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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80/109)

79화

덱스터 하워드와 루 아휜. 두 남자는 이리아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기 무섭게,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서로를 돌아보았다.

서로를 보는 둘의 눈동자 속에 애정 따위는 없었다. 마티니를 반쯤 해치운 덱스터가 먼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네가 끼어든 바람에 이리아가 계속해서 눈치를 살피잖아, 하얀 뺀질아.”

“그러니 말입니다. 눈치를 살펴야 하는 이는 사실 당신인데도 말이죠.”

“네 아가씨를 생각해서라도 저택으로 먼저 돌아가지 그래?”

“안 됩니다. 제가 당신을 어떻게 믿고…….”

“헛소리 마, 루 아휜. 날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리아를 믿지 못하는 거겠지. 그녀가 실수로라도 마법을 쓸까 봐 걱정하는 중일 텐데?”

루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덱스터의 말이 맞았다는 의미였다.

덱스터와 이리아가 함께 도주할까 봐 걱정된다는 대목은 사실 덱스터를 업신여기기 위해 의미 없이 내뱉은 말이었다. 그가 정말로 걱정하는 부분은 이리아의 마법이었다.

이리아는 이미 비센티움 도심 한가운데서 시간을 멈춰 버린 전적이 있었다. 그녀가 만일 그때와 같이 또 한 번 실수로 마법을 발동한다면, 수습은 모두 루 아휜의 몫이었다.

그러니 적어도, 비센티움 도심에서만큼은 그는 이리아의 곁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덱스터는 일부러 루 아휜에게 독한 술을 시켜 주었다. 루 또한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목이 탔는지 잔째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덱스터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루의 울대뼈를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만일 이리아가 루퀼렘으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다면, 이게 마지막이 될 나들이야. 그녀의 지난 20년을 생각해서라도, 네가 없는 자유를 조금이라도 더 즐기게 해 줘.”

쿵. 루가 조금 신경질적으로 잔을 내러 두었다.

그는 갈등하는 모양새였다. ‘루 아휜’으로서는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자유를 이리아가 즐기게 두고 싶지만, 루퀼렘의 성기사단장으로서는 그녀의 옆에 딱 붙어 있어야만 한다.

까만색을 덧씌운 황금빛 눈동자가 몇 번이고 흔들리고 잦아지기를 반복했다. 그는 텅 빈 마티니 술잔 끝을 한참 매만지다가, 갑자기 일어나 덱스터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자유를 이리아가 마음껏 즐기게 두기로 선택한 거다.

어금니를 꽉 악문 루가 낮으면서도 간드러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혹여 제가 없는 사이 아가씨께서 실수로라도 마법을 쓰신다면, 전 당신부터 죽일 겁니다, 덱스터 하워드.]

[그러시던가.]

이후, 루 아휜은 덱스터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술집을 나가 버렸다. 덱스터는 왜인지 화가 난 듯한 창밖 그의 모습을 눈으로 좇다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루 아휜이 화가 나든 말든, 그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

다행히, 이리아는 금방 돌아오겠다는 덱스터와의 약속을 지켰다.

아무리 날이 더워도 다음에는 꼭 가터벨트를 차야겠다고 다짐하며, 이리아가 쫄래쫄래 덱스터에게로 다가갔다. 그녀는 텅 빈 옆자리를 확인하자마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루가 안 보여요.”

“루 아휜은 저택으로 돌아갔어.”

“서, 설마 둘이 또 싸운 건…….”

“그런 거 아니야.”

그럼 왜? 이리아가 무언의 물음을 담아 덱스터를 바라보았다. 덱스터는 급한 일이 생긴 듯하다고 둘러대며 그녀의 뽀얀 뺨을 손등으로 쓸어내렸다.

정말로 급한 일이 생긴 건지, 아니면 또 싸운 건지.

이리아는 덱스터의 말을 완전히 믿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꼬치꼬치 캐물으면 분위기가 상할 것 같아 침묵을 유지했다.

그리고 사실, 이리아도 덱스터가 스킨쉽을 할 때마다 루의 눈치를 살피는 데 살짝 지친 상태였다. 루에게는 몹시 미안하나, 그가 곁에 없는 게 이리아에게는 도리어 편했다.

‘비센티움의 군단장을 옆에 두고 루가 없는 게 도리어 편하다고 느끼다니…….’

이리아는 순간, 스스로가 좀 우스워졌다. 과거의 ‘이리아 아델리어’가 이 사실을 안다면 아마 목을 부여잡고 뒤로 넘어갈 터다.

‘……이 사람이 좋아.’

사랑이라는 감정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점 하나는, 이리아는 덱스터 하워드를 좋아하고 있었다.

덱스터가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은 언제나 부드러웠고, 매만지는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자유와 함께 다가오는 상냥함이란, 이리아가 절대로 싫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덱스터는 그녀가 앉기를 기다리며 지폐로 조그마한 종이배를 접는 중이었다.

“자.”

그가 접은 종이배를 자랑하듯 손바닥에 올려 보여 주었다. 이리아는 손자국이 가득한 종이배를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너털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전의 사냥 대회에서 새끼줄을 꼬았을 때도 그렇고, 이 남자는 거대한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세심한 부분이 있었다.

이리아는 말끔하게 정돈된 블라우스를 또 한 번 확인하며 의자에 궁둥이를 붙였다. 그녀가 남은 모히토를 비워 내기 무섭게, 피아노 선율이 아늑한 술집 가득히 울려 퍼졌다.

타오르는 불꽃 같은 새빨간 드레스를 입고, 금발의 미녀 한 명이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선율은 몹시도 아름다웠지만, 이리아는 생전 처음 들어 보는 음악이었다. 그녀가 술잔을 엉성하게 쥔 그대로 술집 한가운데를 빤히 바라보자, 덱스터는 웃으며 이리아의 손안에서 술잔을 가져갔다.

그가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 두며 말했다.

“이 도시에서 꽤 인기 있는 연주가야. 첼로와 피아노를 주로 연주하는데, 실력보다는 화려한 외모로 인해 유명해졌지.”

“너무 예쁘세요.”

“당신이 훨씬 더 예뻐, 이리아.”

감미로운 속삭임과 함께, 이리아의 말간 뺨 위로 따스한 온기가 내려앉았다. 그게 덱스터의 입술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어느덧 얼굴이 달아오른 이리아는 차마 그를 돌아볼 수 없었다.

덱스터는 고개를 수그린 이리아가 얼굴을 가리지 못하도록 새빨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버렸다. 보조개를 보이며 너털웃음을 지은 그가 나직이 이어 말했다.

“던햄 공은 사실 군인이 되기 전에 잠깐 작곡 일을 했었어. 그는 상당히 작곡에 소질이 있는 남자였는데, 젊었을 적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인을 위해 저 곡을 남겼지.”

“……언젠가 들어 본 적이 있는 노래예요.”

“그렇겠지. 내가 당신한테 기타로 연주해 주었던 노래니까.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기타를 잡는 순간 생각난 노래가 저것밖에 없었어.”

이리아가 뜨겁게 달아오른 뺨을 엉성하게 문지르며 덱스터를 바라보았다. 왼쪽 뺨에 보조개 자국이 남은 그는 어김없이 새까만 눈동자를 빛내며 이리아를 지그시 응시하는 중이었다.

‘던햄 공이 지은 곡이라고…….’

언젠가 루퀼렘에서 역사 공부를 할 때, 비센티움의 태조(太祖) 던햄 공의 초상화를 본 적이 있다. 비센티움인 특유의 진한 이목구비와 검은 머리칼, 그리고 그만큼 검은 눈 색을 가졌던 던햄 공은 덱스터와 참 비슷한 생김새의 소유자였다.

던햄 공은 어린 시절 부모님을 여의고, 작곡 일을 시작했지만 뜻대로 잘 풀리지 않았다. 십 대 시절의 그는 마음에 둔 여인이 있었으나, 자신의 궁핍한 생활을 들키기 싫어 사랑을 고백하지 못했다.

작곡 일로는 돈을 벌지 못하겠다고 판단한 던햄 공은 이십 대 초반에 군대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머지않아 전쟁 영웅이 되어 돌아왔다.

전쟁 영웅이 된 그는 충분히 마음에 둔 여인과 결혼할 수 있었으나, 그리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치적, 경제적 이득을 볼 수 없는 몰락 가문의 막내딸이었기 때문이었다.

던햄 공은 사랑이 아닌 권력을 선택했다. 그는 인생을 살며 총 3명의 여인을 맞았지만, 모두 철저한 이해관계를 고려하여 행한 혼인이었다.

이리아는 덱스터에게 그가 던햄 공과 무척 닮았다는 말을 하려다가 관두었다. 울려 퍼지는 아름다운 피아노의 선율 한가운데서, 던햄 공의 실패한 사랑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리아와 덱스터가 밖으로 나왔을 때는 어느덧 해가 저물어 가는 중이었다. 여름이 다다랐기에 노을이 참 길었다.

거리의 행인들은 사전에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똑같은 물건을 들고선, 똑같은 방향으로 거리를 지나가고 있었다. 이리아는 사람들의 손아귀에 있는 커다랗고 둥그런 물건을 흥미로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그녀가 조심스레 덱스터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다들 손에 똑같이 생긴 커다란 물건을 하나씩 들고 있어요, 공.”

“풍등이야. 달이 뜨면 하늘 위로 풍등을 날려 보내야 하거든.”

이리아가 비센티움에 온 지도 1년이 훨씬 지났다. 지난날 비센티움의 문화는 거의 다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덱스터가 말한 ‘풍등’이라는 물건은 이리아는 생판 처음 보는 것이었다. 풍등은 원통형으로 붙인 두꺼운 양피지 안에 짧은 촛대를 넣은 형태였는데, 열기구와 같은 원리를 이용하는 듯했다.

아이처럼 행인들을 빤히 구경하는 이리아는 누가 봐도 풍등을 날려 보고 싶은 눈치였다. 덱스터는 그런 그녀를 지그시 내려다보다가, 서로의 손을 부드럽게 맞잡았다.

운하에서 풍등을 날리는 게 주요 행사인 만큼, 골목 양쪽의 노점상에서는 풍등을 잔뜩 쌓아 두고 파는 중이었다. 새하얀 풍등 두 개를 고른 덱스터는 노점상 주인에게 은화를 건넸다.

그는 거스름돈은 주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 후, 이리아의 조그마한 손아귀에 풍등을 조심스레 쥐여 주었다.

“다른 지역은 풍등을 날리지 않고 대신 하늘 위에서 화약을 터뜨려 불꽃놀이를 하기도 해. 하지만 이곳은 참전군인이 특히나 많은 도시라 불꽃놀이를 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지.”

“아……. 불꽃놀이가 폭탄이 터지는 소리를 내니까요.”

“맞아. 그래서 나도 불꽃놀이는 딱히 좋아하지 않아. 아마 큰 전쟁을 겪은 모든 이들이 마찬가지일 거야.”

이리아 또한 군부대에서 지뢰가 터지는 소리를 많이 들어 보았기에, 불꽃놀이보다는 확실히 풍등을 날리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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