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덱스터가 ‘쉬어’라는 짧은 말과 함께 이리아의 조그마한 정수리를 헝클어뜨렸다. 그는 자리를 뜨려고 했으나, 이번에도 옷자락을 휘어잡은 손 때문에 발걸음이 멈추고 말았다.
“하, 하워드 공.”
덱스터가 천천히 등을 돌려 이리아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잖아도 너른 덱스터의 어깨는 그림자가 져 더욱 거대해 보였다. 이리아는 빠져들 정도로 깊은 검은 눈동자를 잠시 넋을 놓은 채 응시하다가,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그, 이, 있잖아요…….”
긴 기다림 끝에 드디어 사랑이 왔다. 서로가 바랐고, 그렇기에 하늘과 여신에게 기도까지 한 감정이다.
한시도 늦출 수 없이, 이리아는 지금 당장 이 사랑을 전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이게 무슨 일인지, 생각과 달리 목소리가 나올 기미가 없었다.
이리아가 입술을 달싹이던 동안, 그녀의 낯빛은 몇 번이고 빨개졌다가 새파래지기를 반복했다. 덱스터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하는 듯했으나, 언제나처럼 재촉하지는 않았다.
루퀼렘에는 대마법사인 이리아에게 감히 사랑한다는 말을 할 이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이 세상에 태어난 이래로 덱스터를 제외한 누군가에게 단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 본 적 없었고, 당연히 해 보지도 않았다.
눈앞의 남자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가 없다. 목소리가 나오지를 않아.
‘이, 이럴 수가…….’
‘사랑’이라는 두 마디가 이렇게나 입 밖으로 꺼내기 어려웠던가.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한 목덜미를 어색하게 문지르던 이리아는 끝내 덱스터의 옷자락을 놓아주고 말았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니야, 차라리 잘됐어. 온몸에 향유를 바르고 머리를 정돈한 후, 제대로 예를 갖추어서 말하자.
‘……아직 기회는 많아.’
왜인지 이상한 이리아의 태도에, 새까만 눈동자 속으로 순식간에 걱정이 들어섰다. 덱스터가 그녀의 관자놀이를 허공에서 따라 그리며 조심스레 물었다.
“어디 아픈 건 아닌 거지, 이리아? 혹시 어젯밤 일 때문에 몸이 좋지 않은 거라면…….”
“아니에요. 다 괜찮아요.”
“그래.”
덱스터는 둥그런 이마 위로 짧은 키스를 남기고선, 정말로 이리아의 곁을 떠났다.
꿈의 잔상은 상당히 오래도록 남았다. 이리아는 고통스러운 얼굴을 한 채로 투명한 눈물방울을 뚝뚝 흘리던 덱스터를 떠올릴 때마다, 심장이 콩알만 하게 조여드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뽀얀 두 뺨이 제멋대로 뜨거워졌다.
그러잖아도 열이 오른 이리아의 얼굴은 욕탕에 들어가자마자 급기야 토마토보다도 더 새빨개졌다.
하녀들의 탄성 덕택에, 그녀는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아도 온몸에 난 자국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젯밤에 일찍이 잠자리에 들겠다 한 이유가 있으셨네요, 아가씨.”
로샨이 새로운 향유를 욕탕에 부으며 능글맞게 씩 웃었다. 저 먼 동쪽의 나라에서 들여온 향유인 걸까, 이리아는 생전 처음 맡아 보는 향이 욕실 한가득 퍼져 나갔다.
“솔직하게 말해 주셨으면 저희가 침대보도 미리 준비해 두었을 텐데요.”
“저도 예상하지 못했던 바, 밤이었어요.”
“아가씨께서는 부끄러움을 참 많이 타셔요. 곧 있으면 저희가 매일 침대보를 갈아야 할 텐데, 그럼 아가씨께서도 매일 얼굴을 붉히시겠네요.”
“치, 침대보를 매일…….”
화끈. 겨우 잦아들었던 열이 또다시 훅 올라온다.
하녀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빨개진 이리아를 사이에 두고 한마디씩 덧붙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호들갑은 다섯 뿔의 여신이 온다 해도 막을 수 없을 터다.
왜인지, 이 저택에 온 첫날을 다시 겪는 듯했던 이리아는 그냥 조용히 있는 게 낫겠다 싶어 침묵을 유지했다. 그녀는 자신이 입을 여는 게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행동이라는 사실을 그 어느 때보다 잘 알았다.
비록 대마법사의 몸으로 태어났으나, 이리아 아델리어도 속은 평범한 20대 초반 여인이었다. 그녀는 언젠가 하녀들이 돌려 읽고 있던 레이디 카트리나의 사랑 소설에 지대한 관심을 보여 잠시 빌렸던 적이 있었다.
레이디 카트리나는 사랑을 시작하면 하루아침에 온 세상이 아름다워 보인다고 했다. 먹지 않아도 배부르기에 배고픔도 느끼지 않는다고. 사랑하는 상대가 온종일 보고 싶어 미칠 지경에 이른다는 구절도 남겼다.
사랑을 잘 몰랐던 시절의 이리아는 책 속 구절들이 모두 사실이라고 믿었었다. 하지만 그녀는 ‘진짜’ 사랑을 시작하자마자, 소설과 현실은 다르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일단, 사랑을 시작했다고 갑자기 온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는다. 여름의 더위는 여전히 짜증스러웠고, 루시어스 데이즈먼이 슬슬 수업을 시작하기 위해 간을 볼 때마다 끔찍한 피곤이 몰려왔다.
먹지 않아도 배부르다는 말 또한 거짓이다. 이리아는 긴장이 풀리고, 식욕이 왕성해지니 이제는 세 끼를 제때 먹지 않으면 배가 고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상대가 온종일 보고 싶어 미칠 지경에 이른다는 구절은 아주 조금 공감했지만, 그마저도 오래 가지 않았다. 이리아는 덱스터가 보고 싶어 자주 찾아갔으나, 막상 그가 정말로 나타나면 후다닥 모습을 숨기기 바빴다.
이유 없이 심장이 뛰고, 이유 없이 부끄러워 죽을 것만 같다. 이리아는 덱스터를 볼 때마다 괜히 창피해져 그를 볼 면목이 없었다.
그녀는 지난날, 전쟁터에서 성난 망아지처럼 뛰어다니며 몸가짐을 제대로 못 했던 과거를 깡그리 지워 버리고 싶었다. 덱스터는 분명 모든 순간을 기억하고 있을 텐데, 그가 설마 자신을 비웃지는 않겠지만 철없던 과거가 부끄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얼굴도 제대로 씻고, 옷도 잘 빨아서 입고 다닐걸.’
하다못해 머리라도 제대로 정리하고 다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리아는 줄곧 괜찮다고 생각했던 새빨간 곱슬머리가 갑자기 싫어지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애석하게도, 대부분의 순간 엉망이었던 이리아와 달리 덱스터는 장소를 불문하고 항상 완벽했다. 그는 까치집이 진 머리를 제외하고는, 잠에서 막 깼을 때도 티 하나 없이 잘생긴 미모와 상쾌한 향을 가진 남자였다.
이리아는 기둥 뒤에 숨어 루시어스와 대화하는 덱스터를 빤히 지켜보았다. 순간 조금 불공평하다는 마음이 들어 덱스터가 흐트러졌던 모습을 찾아 과거의 기억을 싹싹 뒤졌지만, 역시나 없다.
이리아의 기억 속에서 추태를 부렸던 이는 항상 그녀 자신뿐이었다.
‘……이곳이 루퀼렘이었다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하고 예쁜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었을 텐데.’
루퀼렘의 ‘이리아 아델리어’는 가진 게 많았으나, 비센티움의 ‘씨시 힐데어’는 아니었다.
루퀼렘 성을 도망쳐 나온 이후로 단 한 번도 부와 명예를 그리워한 적 없던 이리아는 처음으로 대마법사의 자리가 아까워졌다. 그리고, 스스로가 몹시도 초라하게 느껴졌다.
과거 덱스터가 그랬던 것처럼 이리아는 그림자 속에 숨어, 덱스터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그녀 자신의 위치를 무수히 되새김질했다.
덱스터는 예민한 감각의 소유자답게 숨어 있는 이리아를 곧바로 알아챘다. 이리아는 갑자기 고개를 돌린 그와 시선이 딱 마주치자, 자기도 모르게 주춤주춤 물러나고 말았다.
‘어어……?’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서 다가오는 덱스터 하워드는 마치 신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그는 해가 중천에 뜬 한여름인데도 정장을 완벽하게 갖춰 입고선, 새까만 머리를 뒤로 깔끔하게 넘긴 채였다.
이리아는 조금 전까지 마구간에서 마야의 털을 빗겨 주다 저택에 들어온 참이었다. 말들과 함께 있던 그녀 자신의 모습이, 지금은 너무나도 엉망일 것만 같았다.
제자리서 잠시 어물쩍대던 이리아는 황급히 후다닥 도망쳤다. 그러나 이리아의 세 걸음은 덱스터의 한 걸음이었고, 그녀는 재빠르게 움직인 두 다리가 무색하게 곧장 허리를 틀어 잡히고 말았다.
“이리아.”
이리아의 이름을 읊은 덱스터는 답지 않게 절박한 표정이었다. 그가 버둥거리는 허리를 더욱 강하게 껴안으며 물었다.
“왜 내게서 계속 달아나는 거야?”
쿵쿵. 들려오는 심장 소리가 너무 커 두 귀가 먹어 버릴 것만 같다.
덱스터의 박하 향은 언제나처럼 강하게 훅 끼쳐 왔다. 이리아는 그의 상쾌한 체취를 맡자마자, 더 심하게 버둥거리며 단단한 가슴팍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단순히 마구간에 있던 자신에게서 이상한 냄새가 날 듯해 취한 행동이었지만, 덱스터가 이 사실을 알 리 없었다. 그러잖아도 굳어 있던 그의 얼굴은 급기야 종잇장만큼 창백해졌다.
“대체 왜 이래? 설마 내가 당신한테 너무 성급했던 건가? 그래서 날 피하는 거야?”
“그,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대체 이유가 뭐야?”
이리아는 차마 모습을 보이기 부끄러워서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는 덱스터의 너른 품에 한쪽 뺨이 폭 파묻힐 때까지, 어색하게 입술만 달싹일 뿐이었다.
이리아를 제 가슴팍에 파묻어 버린 덱스터의 두 손에는 다른 때보다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는 이리아가 절대로 도망가지 못하도록, 이미 그녀의 온몸을 단단히 붙잡은 채였다.
이리아의 정수리 바로 위에서 과거의 향수와 슬픔이 흠뻑 섞인 목소리가 울렸다.
“내게 제발 이러지 마, 이리아. 난 이미 당신의 뒷모습은 신물이 나도록 많이 봤단 말이야.”
“……죄송해요.”
이리아는 그녀의 얼굴에 한껏 열이 올랐다는 사실을 곧장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터질 듯 새빨개진 얼굴을 들키지 않기 위해 너른 가슴에 한층 깊이 뺨을 파묻었다.
하지만, 얼굴을 숨기려는 이 가냘픈 몸부림마저도 머지않아 끝나고 말았다.
덱스터가 이리아의 무릎 아래에 팔을 넣어 그녀를 번쩍 들어 올린 것이다.
순식간에 시야가 높아지자, 이리아의 잇새서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녀가 얼굴을 머리칼 사이로 숨길 틈도 없이, 덱스터는 그보다 더 높게 자리한 뽀얀 턱 끝에 입을 맞추었다.
이렇게 안긴 게 결코 처음은 아니었으나, 이리아는 여전히 자신보다 아래에 있는 덱스터가 익숙지 않았다. 눈높이가 올라가니 비센티움인답게 뚜렷한 그의 이목구비가 전보다 훨씬 더 잘 보였다.
체취에 관한 걱정은 덱스터의 얼굴을 보자마자 먼지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이리아는 그의 두 눈동자 속을 아주 긴 시간 홀린 듯 멍하게 응시하다가, 조심스레 운을 뗐다.
“있잖아요, 하워드 공.”
덱스터의 한쪽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섰다.
이리아는 용기를 내 운을 뗐지만, 이내 고개를 양옆으로 내젓고 말았다. 그녀의 두 손에서 어느덧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덱스터의 눈썹이 더더욱 위로 올라갔지만, 이리아는 모른 척할 수밖에 없었다.
사랑한다는 말이 이렇게 어려운 줄 알았다면, 연습이라도 해 둘 걸 그랬나 보다. 그녀는 몹시도 바보 같은 생각을 하며, 새까만 눈썹을 손끝으로 따라 그렸다.
손끝이 관자놀이를 향할수록, 이리아의 엉덩이를 받친 두 팔에 서서히 힘이 들어갔다.
“낮이 짧아졌어요. 비센티움의 여름은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가네요.”
“……영원히 여름이었으면 좋겠어. 미치도록 그러길 바라.”
덱스터의 말투에는 아이 같은 심술이 잔뜩 섞여 있었다. 그의 눈썹을 쓰다듬는 이리아의 손길이 차츰 느려졌다.
‘전 여름이 끝나도 하워드 공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
사랑한다는 말이 첫 번째로 어려운 대목이라면, 떠나지 않을 거라는 말은 두 번째로 어려운 대목이다. 이리아는 목구멍 한가운데 턱 막혀 나오지 않는 대목을 머릿속으로만 되뇌며, 덱스터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대었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