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화 (85/109)

84화

덱스터 하워드가 주는 모든 느낌이 좋다. 그의 부드러운 눈빛, 낮은 목소리, 커다란 손이 주는 온기와 안도감까지. 모두가 아득할 정도로 황홀하다.

이리아는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며 눈을 감았다. 그녀의 두 눈꺼풀이 감기자마자, 둘의 입술이 또 한 번 만났다.

덱스터의 뜨거운 살덩이는 입 안의 모든 곳을 한 번씩 훑고 지나갔다. 서로의 타액이 섞이는 소리가 이리아를 어지럽게 만들 때 즈음, 덱스터는 그녀의 어깨와 겨드랑이 아래를 조금 우악스레 어루만지는 중이었다.

서로의 입술이 떨어지며, 가느다란 실이 길게 늘어졌다. 덱스터는 그의 타액으로 젖어 반짝거리는 이리아의 입술을 진득하게 핥아 올렸다.

잃어버렸던 첫날밤은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의 파편이 되어 되돌아왔다. 하지만 언제나, 가장 중요한 마지막은 떠오르지 않았다.

덱스터의 손길과 목소리는 기억났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이 떠오르지 않으니, 이리아는 자신의 첫날밤이 여전히 까맣고 아득하게 느껴졌다.

덱스터 하워드는 더 이상 그녀가 두려워하던 과거의 남자가 아니다. 하지만 아직도, 그녀의 첫날밤에 사는 남자는 ‘그’ 무섭고도 알 수 없는 비센티움 군단장이었다.

‘……사랑.’

덱스터는 이리아가 가진 감정이 사랑이라고 대답해 주었지만, 사실 이리아는 그게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덱스터가 가진 감정의 무게와 자신이 가진 감정의 무게는, 여전히 확연하게 달랐으니까.

지난날 루퀼렘의 성에 갇혀 무수한 기도를 했음에도, 다섯 뿔의 여신은 단 한 번도 이리아에게 답을 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리아는 풍등을 날리며, 덱스터를 사랑하게 해 달라는 소원을 여신을 향해 마지막으로 빌어 보았다.

덱스터와 함께 풍등을 날렸던 게 정말로 효과가 있었던 걸까? 여신은 지난 세월 내내 무심할 정도로 조용했다. 그런데 이리아는 왜인지, 방금 그녀로부터 난생처음 답을 받은 느낌이었다.

바로 지금이라고.

바로 지금, ‘그날’ 밤의 마지막을 알게 되면 너는 분명 덱스터 하워드를 사랑하게 될 거라고.

‘하워드 공…….’

이리아는 자신을 바라보는 덱스터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도 깊게 느껴졌다. 그녀는 덱스터의 짙은 눈그늘을 손끝으로 쓸다가, 다시 서로의 입술을 겹쳤다.

이제, 비밀에 휩싸였던 첫날밤의 마지막을 알 때가 되었다.

여신으로부터 난생처음 받은 답을, 이리아는 한 번 믿어 볼 생각이었다.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가 놓은 덱스터는 이리아의 뽀얀 목덜미를 따라 내려가며 붉은 자국을 새겨 넣었다. 이리아는 엉덩이 아래서 점점 딱딱해지는 그의 남성을 느끼며, 덫에 잡힌 짐승처럼 온몸을 애처롭게 떨었다.

이리아의 하얗고 긴 손가락이 검은 머리카락 사이사이를 파고들었다. 왜인지 지금과 비슷한 경험을 한 번 겪은 적이 있는 기분이 들자. 그녀는 힘겹게 숨을 들이쉬며 입을 열었다.

“제가…… 제가 어, 언제 이렇게 아…… 앉았던 적이 있었던가요……?”

“응. 부대에서의 마지막 날 밤에.”

아아, 맞아. 그랬었지. 이리아의 잇새서 짧은 대답이 한숨과 함께 새어 나왔다.

어느샌가 다시 위로 올라온 덱스터가 위스키 한 방울이 아롱아롱 매달려 있는 이리아의 턱 끝에 입을 맞추었다.

그는 몰려온 열감으로 인해 초점이 풀려 버린 녹빛 눈동자를 지그시 들여다보면서, 이리아의 자그마한 손을 제 가슴 위에 올렸다.

“당신은 지금처럼 내 위에 앉아서,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었었지.”

“어, 어어…….”

“혹시 그때를 다시 떠올리고 싶어?”

질문을 하는 덱스터의 새까만 눈동자 속에서는 뜨거운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이리아는 그 어느 때보다 더욱 강렬한 시선을 느끼며,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기다리던 질문이었다.

이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덱스터의 입술이 길게 늘어졌다. 그는 양 볼의 보조개가 다 드러날 정도로 짙게 미소 짓고선 이리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렇다면, 내가 당신을 도와줄게.”

덱스터가 그의 허벅지 위에서 계속해서 무너지려는 이리아의 상체를 똑바로 세웠다. 그리고, 마치 똑바로 보란 듯 그의 셔츠 단추를 위에서부터 천천히,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셔츠 단추가 하나씩 풀릴수록, 이리아의 호흡도 더더욱 가빠졌다. 이제는 호흡이 가쁜 이유가 취기 때문인지, 이 미칠 듯이 농염한 분위기 때문인지, 아니면 덱스터 때문인지도 알 수가 없다.

아니, 어쩌면 셋 모두 때문일지도.

덱스터는 단추가 다 풀린 그의 셔츠를 온전히 벗어 버렸다. 너무나도 완벽한 남자의 몸이 바로 눈 앞에 펼쳐지자, 아랫배는 물론 이리아의 고운 발끝까지도 절로 저릿해졌다.

덱스터가 가쁜 호흡을 내쉬는 이리아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는 이어 그녀의 새빨간 머리를 귀 뒤로 넘겨 주고서, 가녀린 두 팔을 제 목에 감아 버렸다.

덱스터의 목을 껴안은 이리아의 상체가 그의 맨가슴과 맞닿았다. 몸의 예민한 부분이 단단한 근육에 짓눌리자, 살짝 열린 입술 사이서 가녀린 신음성이 새어 나왔다.

이리아의 신음을 모두 들은 덱스터는 나직이 웃다가, 그녀의 새빨간 머리카락 사이로 열 손가락을 모두 밀어 넣었다.

그는 이리아의 뒤통수를 단단히 잡은 채로, 뽀얀 볼에 입술을 갖다 대며 속삭였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아 깊은 입맞춤을 나누었었어.”

그리고 대답을 할 틈도 없이, 이리아는 곧바로 덱스터에게 재차 집어 삼켜졌다.

덱스터의 목덜미를 감은 두 팔이 파르르 떨렸다. 이리아는 두 눈을 있는 힘껏 감은 채, 좁은 잇새를 밀고 들어오는 혀를 다시 맞아들였다.

한없이 뜨거운 덱스터의 혀는 이미 술과 타액으로 질척해진 입 안을 더욱 흥건하게 만들었다.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이리아는 참고 있던 숨결을 토해 냈다. 그녀가 가슴께를 헐떡이며 숨을 고를 동안, 덱스터는 분홍빛으로 곱게 달아오른 두 뺨 위에 자잘한 키스를 퍼부었다.

그가 한껏 부어오른 이리아의 아랫입술을 매만지고선, 그녀의 귓가에 나른하게 속삭였다.

“입맞춤이 끝난 이후, 난 당신의 옷을 천천히 벗기기 시작했지.”

이번에도, 덱스터는 이리아에게 대답할 틈 따위 주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이리아가 입고 있는 슬립 뒤쪽의 매듭 끈을 잡아당겼다. 얇디얇은 슬립이 어깨선을 따라 흘러내리며,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성의 상체가 드러났다.

이리아는 커다랗고 굳은살 가득한 손이 뽀얀 가슴을 어루만지자, 아랫배가 조여 와 터질 것만 같았다. 차마 끓어오르는 열기를 버티지 못해, 그녀의 두 눈에서부터 뜨거운 눈물이 새어 나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덱스터는 머리카락을 파고들어 오는 열 손가락을 느끼며, 언뜻 보이는 이리아의 힘찬 심장 박동 위에 입을 맞추었다.

그가 입술을 떼지 않은 채로 나직이 질문했다.

“기분이 어때? 계속해도 될 것 같아?”

온몸을 파르르 떠는 이리아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정염으로 뜨겁게 달아오른 머릿속이 너무나도 버겁고 어지러웠다.

애처롭게 아랫입술을 깨문 이리아가 도와달라는 뜻을 담아 덱스터를 내려다보았다. 덱스터는 탐욕이 번들거리는 새까만 눈동자로 눈물 젖은 뺨을 응시하다가, 나직이 속삭였다.

“당신은 그날, ‘기분 좋아’라고 대답했었어.”

이리아의 열 손가락이 덱스터의 머리카락을 더더욱 깊게 파고들었다. 계속해서 뜨거운 눈물을 떨어뜨리며 덱스터의 눈동자 속을 들여다보던 이리아는, 이어 그를 따라 천천히 대답했다.

“기, 기분 좋아…….”

덱스터가 잘했다는 듯, 불그스름한 이리아의 뺨 위로 여러 번 입맞춤을 선사해 주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이리아의 시야도 점점 위로 올라갔다. 덱스터는 그녀의 골반을 아슬아슬하게 가리고 있던 슬립을 완전히 벗겨 버린 후, 새하얀 두 다리를 제 허리에 감았다.

곧이어, 이리아의 등 뒤로 보드라운 이불이 닿아 왔다. 그녀의 새빨간 머리카락이 이불의 주름을 따라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덱스터가 아랫배에 입을 맞추자, 젖어 번들거리는 이리아의 입술은 절로 앓는 소리를 뱉어 냈다.

“으, 흐으…….”

붉게 변한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듯했다. 두 눈을 곱게 감은 이리아는 계속해서 꽉 막히는 숨통을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힘들었기에, 아랫배에 입을 맞추던 덱스터가 양 발목을 그의 어깨 위로 올렸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일순간 이리아의 눈이 번쩍 뜨였다.

아. 외마디의 탄식과 함께, 그녀의 허리가 곱게 휘었다.

양손이 절로 이불을 휘어잡고, 하늘을 향한 발끝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아득한 곳으로 끊임없이 올라가는 느낌이 들며, 그녀 자신조차도 알아들을 수 없는 신음성이 마구 터져 나왔다. 어느덧 완전히 열려 버린 눈물샘에서부터는 쾌락과 흥분이 섞인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리아의 고운 발끝이 쫙 펴졌다. 덱스터가 파묻었던 고개를 들어 올렸을 즈음, 그녀는 아름답게 만신창이가 된 채로 여운에 빠져 희미하게 온몸을 떨고 있었다.

단단하고 커다란 손이 이리아 자신조차 알지 못하는 몸의 구석구석을 헤집을 동안, 이리아의 발끝은 몇 번이고 펴지고 오그라들고를 반복했다.

절정의 여운이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새롭게 찾아오는 쾌감은 황홀하고도 고통스러웠다.

아, ‘그날’ 밤에도 우리는 이랬었지. 덱스터가 안을 헤집어 놓을수록, 이리아는 점점 더 선명하게 그와의 첫날 밤을 떠올릴 수 있었다.

벨트가 풀어지는 소리도, 바지가 내려가는 소리까지도 참 익숙해졌다.

덱스터와는 이미 밤을 함께 보냈었다. 그 감각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리아는 열감이 느껴지자마자 사지를 굳혔다.

아.

‘안 돼.’

고운 분홍빛으로 달아올랐던 얼굴이 곧장 차갑게 식어 가기 시작했다. 힘없이 풀려 있던 두 다리에 이상하리만큼 강한 힘이 들어가자,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덱스터가 재빨리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리아?”

그와 눈이 마주치자, 이리아의 고운 얼굴이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문득, 술에 진탕 취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더 나가면 안 된다는 생각이 이리아의 뇌리를 지배했다.

아직 루 아휜은 루퀼렘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그렇기에 덱스터와의 결혼 또한 온전히 확정된 게 아니다.

첫 번째는 실수지만, 두 번째는 실수일 수 없었다. 이 남자와 결혼을 할 수 있을지도 정확히 모르는데, 쾌락에 몸을 떠는 그녀 자신이 순간 너무 부끄러워졌다.

설상가상으로 첫날밤의 기억이 하나둘씩 떠오르며,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까지도 온전히 이리아의 머릿속으로 되돌아왔다.

덱스터를 몸속에 받아들였을 때, 너무나도 아팠던 ‘그’ 순간까지도.

설마 ‘마지막’을 알아내라는 여신의 대답은 나의 착각이었던가. 고통을 떠올리는 이리아의 몸에 긴장감이 맴돌며, 손발이 제멋대로 서늘해졌다.

“아…….”

쾌락과 흥분, 긴장과 두려움이 한데 섞여 이리아의 가슴 안쪽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들끓는 감정들을 차마 온전히 감당할 수가 없어, 이리아의 보드라운 눈가는 곧바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리아는 땀으로 젖은 이불 위에 드러누워 서럽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쾌락에 허덕이던 여인이 갑자기 심상치 않게 변하자, 덱스터가 황급히 그녀를 이불로 감싸 껴안았다.

“쉬이-. 진정해, 이리아.”

“모…… 못 하, 하겠어요. 아직 아…… 안 돼.”

“알겠어. 더 안 할게. 진정하고 천천히 숨 쉬자, 응?”

차마 해소되지 못한 흥분감과 취기가 어지럽게 뒤섞이며, 이리아의 머리가 깨질 듯 아파졌다. 그녀는 자그마한 몸을 힘껏 안아 주는 두 팔을 느꼈으면서도, 머리가 아파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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