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화 (81/109)

80화

사실, 풍등 날리기는 비센티움이 왕실이었을 시절부터 시작된 아주 오래된 풍습 중 하나이다.

비센티움이 왕실이었을 당시, 부모들은 국가의 징집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자식들을 모조리 군대에 보내야 했다. 고향에 남은 부모들은 전장에서 싸우고 있는 아이들에게 소식을 알릴 한 방법으로 풍등을 선택했다고 한다.

몇몇 이들은 하늘에 떠오른 풍등이 바람을 타고 날아가 아이들에게까지 닿으리라 여겨, 풍등에 편지를 붙이기도 했다. 하지만 전국 시대가 막을 내린 후 풍등에 편지를 붙였던 풍습도 조금씩 변화하여, 지금은 편지 대신 소원을 적은 양피지를 붙인다.

덱스터가 겉옷 안주머니에서 양피지 두 장을 꺼냈다. 하나는 이리아의 소원을 적을 양피지였고, 또 하나는 그 자신의 소원을 적을 양피지였다.

“소원 두 개를 적는 이들도 더러 있는데, 대부분은 가장 간절한 소원 하나를 적어.”

가장 간절한 소원 하나.

이리아가 양피지를 받아 들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밤을 맞아 새까맣게 변한 운하는 풍등을 날릴 사람들로 북적북적했다. 이리아는 양피지에 이어 라이터를 꺼내 드는 덱스터를 한참 힐끔거리다가, 황급히 소원을 적었다.

신호는 없었다. 하지만 신호 따위 없었음에도, 널따란 운하를 둘러싼 사람들은 다 함께 불이 붙은 풍등을 떠나보냈다.

이리아는 천천히 떠오르는 수백 개의 샛노란 풍등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별 같다…….’

군부대에서 보았던 밤하늘의 은하수가 다시 한번 그녀의 눈 앞에 펼쳐진 느낌이었다.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신비롭고, 경이로운 순간이었다.

찰랑거리는 운하 위로 풍등의 불빛들이 비치었다. 거대한 운하는 풍등으로 가득 찬 밤하늘을 그대로 가져가 물 안에 또 하나의 샛노란 불빛의 향연을 만들어 냈다.

이리아의 피부에 따스한 온기가 천천히 닿아 왔다. 이제 너무나도 익숙해진 덱스터의 손가락은 그녀의 작은 손등을 부드럽게 쓰다듬다가, 다섯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었다.

이리아는 덱스터와 깍지를 껴도 더 이상 긴장하지도, 식은땀을 흘리지도 않았다. 그녀는 도리어 거칠고 굳은살 가득한 덱스터의 손을 더욱 단단히 맞잡았다.

손끝에서부터 시작된 그의 온기는 느리고도 아득하게 이리아의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이리아는 왼쪽 가슴이 저릿한 느낌을 받으며, 슬며시 덱스터를 돌아보았다.

덱스터의 잘생긴 얼굴 위로 은은한 그림자가 파도를 치고 있었다. 그의 새까만 눈동자 위로도 풍등의 빛이 스며들어, 마치 황금을 뿌린 듯 노랗게 반짝거렸다.

시선을 느낀 덱스터가 찬찬히 이리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샛노란 화광이 가득한 허공에서 서로의 눈길이 만난 찰나, 이리아의 머릿속에서는 과거의 모든 기억이 주마등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루퀼렘 성에서의 첫 만남과 헤어짐. 7년이란 시간이 지난 후의 재회. 꽃이 피는 봄부터 시작하여 지나간 세 개의 계절…….

그리고, 마침내. 지금 이 순간까지.

주마등의 끝에서 바로 앞의 덱스터를 마주하자, 이리아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심장을 토해 낼 만큼이나 가슴이 미치도록 울렁거리고 있었다.

‘……이 느낌은 대체 뭐지?’

생전 처음 겪는 심장의 울렁거림이 너무나도 낯설어서, 이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어색한 숨통을 터뜨리고 말았다. 뭐라도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그녀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하…… 하워드 공은 어떤 소원을 적었어요? 혹시 대부인과 관련된 소원을 적으셨나요?”

“아니. 당신에 관한 소원을 적었어.”

아. 이리아의 웃음이 서서히 스러졌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게 해 달라고…….”

샛노란 불꽃 속에서 울려 퍼지는 낮은 목소리는 덱스터의 것답지 않게 애처로이 떨리고 있었다.

이리아의 바로 앞에 선 덱스터는 군부대에서 은하수를 처음으로 보았던 그날 밤, 언덕 아래에서 지었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남자의 얼굴을.

왜 하필 이런 기분일 때.

왜 하필 이 순간, 그는 저런 얼굴을 하고 있는 걸까.

가슴 아팠던 그날의 기억이 반복되는 느낌이 들자, 이번에도 이리아의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감정이 울컥 튀어나왔다.

눈물이 새어 나올 것 같아, 이리아는 서둘러 케이프 끝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그녀가 입술을 있는 힘껏 깨물고 있을 때, 물기가 흠뻑 스며든 한 남성의 목소리가 정수리 위에서 나직이 들려왔다.

“사실, 이 소원은 풍등에 쓸 게 아니라 당신에게 빌어야 해. 나의 소원은 루퀼렘의 여신마저도 힘쓸 수 없이, 오로지 당신만이 이뤄 줄 수 있는 소원이거든.”

말이 끝나자마자, 뜨겁고도 강렬한 온기가 이리아의 작은 몸뚱어리를 감아 왔다.

새빨간 곱슬머리가 밤바람에 휘날리고, 분홍빛으로 달아오른 뺨은 순식간에 덱스터의 가슴팍에 폭 파묻혔다.

덱스터는 절대로 놓칠 수 없다는 듯 두 팔로 이리아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이리아의 가녀린 목덜미 위에 손바닥을 댄 그는, 피부 아래서 빠르게 박동하는 맥박을 느끼며 간절히 속삭였다.

“제발. 제발 나를 사랑해 줘, 이리아…….”

잔뜩 쉬어 버린 목소리에서부터 덱스터의 애타는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이리아는 아주 긴 시간 그 어떤 말을 할 수도, 손끝 하나 까딱일 수도 없었다. 덱스터의 가슴팍에 뺨을 파묻은 그녀는 자신의 심장만큼이나 빠르게 박동하는 덱스터의 심장 소리를 가만히 듣다가, 그의 허리께를 조심스레 마주 껴안았다.

밤바람에 두 남녀의 머리카락이 함께 흩날렸다. 얼굴을 스치는 바람과 덱스터의 아득한 심장 박동을 느끼며, 이리아는 두 눈꺼풀을 천천히 감았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한 글자 한 글자 힘겹게 내뱉었다.

“하워드 공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면 너무 신경이 쓰일 것 같아요. 이건 사랑인 건가요?”

“아니. 난 당신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면, 이 세상을 더 살아갈 수가 없어. 이게 사랑이야.”

덱스터의 허리께를 휘어잡은 이리아의 양손에서부터 서서히 힘이 빠져 갔다. 서로가 가진 마음의 무게가 너무나도 달랐기에, 그녀는 염치를 차리기 위해서라도 덱스터를 붙잡고 있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리아가 손을 놓으려던 그 순간, 덱스터가 예고도 없이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이리아의 잇새서 외마디의 비명이 튀어나왔다.

“아……!”

“하지만 어느 날 내가 사라진다면, 신경이 쓰이겠다는 당신의 말만으로도 난 한없이 기뻐.”

일제히 자신을 향한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져, 이리아의 볼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이리아는 차마 덱스터에게 내려 달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덱스터가, 그답지 않게 천진난만한 소년처럼 몹시도 해사하게 웃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용암에 빠져 스르르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꼿꼿하게 서 있던 척추의 힘이 제멋대로 빠져 버려, 이리아는 하는 수 없이 덱스터의 이마 위에 제 이마를 맞대야 했다.

여전히, 하늘 위에서는 샛노란 풍등들이 은하수를 만들고 있었다. 덱스터와 이리아는 황금빛 그림자가 진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옅은 숨결을 내쉬었다.

“당신은 혹시 어떤 소원을 적었어? 혹시 자유에 관한 소원을 적었다든가…….”

“제가 하워드 공을 사랑하게 해 달라고 적었어요.”

아아. 덱스터의 잇새서 고통스럽고도 황홀한 신음성이 나직이 새어 나왔다.

사람의 감정은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다. 지난날 덱스터 하워드가 의지만으로 이리아 아델리어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막을 수 없었듯이, 이리아 아델리어 또한 의지만으로는 덱스터 하워드를 사랑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사랑을 이루기 위한 하늘의 기적이 필요했다.

지난 20년 동안 열심히 기도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루퀼렘의 여신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이리아의 소원을 이루어 준 적 없었다. 이리아의 마음속 여신을 향한 믿음은 이미 바닥난 상태였지만, 그녀는 풍등에 소원을 날려 마지막으로 딱 한 번 더 기도를 해 보기로 했다.

다섯 뿔의 여신이시여, 비나이다.

부디 제가 하워드 공을 사랑하게 해 주세요.

이리아는 여신에게 간절히 기도하며, 덱스터의 입술에 제 입술을 부드럽게 맞대었다.

소원이 짧은 만큼, 키스도 짧았다. 이리아가 입술을 거두었을 때, 덱스터는 그답지 않게 애처로이 눈꺼풀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당신은 나를 무너뜨리러 찾아온 악마가 분명해.”

그의 속삭임을 끝으로, 둘은 다시금 서로의 입술을 맞대었다.

비센티움의 사람들은 던햄 공과 덱스터가 참 비슷한 인생을 살았다고 한다. 검은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진 두 남자는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여의었고, 젊은 시절을 전쟁터에서 보냈으며, 전쟁을 통해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다.

던햄 공은 덱스터의 나이일 적에 첫 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오로지 권력을 좇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던 그는 스스로 사랑을 저버렸으면서도, 일평생 소싯적의 한 여인을 그리워하며 살았다.

비센티움인들은 이십 대 후반이 될 때까지 약혼을 하지 않았던 덱스터가 결국엔 던햄 공처럼 권력을 따라 부인을 맞아들일 것이라 짐작했다. 하지만, 덱스터는 그들의 짐작을 전적으로 부정하기로 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나, 덱스터 하워드는 그와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싶었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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