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화 (84/109)

83화

쿵쿵. 웅장한 심장 박동이 이리아의 양 귓가를 가득 메웠다. 이리아는 덱스터가 뜨겁게 열이 오른 목덜미를 쓰다듬어 주는 대로 가만히 그의 손길을 느끼고 있다가, 차차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녀는 시야 가득히 덱스터의 잘생긴 얼굴이 들어오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의 얼굴은 꼴이 말이 아니었다.

루 아휜이 때린 관자놀이에는 시퍼런 피멍이 들어 있었다. 왼쪽 눈동자까지 심각하게 충혈된 걸 보면 여간 세게 때린 게 아니었다.

이리아는 마치 가면을 쓴 것처럼, 덱스터의 얼굴 한쪽이 시퍼렇게 변해 버렸다는 사실을 쉽사리 믿지 못하는 듯했다. 그녀가 멍 자국을 손끝으로 더듬으며 한껏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 얼굴이 왜 그래요? 어…… 어디에 부딪힌 건가요?”

“아니. 루 아휜에게 맞았어.”

“설마 기어코 둘이서 주먹다짐을 한 건……!”

“그런 거 아니야, 이리아. 당신과 함부로 약혼을 한 대가로 내가 불만 없이 맞겠다고 했어.”

하지만, 이리아의 일그러진 표정은 쉽사리 풀리지 않았다. 그녀는 덱스터가 자잘한 입맞춤을 해 줄 때까지 조그마한 미간을 양껏 찌푸리고 있었다.

덱스터는 키스가 고팠는지, 여느 때보다 서둘러 이리아의 양 뺨을 감싸 쥐었다. 그러나 그가 비스듬히 고개를 숙이는 순간, 이리아가 그의 입술 위에 살짝 손을 올렸다.

“이 멍 때문에 온종일 얼굴을 안 보이셨던 거예요?”

“그럴 리가. 어젯밤 행사의 뒷정리로 도심에 나가야 할 일이 있었어.”

“사람들이 공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겠어요.”

“군인의 얼굴 상처를 보고 놀라는 이는 많지 않아, 이리아.”

덱스터는 입술 대신, 그의 앞을 막아선 이리아의 손바닥 위에 짧은 키스를 남겼다. 자그마한 손바닥 너머로 보이는 검은 눈동자가 무척 관능적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지금의 이리아에겐 전혀 관심 밖이었다. 이리아는 덱스터의 관자놀이에 자리를 잡은 짙은 푸른 멍이 너무나도 속상하기만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루 아휜이 만들어 낸 상처라고 하니, 그녀는 더더욱 속상해졌다.

‘이렇게 세게 때릴 건 없었잖아, 루…….’

루퀼렘의 군주로서 그 대신 사과의 말을 전해야 하는 걸까. 덱스터의 품 안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이리아는 그의 충혈된 왼쪽 눈자위를 들여다보며 속삭였다.

“많이 아파요?”

“아니, 이 정도는 하나도 안 아프…….”

덱스터의 말끝이 서서히 흐려졌다.

아아. 덱스터가 고개를 치켜들며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새까만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한껏 아픈 척을 하다가, 이리아의 뺨을 다시 그의 가슴팍에 폭 파묻었다.

덱스터의 잇새서 어울리지 않는 칭얼거림이 터져 나왔다.

“맞아. 아파서 왼쪽 눈이 빠져 버릴 것만 같아, 이리아. 이른 아침에 맞았는데도, 여전히 머리 안쪽이 욱신거려.”

“어…… 어떡하죠? 지금이라도 의사를 불러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의사의 치료는 필요 없어.”

의사의 치료가 필요 없다니? 이리아가 흐트러진 머리칼 사이로 덱스터를 빤히 올려다보자, 그가 보조개를 보이며 씩 미소지었다.

“당신이 키스 한 번만 해 주면, 씻은 듯이 나을 듯해.”

“……점점 능청스러워지시는 것이, 공께서 날이 갈수록 부단장님과 비슷해지는 것 같아요.”

“콘라드와 나를 비교하면 안 되지. 그놈은 막을 수가 없는 난봉꾼이라고.”

이리아가 꿈틀꿈틀 품에서 빠져나와, 덱스터의 입술 위에 제 입술을 꾹 찍어 눌렀다. 덱스터는 서로의 입술이 맞닿은 내내 가만히 있다가, 그녀가 아랫입술을 살짝궁 깨물자마자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그는 곱게 달아오른 이리아의 뺨 위로 자잘한 키스를 퍼부은 후, 그녀를 재차 가슴팍에 파묻으며 속삭였다.

“사랑스러운 나의 이리아…….”

속삭임을 들은 이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켜고선, 갓 태어난 짐승처럼 애타게 그의 품 안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온몸을 감싼 따스한 온기도, 조용한 숨소리도, 목덜미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도 전부 다 좋다. 제 조그마한 몸뚱이를 온전히 덱스터에게 맡겨 버린 이리아는 한참 두 뺨을 곱게 붉히고 있다가,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덱스터의 턱 끝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쪽. 입술과 피부가 붙었다가 떨어지는 귀여운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덱스터는 대체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쉽사리 파악하지 못했다. 그는 머리 안쪽이 고장 나 버린 듯 잠시 삐걱거리다가, 뒤늦게 상황을 깨닫고 이리아를 확 끌어안았다.

아이처럼 서로의 뺨을 비비는 덱스터의 잇새서 기분 좋은 웃음보가 새어 나왔다. 그는 지독하게 취해 버린 취객처럼 횡설수설 사랑한다고 속삭이고선, 이리아의 뽀얀 관자놀이와 뺨에 수십 번 입술을 찍어 눌렀다.

그의 키스 세례는 이리아가 또다시 손바닥을 들어 올린 후에야 끝이 났다. 잘 익은 토마토처럼 온몸이 새빨개진 이리아는 덱스터의 입술을 막고서도 한참 숨을 골라야 했다.

이 남자는 뽀뽀 한 번에 이성을 잃어버리는구나. 이리아는 덱스터가 참 상대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며, 그의 품을 슬쩍 빠져나왔다.

얼굴을 식히기 위해 이리아가 대부인의 침실을 돌아보는 찰나, 그녀의 시야에 익숙한 술병들이 들어왔다.

일전에 루와 덱스터가 체스를 두었을 때, 홀로 마셨던 싱글 몰트 위스키(*single malt whisky: 보리를 원료로 하여 한 곳의 증류소에서 만든 위스키, 고급 양주에 속함)였다. 이리아는 그녀가 즐겨 먹는 피스타치오와 아몬드까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게 웬 술이에요?”

“지난번에는 루 아휜이 끼어든 바람에 당신의 주량을 확인하지 못했잖아. 이제 더는 미룰 수 없을 듯해서.”

“아아…….”

이리아는 덱스터가 꺼내 준 의자 위로 궁둥이를 슬쩍 붙였다. 덱스터는 그녀의 새빨간 정수리 위에 마지막으로 짧은 입맞춤을 한 다음, 조용히 옆자리에 앉았다.

위스키는 럼주, 혹은 맥주와 완전히 다른 차원이 술이다. 루와 덱스터가 체스를 두었던 그날 밤, 40도가 훌쩍 넘는 술을 혼자서 벌컥벌컥 들이켰었으니 이리아가 기억을 새까맣게 잊어버린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덱스터는 앞으로 다시는 위스키를 병째로 들이킬 생각 말라며 술을 따른 유리잔에 물을 잔뜩 채워 넣었다. 그가 첫 잔을 이리아에게 넘기며 말했다.

“빨리 마시면 금방 취해. 아무리 도수가 낮은 술이라도, 물과 함께 천천히 마시는 게 좋아.”

“하지만 습관적으로 빨리 마시게 되는걸요.”

“그러니 그 습관을 고쳐야지. 군인들도 당신처럼 술을 빠르게 마시지는 않아.”

콘라드 메이필드는 제자리서 순식간에 럼주 두 병을 해치우던데. 이리아는 괜히 덱스터에게 따져 묻고 싶은 충동을 꾹꾹 억누르고선, 알코올 냄새를 풍기기 시작한 위스키를 소심하게 홀짝였다.

덱스터가 여전히 빨간 이리아의 볼을 손등으로 살살 쓸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그는, 이내 바지 주머니를 뒤져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조그마한 은화였다.

“그럼 이렇게 할까, 이리아? 돌아가면서 동전을 던져서 앞면이 나오면 술잔을 기울이고, 뒷면이 나오면…….”

“……‘뒷면이 나오면’?”

“이걸 하는 거야.”

덱스터가 천천히 허리를 숙여 이리아의 입술 위에 짧은 키스를 남겼다.

위스키가 묻은 입술 위로 시원한 박하 향이 남았다. 겨우 술을 한 모음 마셨는데 벌써 취해 버린 기분이 들며, 이리아는 자기도 모르는 새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덱스터는 군대 선임들에게서 배운 꼼수를 참 잘 이용했다. 자신이 던질 때는 앞면이 잘만 나오는데, 덱스터가 던질 때는 앞면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으니 이리아는 잠시 그의 손장난을 의심했지만, 애써 아니라고 믿었다.

술잔이 계속해서 기울어지고, 키스의 횟수는 어느덧 열 번을 넘어갔다. 시간이 지나며 동전 던지기의 의미도 사라져, 덱스터와 이리아는 동전의 뒷면이 나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입술을 맞대고 있었다.

덱스터는 분명 유리잔에 물을 잔뜩 타 주었다. 하지만 술의 도수가 꽤 높다 보니, 술고래가 아닌 이리아는 몇 잔 마시지 않아 금세 취했다.

그녀는 덱스터에게 제 아랫입술을 온전히 내어 준 채로 커다란 눈을 바보처럼 끔뻑였다. 덱스터는 잔뜩 부어오른 이리아의 입술을 장난스레 깨물고선, 그녀를 번쩍 들어 자신의 허벅지 위에 앉혔다.

덱스터가 다시 수줍은 키스를 시작한 통에, 이리아는 비명을 지를 틈조차 가지지 못했다.

그는 아기 새가 모이를 쪼듯 한참 이리아의 입술을 자잘하게 찍어 누르다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살며시 넘겨 주었다.

“귀가 빨개. 벌써 취했구나, 내 사랑.”

“아, 아직 안 취했어요…….”

이리아가 칭얼거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정확한 발음을 보아선 아직 완전히 취기에 휩싸인 건 아닌 듯했다.

덱스터는 감미로운 웃음을 흘리며 이리아의 작은 뒤통수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가 서로의 이마를 맞대고선 나직이 속삭였다.

“그래도 그만 잘까?”

“시…… 싫어. 더 하, 하고 싶어요.”

“역시나, 술이 들어가면 당신은 말릴 수 없는 욕심쟁이가 되는군.”

기름이 전부 바닥난 호롱불은 가늘게 떨며 흔들리다가, 이내 완전히 꺼지고 말았다. 가장 밝았던 호롱불이 사라지고 향초의 불빛만이 남으니, 덱스터와 이리아의 얼굴 위로 샛노란 파도가 울렁이기 시작했다.

마치 어젯밤의 ‘그’ 순간이 다시금 돌아온 것 같다.

덱스터는 그와 눈높이가 같아진 이리아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가녀린 허리를 끌어안으며 물었다.

“어젯밤 마차에서의 일은 기억나, 이리아?”

“기, 기억나요.”

“내가 당신 다리 안쪽을 어루만졌을 때 기분이 어땠어?”

“어……. 기분 조, 좋았어요…….”

기분 좋았다는 대답에, 덱스터의 양 볼 위로 깊은 보조개가 졌다.

그는 허리를 껴안고 있던 손 하나를 내려 이리아의 치마폭을 깊이 파고들었다. 전날 밤 손이 닿았던 부분에 똑같이 익숙한 온기가 다다르자, 이리아는 척추를 타고 흘러내리는 짜릿한 전율을 느낄 수 있었다.

“하, 하워드 공…….”

그녀가 파르르 떨리는 손끝으로 움푹 들어간 덱스터의 보조개를 매만졌다. 이어 흘러나온 목소리에는 물기가 그득했다.

“덱스터 하워드…….”

“음?”

“고, 공이랑…… 너랑 하, 함께 있을 때마다 심장이 너무 크게 두……두근거려요. 이건, 이건 사랑이에요?”

덱스터는 아무 말 없이 잘게 요동치는 이리아의 녹빛 눈동자를 응시했다. 덱스터가 대답을 주지 않자, 이리아는 그의 멍 자국을 초조하게 따라 그리다가 냅다 목덜미를 꼭 껴안았다.

그녀가 서로의 뺨을 애타게 문지르며 아이처럼 칭얼거렸다.

“부탁이니까 그냥 사, 사랑이라고 해 주세요. 당신이 너무 좋단 말이야…….”

덱스터의 잇새서 가녀린 숨결이 새어 나왔다. 일그러진 그의 얼굴에는 혼란과 슬픔, 그와 더불어 기쁨과 환희가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다.

하지만 덱스터의 생각이 뭐든, 그의 생각 따위 지금은 아무 쓸모 없었다. 덱스터는 이리아의 부탁을 거절할 힘이 없었고,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부터 두 눈꺼풀을 감고 있던 그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사랑이야, 이리아.”

대답을 듣자마자, 이리아는 서로의 뺨을 맞붙인 그대로 배시시 웃었다. 그녀가 조금 전에 그랬던 대로 턱 끝에 쪽 소리가 나도록 키스를 남기자, 덱스터가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끝은 결국 끊어지고 말았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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