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16.
한여름임에도 불구하고, 새벽 공기는 어김없이 쌀쌀했다.
덱스터는 이리아와 다르게 아침잠이 많지 않은 사람이었다. 태양이 오르기도 전에 눈을 뜬 그는 간단히 몸을 풀기 위해 검을 들고 연무장으로 나섰다.
새들마저도 꿈나라를 탐험하고 있을 만큼 무척이나 이른 아침이었다. 분명 아무도 없으리라 생각했건만, 연무장에는 한 손님이 미리 와 있었다.
하나로 높게 올려묶은 하얀 머리. 아침 산들바람에 펄럭이는 긴 천의 푸른빛 의복.
그는 누가 봐도 루퀼렘의 성기사단장, 루 아휜이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덱스터 하워드.”
“……이른 아침부터 대체 뭐 하자는 거야?”
“검을 뽑으십시오.”
덱스터는 막 일어난 상태 그대로 연무장에 나와 옷차림도 엉성했고, 머리도 엉망이었다. 그러나 루 아휜은 아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멀끔하게 차려입은 그는 누가 봐도 이를 악물고 나온 남자였다.
덱스터가 어이가 없다는 눈초리로 루를 노려보았다. 루 또한 덱스터를 마주 노려보다가, 예고도 없이 기다란 도검을 빼 들었다.
“당신이 검을 들지 않는다면, 제가 손수 들도록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루가 검을 곧게 세운 채로 덱스터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정말로 목을 베어 버릴 듯한 매서운 기백이었지만, 덱스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빠르게 검을 막아 냈다.
날카롭게 갈린 두 칼날이 만나 소름 끼치는 소리를 자아냈다. 덱스터가 날카로운 날붙이 너머, 루 아휜의 황금빛 눈동자를 응시하며 비릿하게 웃어 보였다.
“상당히 야만적이고 치졸한 화풀이군, 루 아휜.”
“당신을 상대하는 데 교양을 갖출 필요성을 못 느끼겠으니까요.”
“나이가 지긋한 이들은 참을성도 많은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건 아닌가 보지?”
“나이를 잊을 정도로 당신이 제 참을성을 바닥나게 합니다, 덱스터 하워드.”
루의 대답을 듣자마자, 덱스터의 미소는 더더욱 짙어졌다.
검과 검이 맞부딪히는 소리는 몇 차례 더 널따란 연무장을 울렸다. 막 잠에서 깨어난 들새들은 굉음을 피해 일제히 주홍빛의 하늘 위로 푸드덕 날아올랐다.
덱스터의 검 끝은 루 아휜의 머리카락을 노렸고, 루의 검 끝은 덱스터의 옷소매를 노렸다. 그러나 둘의 검은 단 한 번도 목적을 이룰 수 없었다. 비등비등한 실력은 덱스터가 루의 머리카락을 놓치게 만들었고, 루가 덱스터의 옷소매를 놓치게 만들었다.
예상외로, 먼저 손의 힘을 뺀 자는 루 아휜이었다. 그는 덱스터에게 달려들었던 기백이 무색하게, 태양이 하늘 위로 완전히 자리를 잡자마자 검 끝을 축 늘어뜨렸다.
“아가씨께서…… 기상하실 시간입니다.”
높게 뜬 태양을 확인한 덱스터 또한 마찬가지로 검을 거두었다. 잠에서 깬 이리아에게 서로 검을 맞대는 꼴을 보여 줄 수는 없었다.
덱스터는 루가 곧바로 이리아를 찾아가리라고 생각했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한참을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는 아주 긴 시간이 지난 후에야 자세를 바로 했다.
검을 검집에 쑤셔 넣는 루 아휜은 그답지 않게 기력이 하나도 없었다. 새들의 울음소리마저도 전부 사라진 고요 속에서, 그의 목소리만이 아득히 울려 퍼졌다.
“루퀼렘에서의 지난 20년 동안, 아가씨는 언제나 암울하셨습니다. 여왕님께도, 그리고 제게도 절대로 쉽게 웃음을 보이지 않으셨죠.”
흐트러진 옷차림을 정돈하고 있던 덱스터의 손이 그대로 우뚝 섰다.
덱스터와 시선이 마주친 루는 숨통이 막 트인 아기처럼 힘겹게 웃어 보였다.
“적어도 당신과 있을 때는 아가씨께서 암울하신 것 같지 않아 안심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찾아와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대체 뭐야? 겨우 안심했다는 말을 지껄이려고 온 건 아닐 텐데.”
“그분께서 자유를 원했다는 사실은 아주 오래전부터 알았습니다. 언제나 아득한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보셨으니, 몰랐을 리가 없죠.”
덱스터의 새까만 눈썹 끝이 살짝 일그러졌다. 루 아휜은 그의 말을 전혀 듣고 있지 않았다.
기다란 순백의 머리칼을 높게 올려 묶고, 오래된 도검을 허리춤에 매단 노장의 마법사는 몹시나 지쳐 보였다. 어쩌면 그가 지난 세월 살아온 긴 과거를 후회하는 듯하기도 했다.
“아가씨께서 8살이 되었을 때, 저는 훗날 반드시 루퀼렘 밖으로 인도해 드리겠다고 그분과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은 끝까지 지킬 수 없었습니다. 자유를 향한 아가씨의 갈망을 너무나도 잘 알았지만, 제게는 성기사단장으로서의 의무가 있었으니까요.”
루 아휜은, 다섯 뿔의 여신 대신 덱스터에게 고해성사를 하고 있었다.
그는 덱스터를 보고 있지만, 덱스터를 보는 게 아니었다. 초점이 풀린 두 황금빛 눈동자는 현재가 아닌 과거를, 덱스터가 아닌 다른 멀고 아득한 장소를 응시하는 중이었다.
이를 깨달은 덱스터는 조용히 침묵을 유지했다.
“염치가 없어 아가씨께는 차마 알려드리지 못했지만, 전 사실 그분과의 약속을 아주 오래전에 포기했었습니다. 그렇기에 아가씨께서 루퀼렘 성을 빠져나갔을 때, 아주 조금이지만 제가 아가씨를 영영 발견하지 못했으면 좋겠다고 소망했습니다. 아가씨께서…… 그토록 원하셨던 자유를 찾아 저 먼 곳으로 떠나 버리셨기를 여신께 기도했습니다.”
주군에게 자유를 주고 싶지만 주지 못하는 심복의 마음은 끔찍하다. 의무에 따라 이리아를 루퀼렘에 데려가야 하지만, 사실은 그러고 싶지 않다.
만일 이리아가 루퀼렘 성으로 돌아간다면, 그녀는 아마 일평생 다시는 루퀼렘 성 밖으로 발을 내디딜 수 없을 것이다. 에즈메릴다 혼 루미에르 여왕은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녀는 루퀼렘의 평안을 위해서라도 이리아가 돌아간 후, 그녀의 문에 달았던 자물쇠를 두 개, 세 개로 늘릴 터다.
대마법사 엘드리지가 백 년을 훨씬 더 넘게 살았던 만큼, 대마법사 이리아 아델리어 또한 앞으로 그만큼 긴 세월을 살아가리라. 그러나 살아갈 긴 세월 동안 절대로 루퀼렘 성 밖을 빠져나올 수 없겠지.
루 아휜은 대마법사의 자리로 복귀한 이리아에게 찾아올 암울한 미래를 너무나도 잘 알았다. 그렇기에, 성기사단장의 의무를 저버리고 어젯밤 흔쾌히 자리를 비켜 주었던 거다.
자신이 없는 공간에서 이리아는 어젯밤 행복한 시간을 보냈었을까. 루 아휜은 어쩌면 정말로,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자유를 이리아가 마음껏 만끽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루 아휜의 두 눈동자에 차차 초점이 돌아왔다. 제정신을 차린 그가 가슴 앞으로 내려온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어 내리며 퉁명스레 내뱉었다.
“겨우 30년 즈음 산 것 치고는 검술 실력이 상당히 괜찮군요, 덱스터 하워드. 확실히 전쟁 영웅은 전쟁 영웅인가 봅니다.”
루는 딱히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검술로 덱스터를 한번 확 때려눕히고 싶었다는 눈치였다. 이리아가 현재 덱스터를 좋아하든 말든 상관없이, 그는 어쨌거나 지금으로부터 석 달 전에 이리아의 손가락에 강제로 반지를 끼워 버린 남자였으니까.
언제나 그랬듯, 루는 인사 따위 없이 곧바로 덱스터에게서 등을 돌렸다. 덱스터는 몹시나 지쳐 보이는 그의 등판을 제자리서 아무 말 없이 바라보다가, 연무장 바닥에 냅다 검을 집어 던졌다.
쨍그랑. 날붙이가 추락하는 날카로운 소음이 연무장을 사납게 울렸다.
“때려, 하얀 뺀질아. 한 대 정도는 기꺼이 맞아 줄게.”
일순간, 루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그가 천천히 덱스터를 돌아보았다. 서늘한 아침 바람을 맞고 서 있는 덱스터는 검도 버려 완전한 맨몸이었다.
“아무 불만 없이 한 대 맞아 줄 테니까, 네 아가씨와 함부로 약혼한 값과 퉁 치자. 원치 않던 약혼을 내가 멋대로 거행했으니 상식대로 따지자면 이리아에게 맞아야 하는데, 어차피 그녀는 나를 못 때릴 테니 너에게 대신 맞지.”
“……분명 당신이 먼저 맞겠다고 한 겁니다, 덱스터 하워드.”
“그래.”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덱스터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루는 양 옷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리고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와, 덱스터의 왼쪽 관자놀이에 곧바로 주먹을 꽂아 넣었다.
소리가 없었음에도 충격은 컸다.
“큭……!”
어찌나 세게 때렸던지 순간, 덱스터의 거대한 몸이 매섭게 휘청였다.
뺨도 아니고 설마 관자놀이를 주먹으로 가격할 줄은 예상조차 못 했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주먹이 닿는 찰나 눈앞이 새까매지며 연무장 바닥에 머리를 처박을 뻔했다.
‘이, 이런 미친 루퀼렘인이…….’
오후가 되면 분명 얼굴 왼쪽 면에 새파란 멍이 들어 있으리라. 먼저 맞겠다고 호기 좋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관자놀이를 맞았다는 사실이 너무 어이가 없던 덱스터는 자기도 모르게 그만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머리통이 울리는 듯한 고통은 몹시나 뒤늦게 찾아왔다. 루 아휜이 온 힘을 다해 때린 탓에, 고통을 맞이한 덱스터는 머리를 감싼 채로 한참을 앓아야 했다.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루는 ‘아가씨’를 맞이해야겠다며 걷어 올렸던 옷소매를 단정히 정리했다.
우아하게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 너머로 고운 미성이 울려 퍼졌다.
[아아……. 폭력이란 예상보다 더욱 기분 좋은 것이었군요.]
당연히, 덱스터는 끙끙 앓는 와중에도 루의 목소리를 들었다.
당장이라도 루 아휜에게 달려가 왼쪽 관자놀이를 똑같이 만들어 주고 싶다는 충동이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무럭무럭 자라났지만, 불가능했다.
‘아무 불만 없이’ 맞겠다고 했다.
남자의 자존심이 있지, 아무리 덱스터 하워드라 해도 한 입으로 두말을 할 수는 없었다.
***
아주 긴 시간 자고 일어났음에도, 이리아의 입 속에는 여전히 독한 박하 향이 남아 있었다.
어젯밤 덱스터와 풍등을 구경한 이후, 이리아는 저택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와 수없이 입맞춤을 나누었다. 행인들이 가득한 거리에서도 키스를 하고, 저택으로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도 키스를 했다.
깊은 밤, 도심을 달리는 마차에서의 입맞춤은 절로 분위기를 달아오르게 했다. 이리아는 치마 아래 허벅지를 쓰다듬는 손길을 알았지만, 달콤한 숨결을 받아들이는 데 바빠 굳이 꼬집지 않았었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 덱스터는 이후에도 쉬지 않고 이리아의 몸을 매만졌다. 그는 새빨간 머리카락 아래 숨겨진 목덜미에 송곳니를 박아 넣고선, 속옷이 드러날 때까지 치맛단을 위로 끌어 올리기까지 했다.
술에 취하지 않았음에도, 덱스터의 커다랗고 뜨거운 손이 피부를 쓸고 지나가는 느낌은 황홀했다. 이리아는 그가 다시 입술을 꿀꺽 집어삼킬 때까지 힘겹게 할딱이며 손길을 전부 받아들였었다.
‘……아파.’
보드라운 입술은 어젯밤 몇 번이고 덱스터의 앞니에 짓눌려 엉망이었다. 입꼬리를 늘어뜨리면 피부가 펴지며 약간 따끔거리기도 했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