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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화 (83/109)

82화

이러다가는 이 입술이 남아나지를 않겠구나. 이리아는 퉁퉁 붓고 메말라 버린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날이 점점 더워지기 때문인지, 하루가 지날수록 그녀는 아침잠이 없어졌다. 하녀들이 들어오기도 전에 일어나는 빈도수가 서서히 많아지는 중이었다.

여름이 되니 몸을 씻을 때 사용하는 향유도 바뀌었다. 이전까지는 자몽과 재스민, 그리고 로즈우드 향유를 섞어 물에 풀었었는데, 지금은 레몬과 라벤더, 유칼립투스를 섞는다.

몸을 깔끔하게 씻은 이리아는 언제나처럼 커다란 거울 앞에 앉아 하녀들의 시중을 받았다.

물에 젖은 새빨간 곱슬머리를 가지런히 빗어 내리고, 온몸에 녹말로 만든 파우더를 바른다. 날씨에 걸맞게 얇고 짧은 치마까지 입으면, 저택에서 하루를 보낼 준비는 끝이었다.

사용인들의 시선과 더불어 덱스터의 저택도 꽤 익숙해졌는지, 이전까지는 정원에서 내내 죽치고 있던 루퀼렘의 성기사들이 저택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리아는 널따란 복도를 지나가는 성기사들과 슬그머니 눈인사를 나누었다.

성기사들이 실내도 들어와도, 루 아휜만은 언제나 정원 한가운데서 이리아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줄곧 비센티움의 정복을 고집하던 그는 오랜만에 루퀼렘 옷을 입고 있었는데, 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루퀼렘인답게 비센티움 정복보다는 루퀼렘의 옷이 더 잘 어울렸다.

이리아의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건지, 루 아휜은 그녀에게 등을 보인 채로 여름꽃이 만발한 정원을 구경하고 있었다.

두 개의 달이 만들어 낸 루퀼렘의 영원한 새벽보다는 ‘진짜’ 하늘이 루에게 걸맞다고 생각하며, 이리아가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좋은 아침이야, 루.]

[……아가씨.]

루가 그녀를 돌아보며, 주먹을 은근슬쩍 등 뒤로 숨겼다. 얼굴은 한없이 평안했으나, 덱스터의 관자놀이를 때린 그의 오른쪽 주먹은 새빨갛게 멍이 든 채였다.

[어젯밤에는 재미있으셨나요?]

[으……응. 그런데 너는 왜 갑자기 저택으로 돌아왔던 거야?]

[너무 피곤했었어요. 피곤했던 데다가, 비센티움 도심은 제게 낯설어서 돌아다니기 조금 힘들더라고요.]

루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이리아는 루의 미소 속에 희미한 슬픔이 스며들어 있다는 사실을 금세 알아챘지만, 그에게 실례가 될까 봐 캐묻지 않았다.

[루 너도 운하 위에서 일제히 날아오르는 풍등을 보았어야 했는데. 정말, 일평생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었거든.]

[태조의 탄생일에 풍등을 날려 보내는 풍습은 매우 오래되었어요, 아가씨. 저는 아주 예전에 이미 한 번 보았으니 두 번은 보지 않아도 됩니다.]

[하, 하지만 그래도……. 너도 함께 보았다면 좋았을 텐데…….]

[아름다움의 경험은 한 번으로도 충분해요.]

루가 이리아의 새빨간 정수리를 쓰다듬으며 잔잔히 고개를 가로 내저었다.

괜히 하워드 공과 단둘이 남겨 두었다며 짜증을 낼 줄만 알았는데. 이리아는 그녀의 예상과 전혀 다른 루의 모습에 당황한 낌새를 숨길 수가 없었다.

비센티움의 새파란 아침 하늘 아래 선 루는 평소와 조금 달라 보였다. 그의 허리는 꼿꼿했으나 확실히 기운이 없었고, 얼굴은 변함없이 아름다우나 침침하게 가라앉아 고독한 빛을 냈다.

이리아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 루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가 커다란 녹빛 눈동자를 치켜뜨며 조심스레 물었다.

[루…….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아프다니요, 절대로 아니에요.]

루가 어깨를 들썩이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정수리를 매만지던 그의 손은 어느덧 이리아의 둥근 뺨을 쓰다듬는 중이었다.

비록 얼굴에 고독의 빛이 가득할지라도, 루가 가진 루퀼렘인 특유의 황금빛 눈동자는 여느 때보다도 훨씬 깊었다.

한없이 애틋한 눈을 한 그는 다 자라 버린 이리아의 이목구비를 하나씩, 천천히 기억 속에 담아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는데 저도 이젠 정말로 늙었나 봐요, 아가씨. 나이 이백이 지나니 이유도 없이 과거를 자꾸만 회상하게 되네요.]

참 주책맞게도 말이죠, 루가 웃으며 덧붙였다.

그는 말을 끝내자마자 이리아의 뺨에서부터 손을 거두었다. 얼굴을 매만지던 따스한 온기가 차차 멀어지는 느낌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기에, 이리아는 루의 손끝이 쓸고 간 곳을 한참 어색하게 만지작거렸다.

루의 기나긴 순백의 머리칼이 물기 가득한 여름의 바람에 휘날렸다.

이리아에게 등을 보인 그의 뒤로, 잔잔한 미성이 퍼져 나갔다.

[이만 덱스터 하워드에게 가 보세요. 그 남자, 아마 아가씨를 찾고 있을 겁니다.]

……하워드 공에게로 이렇게 쉽게 보내 줄 리가 없는데.

확실히, 루는 오늘따라 어딘가가 조금 이상했다. 낯빛을 보아서는 그의 말대로 아픈 것 같지 않은데, 꼭 아픈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분명 가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회색빛 역광이 진 루의 뒷모습이 무척이나 아득해 보였다. 이리아는 그의 옷소매를 다시 한번 잡아 볼까 고민했다가,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루는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한 듯했다. 지금은 그녀가 곁에 있어 봤자,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리아는 루의 너른 어깨를 시선으로 따라 그리다가, 이내 조용히 자리를 피해 주었다.

최근 저택에서 크게 할 일이 없는 이리아가 드나드는 장소는 단 세 군데였다. 정원, 하워드 대부인의 침실, 그리고 덱스터의 집무실이었다.

이리아는 고민도 없이 단번에 덱스터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녀는 집무실 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양 뺨을 붉히며, 덱스터가 부드러운 아침의 키스로 맞아 주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집무실 문을 열고 나온 자는 덱스터가 아닌 루시어스였다. 한껏 당황한 이리아는 곱게 달아오른 얼굴을 다급히 머리카락으로 가려야 했다.

“하…… 하워드 공은요?”

“지금은 자리에 계시지 않습니다. 해가 지면 주인님께서 직접 아가씨를 뵈러 가신다고 하셨으니, 저녁이 될 때까지 기다려 보시죠.”

“서, 설마 하워드 공이 어디 아프신 건…….”

“아닙니다. 혹시 아가씨께서 주인님께 따로 남길 말씀이 있다면, 제가 전해 드리겠습니다.”

……루는 하워드 공이 날 찾고 있을 거라 했는데.

빵빵한 풍선에 바늘을 찔러 넣듯, 설렘으로 복받쳐 올랐던 가슴께에서부터 공기가 쫙 빠지는 느낌이었다. 이리아는 한숨을 삼켰지만, 속상하지 않은 척 고개를 내저었다.

오늘은 루도, 덱스터도 상태가 영 꽝이나 보다.

‘하워드 공이 없으면 저녁까지 뭘 해…….’

이리아는 루시어스가 있는 집무실에 죽치고 앉아 있을 깜냥도 없는 데다가, 루 아휜에게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명목으로 다시 찾아갈 상판도 못 되었다.

하녀들과 아무리 친분이 깊다고 해도 이리아는 상관이었고, 하녀들을 그녀를 시중드는 자였다. 하녀들에게 찾아가면 겉으로 티는 내지 않음에도 분명 싫어할 텐데, 그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차라리, 이참에 다시 자수를 시작해야겠다.

이리아는 실과 천만 받고 자리를 피해 주겠다는 마음으로 로샨을 찾았다. 언제나 부엌이나 저택 지하에서 일을 하던 로샨은 웬일인지 저택 뒤편 마구간에 가 있었다.

로샨이 있는 마구간에서부터 말이 뒷발을 차는 소리와 아이의 신나는 웃음보가 들려왔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진 이리아가 종종걸음으로 마구간에 달려가니, 마야의 등에 올라탄 루인이 보였다.

안장 위에 앉은 자세는 엉성했고, 고삐를 쥔 손 또한 능숙지 않았다. 눈썰미가 그다지 좋지 않은 이리아가 봐도 루인은 승마를 처음 배우는 듯했다.

이리아가 마야에게 줄 당근을 골라내고 있는 로샨에게 다가가 물었다.

“루인은 승마를 처음 배우는 건가요?”

“네. 시기가 조금 늦긴 했지만, 소질이 있으니 금방 배울 거예요.”

이리아는 루 아휜에게 승마를 10살이 한참 넘은 후에야 배웠다. 이제 겨우 7살인 루인에게 시기가 조금 늦었다니, 그녀는 비센티움인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아직은 역부족이라고 느꼈다.

어린 짐승은 인간과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빠른 속도로 성장한다. 마야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조랑말임에도 불구하고, 어느덧 루인을 등 뒤에 가뿐히 태울 만큼이나 자라 있었다.

마야는 루인을 태운 채로 마구간 앞마당 두 바퀴를 가볍게 돌았다. 승마 연습을 마친 루인이 내려오기 무섭게, 마야는 후다닥 로샨에게 달려가 당근을 뺏어 물었다.

로샨이 솜털이 보슬보슬 난 마야의 이마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조랑말이 참 순해요. 보통의 말들은 승마를 처음 배우는 어린아이들에게 등을 잘 내주지 않는 편인데, 이 아이는 곧바로 허리를 숙이더라고요.”

“하워드 공은 주인을 잃은 군마들만 사들이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전쟁도 겪지 않은 아이가 이곳에는 어떻게 오게 될 걸까요?”

“이 아이는 베이어 백작이 소유한 남부의 농장 출신이에요. 베이어 백작이 얼마 전에 직물 사업을 하나 말아먹은 탓에 돈을 메꾸기 위해 농장의 가축들을 전부 식용으로 경매장에 내두었었는데, 그때 주인님께서 사 오셨죠.”

식용으로 경매장에 낸 가축 중 한 마리였다니, 속상함에 이리아의 눈썹이 아래로 축 처졌다.

만일 덱스터가 경매장에 들르지 않았다면 마야는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이리아는 당근을 게걸스레 삼키는 어린 조랑말을 슬피 바라보며, 마야가 덱스터의 눈 안에 들어서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

어려서 그런지, 마야는 군마가 아니었음에도 상당히 식성이 좋았다. 그녀는 이리아에게 새까만 콧잔등을 들이밀며 당근을 더 내놓으라 칭얼대기 시작했다.

‘변함없이 사람에게 애교가 많구나…….’

이리아는 당근이 없어 미안하다고 속삭인 대신, 마야의 기다란 목덜미를 부드럽게 쓸어내려 주었다.

이리아가 물기가 촉촉이 맺혀 반짝이는 조랑말의 검은 눈동자를 깊이 들여다보았다. 마야가 이리아의 시선을 느꼈는지 거칠게 투레질을 하다 말고 그녀를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뒤늦게 이리아의 정체를 깨달은 마야가 그녀의 가슴팍에 촉촉한 콧잔등을 문질렀다.

마야가 자신을 알아보자, 이리아는 괜스레 숨이 벅차올랐다. 그녀는 울렁이는 가슴께를 숨기기 위해 토로하듯 말을 빠르게 내뱉었다.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제 옆에는 언제나 하얀 조랑말 한 마리가 함께했었어요. 전쟁터에서 마물에 물려 숨을 거두었었는데, 이 아이를 볼 때마다 제 조랑말이 살아 돌아온 것 같아요.”

“주인님께서도 언젠가 루시어스 씨에게 비슷한 말을 했었어요. 덧붙여서 새하얀 조랑말이 인간에게 먹히는 꼴만은 절대로 보고 싶지 않았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정확히 어떤 말을 하셨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네요.”

울렁이는 가슴께를 숨기기 위해서 입을 열었던 건데, 로샨의 대답을 듣자마자 도리어 심해지고 말았다. 이리아는 뜨겁게 달아오른 눈가를 팔뚝으로 황급히 벅벅 문질렀다.

저 머나먼 대륙의 동쪽에는 윤회(輪回)와 환생을 믿는 종교가 있다고 한다. 비록 루퀼렘의 종교는 생명의 환생을 주장하지 않지만, 이리아는 동쪽의 종교대로 만일 환생이란 게 정말로 존재한다면 틸다의 영혼이 마야의 육체 속에 조금이나마 담겨있기를 바랐다.

지난날 군부대에서 틸다의 몸 위로 라이터와 술병을 던지던 덱스터의 모습이 떠올랐다. 분명 어젯밤 늦게까지 함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리아는 문득 그가 너무나도 많이 보고 싶어졌다.

로샨은 자수를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이리아에게 대부인의 낡은 손수건을 건넸다. 연하늘색의 손수건은 자잘한 제비꽃 무늬와 참 잘 어울릴 듯했다.

덱스터가 없으니 하루가 꽤 길다는 착각이 든다. 이리아는 거뭇거뭇한 노을이 질 때까지 창밖의 새소리를 들으며 수를 놓다가, 홀로 저녁 식사를 했다.

다행히, 덱스터는 해가 지면 직접 이리아를 보러 오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이리아는 하녀들의 시중을 받아 일찍이 슬립으로 갈아입었다. 옷방에서 나온 그녀는 창틀에 삐딱하게 걸터앉아 있는 검은 머리칼의 남성을 보자마자 얼굴을 밝혔다.

덱스터가 두 팔을 뻗으며 나직이 이리아의 이름을 외쳤다.

“이리아.”

이리아는 단번에 달려가 그의 너른 가슴팍에 뺨을 파묻었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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