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계속해서 올라오는 흐느낌 때문에 불규칙적으로 헐떡이던 이리아는 덱스터가 입에 술병을 물려 준 후에야 차차 진정했다. 술이 깨 버린 그녀는 또 한 번 취기에 힘입어 피로를 억지로 끌어 올렸다.
몇 번의 쾌락을 느낀 몸은 빠르게 피곤해졌다. 덱스터는 이리아가 두통을 잊고 잠에 빠져들 때까지, 그녀의 등을 가만히 두드려 주었다.
그리고 끝내, 이리아는 덱스터의 목덜미에 코를 박은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그녀는 잠결에도 언뜻 몸에 닿아 오는 손길을 느낄 수 있었지만, 몰려올 두통이 두려워 일부러 눈을 뜨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덱스터에게 미안하여 눈을 뜰 수 없던 것 같기도 하다.
덱스터가 풍기는 박하 향 때문인지, 그의 품 안에서 잠이 든 이리아는 술에 진탕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생생한 꿈을 꿨다.
꿈속의 이리아는 푹신한 이불 위에 대자로 드러누워 있었다. 아스라이 빛나는 호롱불로 보아서는 군부대의 간이침대인 듯했다.
곧이어 그녀의 두 귀에 한 남자의 흐느낌이 들려오고, 가슴께가 눈물로 축축하게 젖어 갔다.
덱스터 하워드.
덱스터가, 이리아의 가슴에 코를 파묻고 서럽게 우는 중이었다.
“너를…… 너를 도저히 끝낼 수가 없어. 네가 없으면 안 돼…….”
투명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덱스터의 눈가는 고통으로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는 이리아의 심장 쪽에 어린아이처럼 뺨을 비비면서도, 끊임없이 사랑을 속삭였다.
덱스터는 지난해 내내 가슴 찢어지는 짝사랑을 견뎌 내야 했다. 그는 광활한 은하수 아래서 눈물을 흘렸었고, 마지막 날 이리아에게 고함을 내지른 후에도 남몰래 흐느꼈었다. 하지만 두 순간 모두, 이리아는 자리에 없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우는 덱스터를 본 적이 없었기에, 기억 속에서 서럽게 흐느끼는 그의 모습은 너무나도 낯설기만 했다. 충혈된 흰자위, 새빨갛게 달아오른 눈가와 흠뻑 젖어 버린 뺨은 덱스터와 절대로 어울리지 않아, 그를 더더욱 애달프게 만들었다.
덱스터는 답지 않게 훌쩍이며 이리아를 제 가슴팍에 파묻었다. 온몸이 땀에 절어 있었음에도, 서로의 피부가 맞닿는 느낌이 좋았던 꿈속의 이리아는 실없이 웃었다.
그녀가 덱스터의 품 안에 더 깊이 파고들며 속삭였다.
“기……기분 좋아. 더, 더 세게 안아 줘…….”
“얼마 지나지 않아 동이 틀 거야, 이리아. 아침이 되면 넌 분명 지금을 기억하지 못하겠지.”
“아, 아니야. 꼭 기억…… 기억해 낼 거야. 조금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꼭 기억해 내, 낼 거야.”
“기억해 내지 마. 어차피 우리는 태양이 떠오르자마자 다시 낯선 사이로 돌아갈 테니.”
“낯선 사이로 돌아가는 건 시, 싫어. 태양이 떠도 너와 하…… 함께 있게 해 줘…….”
“제정신인 네가 들으면 참 후회할 말이군. 정말로 태양이 떠도 나와 함께 있고 싶어?”
절정의 끝을 맺어 이리아는 나른했고, 덱스터의 품 안은 솜이불 속에 파묻힌 듯 안락했다. 마치 갓 태어난 여린 짐승처럼, 한참 몽롱한 눈으로 덱스터를 바라보던 이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정수리 위에서 물기 어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짧게 너털웃음을 흘린 덱스터는 이리아의 둥근 이마 위에 제 입술을 꾹 찍어 눌렀다. 그가 입술을 떼지 않은 채로 이어 속삭였다.
“내게 가장 소중한 반지 하나가 있어. 만일 네가 그 반지를 끼면,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함께할 수 있을 거야.”
“그, 그럼 지금 당장 끼워…… 끼워 줘.”
“지금은 안 돼. 동이 트고, 당신이 제정신으로 돌아온 후에 끼워야 해.”
덱스터는 입술을 떼고, 의아한 빛이 가득한 눈동자 속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는 여전히 취기가 그득한 이리아의 상태를 깨닫자마자, 언제 웃었냐는 듯 재차 눈물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눈물을 쉴 틈 없이 아래로 떨어뜨리는 덱스터의 얼굴이 고통스레 짓이겨졌다. 그의 목소리는 이미 절규에 가까웠다.
“그런데 넌 절대로 끼우지 않을 거야. 반지를 꺼내 든 나를 분명 정신 나간 놈이라고 생각하겠지. 그리고, 지금의 순간은 없었다는 듯 두려운 눈빛으로 날 쳐다볼 거야.”
덱스터가 새빨개진 눈가와 함께 온몸을 애처롭게 떨기 시작하자, 이리아의 두 손이 다급히 그의 얼굴을 더듬었다.
그녀는 덱스터가 대체 왜 눈물을 흘리는지 몰라 한참을 허둥지둥했다. 하지만 이내, 눈물 때문에 달아오른 그의 눈가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그럼 이, 이상한 핑계를 대서라도 끼워 줘. 부탁이야…….”
그러니까 울지 마, 응? 짧지만 다정한 말들이 그 뒤를 이었다.
덱스터가 슬피 웃으며 이리아에게 키스했다. 꿈속에서 막 덱스터와 정을 나누었었다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재차 가슴에 뺨을 문지르는 그의 몸이 몹시도 익숙하게 느껴졌다.
이리아는 꿈을 꾸고 있었음에도, 무언가에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이게 마지막이었어.’
지금껏 줄곧 이런 순간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여신이 말한 ‘마지막’은 덱스터를 받아들일 때 느꼈던 고통이라든가, 힘겨워 기절했던 그 기억이 아니었다.
품속에서 서럽게 흐느끼던 덱스터의 모습이, 방금 나눈 이 짧은 대화가, 여신이 답한 바로 그날 밤의 ‘마지막’이었다.
‘처, 첫날밤 후의 청혼이 내가 먼저 부탁했던 청혼이었다니…….’
금반지가 자리한 엄지손가락이 문득, 칼에 베인 듯 쓰라려 왔다.
모든 걸 쏟아 낸 이다음 날 아침, 하워드 공은 대체 어떤 심정으로 금반지를 끼워 주었던 걸까. 대체 어떤 심정으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던 나를 저택에 데려오고, 빨간 머리의 ‘씨시 힐데어’를 바라보았던 거지?
‘첫날밤을 깡그리 잊어버린 나와 함께 지난 3개월을 대체 어떻게 버텼던 거야……?’
덱스터의 마음을 전부 헤아렸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홀로 기억하던 첫날밤의 진실 속에서, 그는 여전히 고통받는 중이었다.
덱스터와 함께한 3개월은 참 길고 길었다. 하지만 긴 3개월을 보내며 대체 왜 나는 이 순간을 진즉 떠올리지 못했던 건지, 이리아의 관자놀이서 커다란 눈물방울 하나가 또르르 흘러내렸다.
첫날밤의 마지막 순간을 진즉 떠올렸어야 했다. 그랬다면, 그녀는 한 지붕 아래서 사는 내내 덱스터를 오해하지도 않았을 테고, 그를 무서워하지도 않았을 거다.
청혼의 의미를, 덱스터가 지난날 고이 품었던 감정을 빨리 알아차렸을 터다.
이야기는 결국 덱스터 하워드와의 첫날밤에서 시작되어, 첫날밤으로 되돌아왔다. 비록 술에 취해 저지른 실수였으나, 이 하룻밤 사랑 속에 지난날 고민했던 질문들에 관한 모든 해답이 들어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워드 공은 단 한 번도 자신의 사랑을 숨기지 않았었구나.
그저 내가 미련하고, 눈치가 없던 바보였기에 알지 못했던 것일 뿐.
‘아아…….’
날아가는 샛노란 풍등의 향연 아래서, 이리아는 덱스터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면 신경이 쓰일 것 같다고 말했었다. 덱스터는 이리아가 갑자기 사라지면 더 이상 이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다고 대답했었다. 그리고, 그가 가진 감정이 사랑이라고 덧붙였었다.
이리아는 이제야 덱스터의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덱스터가 없이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게 되었으니까.
덱스터가 가진 기억, 지난 세월 품어 온 사랑은 또 한 번 해일처럼 몰려야 이리아를 덮쳤다. 이리아 아델리어는 해일과 함께 깊은 감정의 심연 속에 풍덩 빠져 다시는, 다시는 위로 헤엄쳐 올라올 수 없을 것이다.
심연 속에서도 꽃을 피워 내는 심장.
모든 게 변해 버린 기분.
세상이 뒤집혀 버리는 느낌.
‘다섯 뿔의 여신이시여. 제게 준 답이 이것이었나요…….’
다시는 하워드 공을 고통스럽게 하고 싶지 않다. 이리아는 덱스터 하워드의 젖은 얼굴이 문득 참 사랑스럽다고 느껴지며, 이 남자를 평생토록 지켜 주고 싶어졌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절절한 꿈의 종지부를 찍은 건, 덱스터의 물기 어린 세 마디였다.
“사랑해, 이리아. 영원히.”
지난날 덱스터의 마음을 깨닫는 데도, 그와의 첫날밤을 기억하는 데도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려 버렸다.
희미하기만 했던 지난 기억의 흔적들을 돌고 돌아, 대마법사 이리아 아델리어는 마침내 잃어버렸던 첫날밤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첫날밤과 함께, 마침내 그 순간이 왔다.
사랑.
사랑의 순간이.
***
꿈에 빠져 뒤척였던 이리아가 잠에서 온전히 깨어났을 때는 이미 늦은 아침이었다.
비록 얼굴은 눈물로 젖고 퉁퉁 부어 있었지만, 덱스터가 새벽에 닦아 준 건지 땀에 절었던 온몸이 깨끗했다. 심지어, 도중에 벗어 버렸던 슬립까지도 고스란히 다시 입혀져 있었다.
익숙지 않은 신음성을 많이 흘렸기 때문인지, 일어나자마자 성대가 찌르르 아팠다. 이리아는 헛기침을 몇 번 하며 머릿속으로 덱스터와의 전날 밤을 하나하나 되짚어 갔다.
끝까지 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전날 밤을 떠올리니 다리 사이가 조금 아릿한 느낌이 들며, 숙취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이리아가 끙끙대며 깨질 듯한 머리통을 감싸고 있을 때, 문가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숙취가 심하구나.”
“아…….”
대체 언제부터였는지, 덱스터가 문가에 기대 삐딱하게 서 있었다.
덱스터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꿈을 끝냈던 그의 마지막 세 마디가 이리아의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메아리쳤다.
“사랑해, 이리아. 영원히.”
눈물을 흘렸던 꿈속 덱스터와 모습이 겹쳐 보이며, 이리아의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숙취 때문은 아니었다. 심장이 터질 듯 뛰고, 비둘기를 토해 낼 것만 같은 이 느낌은 겨우 술 따위가 절대로 만들어 낼 수 없었으니까.
쿵쿵. 거대한 심장 박동이 이리아의 온 귓가를 메우기 시작했다.
어젯밤 흐트러졌던 모습은 전부 거짓이었다는 듯 덱스터의 자태는 완벽했다. 막 잠에서 깨 머리도, 얼굴도 엉망인 이리아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안 돼. 왜, 왜 하필 지금…….’
자신의 행색이 너무나도 추레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리아의 얼굴이 찰나에 확 붉어졌다.
이미 땀에 전 알몸을 두 번이나 보인 데다가, 전쟁터에서는 이보다 더 엉망이었던 적도 많았다. 하지만 마음을 깨닫고 나니, 이리아는 사소한 외모까지도 신경 쓰게 되었다.
생전 처음 느껴 보는 종류의 창피함에, 그녀가 허둥지둥 머리를 다듬었다.
“숙취가 오래가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덱스터가 가까이 다가오자, 몸이 제멋대로 긴장했다.
덱스터는 이리아가 전날 밤을 기억한다는 사실을 금세 알아챘다. 그는 입가를 가리며 나직이 웃다가, 이리아의 정수리에 살짝 키스했다. 그리고, 바싹 바른 입술에 꿀물이 든 유리잔을 대 주었다.
이리아는 침대맡에 앉은 덱스터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꿀물을 잘 받아 마셨다. 하녀들은 오지 않는 건지, 문가를 힐끔거리던 그녀가 갑자기 소심하게 고개를 수그렸다.
열이 올라 새빨갛게 변한 손끝이 이불자락을 꼭 움켜쥐었다.
입술을 여러 번 달싹이던 이리아는, 이내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젯밤엔 미안해요. 그, 그냥 갑자기 여러모로 생각이 많아져서…….”
“괜찮아.”
그럴 리가. 절대로 괜찮을 리가 없는데.
이리아가 새빨간 머리칼 사이로 살짝 덱스터를 올려다보았다. 놀랍게도, 그는 진실로 괜찮은지 웃으며 다가와 뽀얀 볼 위에 키스해 주었다.
“내게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돼, 이리아.”
이리아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인 덱스터는 이어 관자놀이에 몇 차례 가벼운 입맞춤을 남긴 후, 하녀들을 부르겠다며 자리서 일어났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 그의 옷자락을 이리아가 덥석 잡았다.
이미 열이 올라 있던 이리아의 얼굴은 더욱 터질 듯 붉어졌다. 그녀는 먼저 덱스터의 옷을 잡고도 한동안 어찌할 줄 모르다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 하, 하워드 공.”
“음?”
“그럼 어젯밤에는 어떻게…….”
덱스터는 이리아를 가만 내려다보다가, 조용히 제 왼손을 들어 보였다.
말 한마디 없는 명쾌한 설명이었다.
그의 손을 보자마자, 이리아는 또 한 번 고개를 푹 수그릴 수밖에 없었다. 비록 덱스터는 괜찮다고 했지만, 그녀는 재차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