회한 노인이었다면, 덱스터는 소년이었다.
아주 오래도록, 사랑을 그리워했던 한 소년.
이리아가 허둥지둥 옷소매로 덱스터의 볼을 닦아 냈다. 하지만 이후에도 덱스터는 한동안 넋을 놓고 있다가, 뒤늦게 옅은 신음성을 흘렸다.
이리아의 손길 아래서, 무표정했던 얼굴은 천천히 변했다. 전쟁터에서 은하수가 드넓게 피어났던 그날처럼, 덱스터는 지나간 나날을 회상하며 떠오르는 감정들을 오롯이 제 표정 속에 녹여 냈다.
“하워드 공…….”
이리아는 난생처음으로 사랑이 스며든 한 남자의 눈물을 닦아 주고 있었다. 옷소매를 흠뻑 적신 눈물은 그녀의 생각보다 훨씬 더 뜨겁고 애달팠다.
“왜, 왜 우세요……. 울지 마세요.”
“참을 수가 없어. 그냥 눈물이 나와.”
덱스터는 눈물이 맺혀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바로 앞의 이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는 당황한 기색이 가득한 이리아의 얼굴을 확인하고선, 양 보조개를 드러내며 하하 웃었다.
“기뻐서 그런가 봐. 부모님을 잃은 후로, 언제나 혼자였던 내게 드디어 진짜 가족이 생겼어.”
볼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은 여전히 덱스터의 턱 끝에 아롱아롱 맺혀 있었다. 이리아는 눈물을 닦는 것을 그만두고, 축축하게 젖은 그의 입술에 살포시 키스했다.
마치 이마를 맞대었던 그 순간처럼, 이리아와 덱스터는 서로의 입술을 맞붙인 상태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눈물이 스며들어 입 안에 짭짤한 맛이 맴돌았지만, 둘은 그마저도 좋았다.
지난 며칠, 맹렬하게 요동치던 이리아의 가슴속은 사랑을 고백하니 오히려 잠잠해졌다. 막연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자유에 대한 지독한 갈망, 마음을 보답하지 못해 들었던 죄책감이 아주 기나긴 시간이 지난 끝에야 모두 해소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볼을 타고 내려오는 물줄기가 늘었다.
대체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리아도 투명한 눈물을 하나둘씩 흘려보내고 있었다.
지난 세월 내내, 자유만 갖는다면 텅 빈 인생이 완전해지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 믿음은 틀렸다.
그녀는 인생을 완전하게 만들어 줄 단 하나의 열쇠가, 평생토록 바랐던 자유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마침내 깨달았다.
‘……자유가 아니었어.’
자유가 아니었다.
사랑이었다.
이리아는 지금껏 여신에게 수만 번의 기도를 하며 두 날개가 아닌 다리를 준 여신을 원망했었다. 일평생을 갇혀 지냈던 루퀼렘 성안에서 여신을 원망하며, 대마법사로 태어나고 만 그녀 자신을 함께 욕하고 깎아내렸었다.
그러나 사랑을 깨달은 순간, 길고 길었던 원망도 드디어 끝이 났다.
여신이 다리를 준 데에 감사한다. 만일 내가 날개를 가져 저 머나먼 세계로 날아가 버렸다면, 덱스터 하워드를 결코 만나지 못했을 테니까.
세상을 메운 나직한 빗소리 속에서, 두 남녀는 아주 긴 시간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느꼈다. 오랜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연 이는 덱스터였다.
그가 흠뻑 젖어 버린 이리아의 뺨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심장이 너무 아파. 이 감정이 너무나도 벅차서, 버티기가 힘들 정도야, 이리아. 할 수만 있다면, 당신한테 내 안을 모조리 꺼내 보여 주고 싶어.”
“……그럼 보여 주세요.”
이리아가 뺨을 감싼 덱스터의 손을 아래로 끌어내려, 제 왼쪽 가슴 위에 올렸다. 가슴 아래 숨겨진 심장은 쏟아지는 빗소리를 따라 쿵쿵 고동하고 있었다.
이리아는 바로 앞에서 자신을 멍하게 응시하는 한 남자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비로소 준비되었다는 듯 두 눈을 지그시 감고서, 제 모든 것을 세상에 내보였다.
이리아의 마지막 문장이, 빗소리와 함께 공기 중에 나직이 울려 퍼졌다.
“공의 사랑을 제게 다 보여 주세요.”
***
이리아 아델리어와 덱스터 하워드.
이리아의 머리카락은 온 세상의 빛을 담은 듯 새하얬고, 덱스터의 머리카락은 온 세상의 빛을 버린 듯 새까맸다. 국경선을 공유하나, 적대적인 양 국가에서 태어난 둘은 각자가 가진 색만큼 정반대인 존재였다.
성에 갇혀 살아온 이리아는 따스하고 안전했지만, 자유를 소망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어 군대를 전전한 덱스터는 자유로웠지만, 비호를 소망했다.
둘은 한때 투명한 난간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얼굴조차도 제대로 보지 못한 적이 있다. 이리아는 난간 밖의 군인을 선망했기에, 그를 잊지 못했다. 덱스터 또한 난간 안의 소녀를 선망했기에, 그녀를 잊지 못했다.
덱스터는 이리아의 꿈이었고, 이리아는 덱스터의 꿈이었다.
그러니 두 사람은 어쩌면 첫 만남부터, 이미 서로를 갈망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