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화 (89/109)

88화

정말로 지난 과거의 경험들이 도움이 되었던 건지, 이리아는 예상보다 이르게 보고서 작성을 끝냈다. 덱스터와 루가 중간중간 내용을 덧붙이며 많은 도움을 주긴 했으나, 이리아가 없었다면 절대로 완성하지 못할 가짜 보고서였다.

셋은 마지막으로 머리를 맞대고 완성된 보고서를 읽어 내려갔다. 분명 자신이 썼는데도 거짓투성이인 내용이 마음에 걸리는 건 어쩔 수 없는지, 이리아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하워드 공, 그런데 과연 카즈웰 4세가 이걸 믿을까요?”

“사실, 카즈웰의 신뢰 여부는 딱히 중요치 않아. 그자가 최근에 정상인 자녀를 가지기 위해 민간신앙까지 따르기 시작했거든. 자존심을 다 내다 버릴 정도로 초조하다는 의미이지. 아마 이 일지가 거짓이라는 점을 눈치채도, 여유가 없어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는 못할 거야.”

아아. 이리아의 잇새서 대답 대신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비센티움은 비록 수차례의 전쟁을 겪었으나 건국 200년이 지난 유서 깊은 나라였기에, 고유의 전통이 풍부한 나라였다. 비센티움인들은 역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만큼 전통은 따랐지만, 딱히 민간신앙을 믿지는 않았다.

루퀼렘에는 마법이 있었고, 저 먼 동쪽의 대륙에는 주술이 있었지만, 비센티움에는 언제나 총과 칼뿐이었다. 비센티움인들은 쇠붙이와 함께 수많은 전쟁을 치러 이겨 온 경험으로 인해 물리적인 기술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비센티움인들의 기술 선호 사상에는 당연히 황실의 영향도 컸다. 비센티움 황실은 루퀼렘 왕실과 적대적인 관계인 만큼 제국민들에게 마법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 주고 싶었고, 카즈웰 3세는 기술의 위상을 높이고 마법을 미개하게 취급함으로써 이를 달성했다.

비센티움인들 사이서는 실체가 없는 민간신앙 또한, 마법처럼 미개하게 취급받는 추세였다. 그렇기에 이리아는 카즈웰 4세가 아이의 안위를 위해 민간신앙까지 따르기 시작했다는 말을 차마 믿을 수가 없었다.

카즈웰 4세의 초조함과 절박한 기분이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생생하게 느껴지는구나. 이리아가 아무 말 없이 치맛자락만 만지작거리는 동안, 두 남자의 대화가 이어졌다.

“결국, 문제들은 황태자비가 출산한 후 한꺼번에 몰아닥치겠군요. 마치 10개월의 시한폭탄을 옆에 둔 기분입니다.”

“10개월이라는 안전한 시간을 보장해 주는 시한폭탄이야. 그사이에 어떻게든 카즈웰의 관심을 루퀼렘이 아닌 다른 곳으로 돌릴 대책을 세워야겠지.”

“설마 당신…… 카즈웰 4세의 눈앞에 그가 탐낼 만한 작은 왕국을 들이밀어서 그곳을 희생양으로 삼을 셈입니까? 아가씨께서 절대로 허락지 않으실 겁니다!”

“카즈웰은 과거 그 어떤 군주보다도 영토 욕심이 많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훗날, 그는 엘퀸즈 산맥을 가지기 위해 말도 안 되는 핑곗거리를 대서라도 루퀼렘과의 전쟁을 강행할 거다.”

“비센티움이 엘퀸즈 산맥을 차지하면, 산들은 머지않아 쑥대밭이 되고 말 겁니다. 무자비하게 나무를 벌목하고 동물들을 사냥하겠죠. 저와 여왕님은 그 꼴은 절대로 못 보기에 어떻게든 전쟁을 막을 테지만, 당신의 방법으로는 절대 아닙니다, 덱스터 하워드!”

대화 내내 무표정하게 턱을 괴고 있던 덱스터가 처음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조금 의미심장한 어투로 물었다.

“……혹시 루퀼렘 왕실이 억지를 부려서라도 우리에게 엘퀸즈 산맥을 내주지 않는 것이, 방금 네가 말한 이유 때문인가?”

“그걸 이제 아셨습니까? 비센티움인들은 자연을 너무 파괴합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이유에, 덱스터는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가늘어진 눈초리로 이리아를 돌아보자,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 사실이긴 하잖아요.”

그리고, 덱스터는 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졌다.

황실이 귀족가에 서신을 보내기는 쉬우나, 귀족가가 황실에 서신을 보내기는 쉽지 않았다. 단순히 종이 몇 장 보내는 건데도, 지켜야 할 예법과 과정이 참 복잡했다.

덱스터가 황실에 서신을 부칠 준비를 하는 동안, 루와 이리아는 오랜만에 둘만의 시간을 가졌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밤바람이 몹시도 서늘하다. 이리아는 새까만 밤하늘 한가운데에 뜬 보름달을 보며 작게 웃어 보였다.

루퀼렘의 새벽하늘 위에는 두 개의 달들이 있으나, 그들의 모양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초승달과 보름달이 함께 자리한 하늘은 루퀼렘의 새벽이 마법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항상 그대로였다.

이리아는 비센티움에 온 이후 변하는 달의 모습을 매일 밤 보아왔지만, 여전히 신기했다. 태양과 별, 그리고 변화하는 달은 만일 이리아가 루퀼렘을 빠져나오지 않았더라면 일평생 보지 못했을 터이기에 더더욱 특별한 존재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벌써 보름달을 본 횟수가 열 손가락을 넘어갔구나…….’

새삼 비센티움에 온 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사실이 성큼 닿아왔다. 지난 20년 동안, 루퀼렘 성에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과거가 주마등처럼 이리아의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순간이었다.

‘……춥다.’

이리아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의 얼굴에 닿아 오는 밤바람의 차가움은 곧 비센티움에서의 두 번째 여름이 끝나 가고 있다는 의미였다.

루가 성기사들과 함께 이 나라를 떠날 시간도 머지않았구나.

이리아는 긴장으로 인해 고인 침을 목 너머로 꿀떡 삼키고선, 옆에서 보름달을 구경하는 루 아휜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있잖아, 루. 네게 할 말이 있어. 하워드 공에게 내걸었던 ‘조건’에 관한 이야기야.]

사랑한다는 말은 덱스터에게 가장 먼저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단어는 몇 번을 시도해도 쉽사리 나오지 않았고, 이리아는 루를 루퀼렘에 보낸 후에 다시 천천히 노력해 볼 생각이었다.

이리아는 대체 어떻게 운을 떼어야 할지 몰라 한참을 우물쭈물했다. 그러나 훗날 돌이켜 보면, 이는 참 부질없는 행동이었다.

이미, 루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다는 눈빛이었으니까.

[결국, 그를 사랑하게 되셨네요, 아가씨.]

노랫가락만큼이나 아름다운 남자의 미성이 달빛이 스며든 공기 중에 잔잔히 퍼져나갔다.

휘잉-. 밤바람이 불어와 루의 머리를 풀어 헤쳤다. 이리아는 갑자기 날아든 새하얀 머리카락에 가려 루의 눈을 볼 수 없었지만, 그의 입매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루 아휜은 분명 웃고 있었다. 그러나 호선을 그린 입술과 어울리지 않게, 곧 드러난 두 눈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그의 슬픔 속에는 자존심이 상한 남자의 패배감과 씁쓸한 감정이 어지럽게 섞인 채였다. 이리아는 루의 팔을 잡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위로가 될 것 같지 않아 관두었다.

그녀가 살짝 갈라진 목소리로 힘없이 대답했다.

[정말로, 너는 나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는 듯해.]

[아가씨의 루퀼렘에서의 20년을 한순간도 빠짐없이 지켜보아 왔으니까요. 아가씨의 행동, 눈동자의 움직임만으로도 전 무엇이든 다 알 수 있어요.]

루가 호흡을 가다듬고 제 기나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곧이어 드러난 루의 두 눈동자는 충혈되어 온통 새빨갰다. 그는 울분을 참는 듯, 아랫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거칠게 깨물었다.

[……루?]

루가 울분을 참는 저 얼굴을, 이리아는 태어나서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녀에게 자유를 약속했을 때. 그녀를 훗날 반드시, 루퀼렘 밖의 세계에 데려다주겠다고 약속했던 그 순간, 루는 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렸을 적의 가장 가슴 아픈 추억이 떠오르자, 이리아의 속은 절로 저릿해졌다. 왜인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아 고개를 휙 돌려 버리자, 뒤편에서 잘게 떨리는 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에즈메릴다 여왕님께 저의 과거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신 적이 있죠?]

[응. 자세하게는 아니지만, 네 과거에 관해 어느 정도는 알아.]

[그렇다면 제 인생이 아가씨로 인해 완전히 뒤바뀌었었다는 사실도 아시나요?]

[그, 그건…….]

이리아의 숨소리가 루의 것과 마찬가지로 서슴없이 떨렸다. 그렇게 그녀는, 끝내 다시 루를 돌아보고 말았다.

이리아가 가진 어린 시절의 추억 속에는 언제 어디서나 루가 껴 있었다. 그녀의 추억은 장장 20년이라는 세월을 담고 있었지만, 그 세월을 함께 보낸 루 아휜은 늙지 않아 언제나 모습이 같았다.

마법사들의 수명이 일반인과 비교하여 길기는 하나, 루 아휜은 조금 더 특별했다.

이리아 아델리어가 대마법사의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듯, 루 아휜은 대마법사를 평생 보필할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자였다. 그렇기에 이리아가 죽을 때까지는 그도 함께 늙거나 죽지 않는 것이었다.

대마법사 엘드리지가 사망한 이후, 꽤 긴 시간 루퀼렘 군주의 두 번째 자리는 공석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엘퀸즈 산맥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 번개가 내리치니, 루는 본능적으로 새로운 대마법사가 탄생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일평생 이리아를 기다려 왔던 루는 망설임 없이 산을 올랐다. 번개가 내리친 그날은 한여름인데도 불구하고 함박눈이 펑펑 내렸었는데, 눈이 루퀼렘 성의 온 지붕을 덮을 때 즈음 루 아휜은 만년설 속의 아기와 만났다.

그렇게 새하얀 눈 속에 파묻혀 있던 이리아를 발견한 순간.

루 아휜은 마침내 자신의 길고 길었던 인생의 의미를 깨우쳤다.

루는 걸음마도 떼지 못한 아기였던 이리아가 소녀가 되고, 숙녀로 자라날 때까지 언제나 그녀의 옆을 지켰다. 그는 대마법사 이리아 아델리어를 여왕보다도 더 높은 존재로 보필했지만, 한편으로는 평생 가지지 못했던 친딸처럼 애정하기도 했다.

덱스터는 루가 사랑을 모른다고 했으나, 사실 그는 사랑을 알았다.

단지, 덱스터가 가진 사랑과 그가 가졌던 사랑의 형태가 사뭇 달랐을 뿐이다.

보름달이 구름을 타고 넘어와 루의 얼굴을 환히 비추었다. 새하얀 빛무리 한가운데, 그를 본 이리아의 눈이 점차 커졌다.

[……루?]

루의 얼굴은 어느샌가 눈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루는 아무 소리도 없이 어깨만 들썩이다가, 이내 참지 못하고 아이처럼 엉엉 울고 말았다.

하늘 위의 저 보름달을 그 자신이 직접 이리아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자신이 직접, 이리아가 죽도록 바라던 자유를 선물해 주고 싶었다.

이리아 아델리어의 어린 시절은 기억의 파편으로서 하나둘씩 루의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기도가 싫다고 짜증 내던 이리아, 마법석을 집어 던지던 이리아, 자유를 달라며 화를 내던 이리아, 그리고 하늘의 새를 보며 말없이 눈물을 흘리던 이리아가 천천히 지나갔다.

그의 기억 속에 사는 이리아는 한없이 어리고 작은 소녀였다. 그토록 아름다웠던 한 소녀가 일찍이 행복을 잃어버렸고, 일평생 자유를 소망하던 중 결국 모든 걸 버리고 도망쳐 버렸다는 사실이 루의 가슴을 찢어질 듯 아프게 했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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