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놀랍게도, 맞닿은 덱스터의 이마는 아프다고 착각할 만큼이나 뜨거웠다. 겉으로 티가 나지 않았을 뿐, 그의 얼굴 또한 이리아의 것과 마찬가지로 열이 올랐던 거다.
이리아의 손끝은 점점 내려가 어느덧 덱스터의 뺨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녀가 두 눈을 감으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사랑한다고 해 주세요, 공.”
덱스터는 시야를 빽빽하게 채운 붉은 속눈썹을 빤히 응시하다가, 함께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리아의 속삭임보다도 훨씬 부드럽고 조그마한 목소리로 사랑을 고백했다.
“사랑해, 이리아. 이 여름이 영원토록 끝나지 않기를 바랄 정도로 사랑해.”
뺨을 쓰다듬던 이리아의 손끝은 더더욱 아래로 내려가, 이제는 목덜미 안쪽에서 뜨겁게 박동하는 맥박을 느끼고 있었다.
덱스터의 맥박은 힘차게 고동쳤지만, 결코 속도가 빠르지는 않았다.
이리아는 문득 속도가 다른 서로의 심장까지도 참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여전히 이마를 맞댄 채로, 불만 가득히 웅얼거렸다.
“하워드 공은 어떻게 이리 사랑한다는 말을 쉽게 하는 건가요……?”
“이 말이 쉬워 보여?”
“네.”
“그럴 수가. 전혀 쉽지 않은데.”
천천히 눈꺼풀을 든 이리아는 앞을 보자마자, 자기도 모르게 숨을 들이켜고 말았다.
대체 언제부터였는지, 먼저 눈을 뜬 덱스터가 새까만 눈동자를 빛내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거리가 너무 가까운 탓에, 덱스터의 숨결 안쪽에서 박하 향이 생생히 느껴졌다. 이리아는 또다시 얼굴에 감돌기 시작한 열기를 곧장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가 머리카락으로 달아오른 얼굴을 가리는 동안, 덱스터의 말이 이어졌다.
“당신에게 고백을 하기 전에 언제나 세 번의 심호흡을 해. 식은땀이 나는 손바닥을 애써 숨기고, 떨리는 목소리를 다듬어야 하지. 한 글자 한 글자를 내뱉을 때마다 심장도 함께 토해 내는 기분이기에 혹여 실수하지는 않았는지 수차례 되짚기까지 하는데, 쉬워 보인다니.”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려던 이리아의 노력은 이내 수포가 되고 말았다. 덱스터가 숨든 말든, 아무렴 상관없다는 듯 머리카락을 우악스레 헤치고 들어가 키스한 것이다.
“이게 엄청난 노력의 결과라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해, 내 사랑.”
두 귀를 가득 메운 심장 박동 사이서도, 서로의 입술이 만났다가 떨어지는 소리는 잘만 들렸다.
이리아는 빙글빙글 도는 시야를 겨우 다잡고선, 또 한 번 다가오는 입술을 맞아들였다.
첫 번째 키스는 짧게. 하지만 두 번째 키스는 길게. 덱스터의 입맞춤은 거의 모든 순간, 이 규칙을 따랐다.
“하, 하워드 공……!”
“쉬이-.”
맥박을 짚고 있던 이리아의 손은 어느덧 덱스터의 옷깃을 거세게 휘어잡은 채였다. 곧고 단정했던 옷감이 그녀의 손아귀 안쪽에서 거침없이 구겨졌으나, 이를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두 귀를 한가득 메웠던 심장 소리는 곧 거친 숨소리가 되었다. 덱스터는 다른 때보다 일찍 입술을 놓아주었지만, 호흡이 딸린 이리아가 힘겨워하는 건 여전했다.
진한 박하 향이 이리아의 입 속에도 흠뻑 스며들었다. 키스를 끝낸 두 남녀는 서로의 이마를 맞댄 채, 서로의 박하 향을 들이마시며 가빠진 숨을 가다듬었다.
숨소리만이 감도는 진득한 공기 속에서, 먼저 입을 연 이는 이리아였다.
“……하워드 공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그게 무엇인데?”
“나중에, 준비가 되면 말씀드릴게요.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 말이에요.”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문장과 당신이 생각하는 문장이 부디 같았으면 좋겠는데.”
덱스터가 슬피 웃으며 제 뺨을 쓰다듬는 이리아의 손길을 느꼈다. 그는 이어 고운 턱 끝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춘 후, 그녀를 조심스레 내려 주었다.
그리고, 이리아를 다시금 양팔 가득 껴안으며 귀엣말했다.
“당신과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나는 이 계절이 절대로 끝나지 않도록, 여름인 나라들만 찾아 일평생 도망 다닐 수 있어.”
사랑해, 이리아. 영원히.
덱스터는 감정이 다 담기다 못해 철철 흘러넘치는 세 마디를 덧붙이고선, 세 번째로 서로의 입술을 맞대었다.
가벼운 키스였지만, 입술이 닿은 그 짧은 순간에 이리아의 심장은 펑 터지는 듯했다.
“사랑해, 이리아. 영원히.”
꿈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덱스터의 세 마디는 이리아의 마음속에 자리한 하나의 ‘버튼’ 같은 것이었다. 버튼이 눌리면 이리아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바닷속에 풍덩 빠져 버린 기분이 들며,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솟아오르는 감정을 도통 버틸 수가 없어졌다.
이리아는 제자리서 멀어지는 덱스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여전히 벅찬 호흡을 가다듬었다. 날숨을 내쉴 때마다 공기 중에 퍼지는 박하 향이 왜인지 참 색정적으로 느껴졌다.
비센티움은 네 계절을 모두 가졌으나, 애석하게도 여름이 그다지 길지 않은 나라였다. 어느덧 샛노랗게 변한 하늘은 루 아휜과의 이별이 가까워졌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거대한 복도 창밖으로 주홍빛 노을 아래를 거니는 성기사들이 보였다. 덱스터의 저택에서 잠시 머물던 성기사들은 업무를 위해 한 명씩 루퀼렘으로 돌아가, 이제는 열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만큼의 인원밖에 남지 않았다.
이리아는 대체 성기사들이 어떤 일을 하러 따로따로 루퀼렘으로 돌아가는지 조금 궁금했으나, 곧 의문점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이제는 알 필요 없어.’
빨간 머리 ‘씨시 힐데어’의 모습을 한 이리아는 루퀼렘 성기사들의 행보를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현재 그녀에게는 어디까지나 덱스터 하워드가, 곧 입 밖으로 꺼낼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가 제일 중요했다.
***
덱스터는 성격 자체가 원체 담담하기에, 이리아가 왜 그를 피했는지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하지만 내심 신경은 쓰였는지, 그녀를 만질 때마다 전보다 더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동전을 던지며 술을 마신 그날 밤, 자신이 너무도 성급하여 이리아가 불편해했으리라 추측하는 듯했다.
이리아의 목욕 시간은 하루가 지날수록 길어졌다. 이전까지는 하녀들이 주는 대로 향유를 넣었으나, 이제는 그녀가 손수 세심하게 향을 고르기 시작했다. 덱스터가 풍기는 향이 언제나 상쾌하다 보니, 이리아 또한 자신의 체취에 민감해진 탓이다.
외모를 치장하는 정성도 마찬가지로 늘었다. 아마 로샨을 포함한 하녀들은 생전 거들떠보지도 않던 연지를 찾기 시작한 이리아를 보고, 전과는 달라진 그녀의 상태를 알아챘을 터다.
이리아가 거울 앞에 서서 잔뜩 부풀어 오른 곱슬머리를 정리하고 있을 때, 방문에서 ‘똑똑’ 소리가 들려왔다. 짧은 두 번의 노크 소리를 듣자마자 이리아는 풍성한 곱슬머리 위에 허둥지둥 물을 묻혔다.
“이리아.”
덱스터는 문틈으로 살짝궁 드러난 녹빛 눈동자를 확인하자마자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덱스터의 미소를 본 이리아는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처럼 그를 따라 함박웃음을 지었다.
덱스터가 이리아의 둥근 뺨을 손등으로 살살 쓸며 말했다.
“루 아휜과 당신이 도와주어야 할 일이 있어. 카즈웰 4세에 관한 일이야.”
……카즈웰 4세.
마음 한편에 밀어 두었던 이름을 듣기 무섭게, 이리아의 웃음은 순식간에 스러지고 말았다.
비센티움의 황태자 카즈웰 4세는 덱스터에게 루 아휜의 감시를 명령했었다. 이리아의 정체가 카즈웰 4세에게 발각되어 상황이 어지러워졌으나, 덱스터는 보여 주기 식으로라도 보고를 써 올릴 의무가 있었다.
카즈웰 4세는 원래 이리아를 죽인 후, 그녀의 목을 루퀼렘 왕실로 보내 전쟁을 시작할 계획이었다. 그는 이리아에게 자신의 손에 죽을 것인지, 아니면 덱스터의 손에 죽을 것인지를 선택하라고 했었으며, 자신의 손에 죽지 않으면 덱스터에게 정체를 알리겠다고 협박했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황태자비의 임신으로 인해 그의 모든 계획은 수포가 되고 말았다. 카즈웰 4세는 현재 덱스터가 이리아의 정체를 모른다고 착각 중이었기에, 덱스터는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서라도 그녀의 정체에 관해 완벽하게 무지한 척 시치미를 떼야 했다.
루는 이미 집무실에 도착하여 벽의 그림들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그가 덱스터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서는 냅다 질문부터 던졌다.
“황실에 올릴 보고서를 조작해 본 적은 있으십니까?”
“아니, 없어.”
“그렇다면 공식적인 문서에 거짓을 쓴 적도 없으시겠군요.”
“그래서 너와 이리아를 이곳으로 부른 거잖아. 난 거짓말은 못 써.”
덱스터 하워드는 군인 생활을 시작한 이후로부터 지금껏 수많은 보고를 올려 왔지만, 단 한 번도 거짓된 말은 쓴 적이 없었다. 거짓말도 해 본 사람이 잘한다고, 그는 거짓을 만들어 내는 데 큰 소질이 없는 남자였다.
그리고 이는 루 아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덱스터보다는 낯짝이 두껍고 뻔뻔한 자였으나, 거짓말은 잘 못 했다. 그의 비루한 거짓말 실력에는 융통성 없는 성격이 한몫했다.
그러니 결국, 셋 중에서 나설 이는 사전에 정해진 듯 딱 한 명밖에 없었다.
이리아가 양피지와 펜을 들고 있는 덱스터를 향해 두 손을 뻗었다.
“주세요. 제가 적을게요.”
“……정말로 당신이 적어도 되겠어?”
“저희 둘이 머리를 맞대어 쓴 것보다, 아가씨께서 홀로 쓰신 게 훨씬 더 자연스러운 보고서가 될 겁니다. 군소리 말고 넘겨드리시죠.”
루 아휜과 성기사들이 비센티움 국경을 넘은 이후로부터 꽤 긴 시간이 지난 만큼, 보고서에 적어야 하는 글의 분량이 만만치 않았다. 덱스터가 내용을 따로 정리한 뒤에 옮기라는 둥 걱정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이미 펜을 잡아 버린 이리아의 손은 거침없었다.
루 아휜은 길고 하얀 머리를 옆으로 땋아 내린 채였다. 그는 어김없이 아리따운 외모를 자랑하며, 앞으로 내려온 잔머리들을 우아하게 뒤 뒤로 넘겼다.
“괜한 걱정하지 마시죠, 덱스터 하워드. 아가씨께서 열세 번째 생일을 넘기실 때까지 에즈메릴다 여왕님께서는 매일 아가씨의 하루 일지를 검사하셨었습니다. 분명 거짓말로 가득한 일지였는데도, 여왕님께서는 모든 문장을 철석같이 믿으시더군요.”
“쓰, 쓸데없이 하워드 공한테 그런 말은 왜 해, 루…….”
“아가씨의 거짓말 실력을 저 비센티움인이 잘 모르는 것 같아 꺼낸 말입니다.”
그러잖아도 한창 과거가 신경 쓰여 죽겠는데, 어린 시절의 이야기까지 언급되니 이리아는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워졌다.
그녀가 루를 매섭게 노려보기 시작했을 때, 바로 옆에서 덱스터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씨시 힐데어’가 거짓말에 소질이 있다는 사실은 내가 제일 잘 알지.”
몹시도 짓궂은 농담이었다.
덱스터의 웃음소리는 불만이 덕지덕지 들러붙은 표정을 보자마자 더 커졌다. 그는 이리아의 뽀얀 뺨 위로 재빨리 입술을 찍어 누른 후, 전보다 더 감미로워진 미성으로 속삭였다.
“그때도 당신은 너무 사랑스러웠어.”
이리아는 성큼 다가온 덱스터의 새까만 눈동자 속을 넋을 잃고 응시했다. 끝을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눈 속에는 사랑과 애정이 흠뻑 담겨 있어, 도무지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뒤늦게 덱스터가 뺨에 입을 맞추었다는 사실을 깨닫고선 얼굴을 붉혔다. 이리아는 어색한 손짓으로 덱스터의 입술이 왔다 간 곳을 매만지다가, 그를 따라 수줍게 미소지었다.
덱스터에게 온 신경이 팔린 탓에, 이리아는 루의 표정이 굳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