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화 (79/109)

78화

진정한 행사는 해가 완벽하게 떨어진 밤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아직 태양이 내리쬐는 오전임에도 불구하고, 도심의 거리는 무척 시끌벅적했다. 카즈웰 4세에게 공격받은 후, 비가 하염없이 내렸던 그날 보았던 거리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딴판이었다.

상업이 발전한 나라 비센티움답게, 상점들은 일찍이 손님들을 불러 모을 준비를 마친 후였다. 이리아는 한껏 힘을 줘 요란하게 꾸민 사탕 가게 입구를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트럼펫과 북이 연주하는 경쾌한 음악 소리가 가까워짐과 동시에, 음악단이 대로 한가운데를 가로질렀다. 모든 게 신기한 이리아의 시선은 사탕 가게 입구에서부터 곧바로 음악단을 향해 돌아갔다.

이리아는 붉은 정복을 빼입은 음악단을 조금 더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기가 도통 쉽지 않았다.

좌우에서 그녀를 조이고 있는 두 남자 때문이었다.

“그……. 두, 둘 다 조금만 떨어져서 걸으면 안 될까요……?”

“안 돼.”

“안 돼요, 아가씨.”

서로 사이가 나쁜데도, 이럴 때는 또 죽이 참 잘 맞는다.

루 아휜의 과보호가 덱스터에게까지 옮았나 보다. 거리에 사람이 많으니 당연히 행인들과 어깨를 부딪칠 만도 한데, 두 남자는 누군가가 이리아를 치고 지나갈 때마다 눈을 부라렸다.

거대한 남성 둘이 양옆에 딱 붙어서 걸으니, 이리아는 높은 벽에 둘러싸인 기분이었다. 사실 음악단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건 고사하고, 그녀는 거리 한가운데로 나아갈 수조차 없었다.

결국, 참다못한 이리아는 좌우의 두 남자를 힘껏 어깨로 밀어 억지로 떼어 놓았다.

던햄 공의 탄생일에 가장 신이 난 이들은 바로 사탕 장수들이었다. 그들이 1년 동안 벌 돈을 이날 하루 깡그리 벌어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던햄 공은 비센티움 왕국을 건국하고 영토를 확장한 전쟁 영웅이었지만, 그렇다고 국민의 비판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계속되는 선전포고와 무리한 전쟁의 전개는 당연히 국민의 화를 불러일으켰고, 던햄 공은 흉흉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 설탕 산업을 추진했다.

던햄 공이 살아 있던 당시 전국 시대에는 설탕이 매우 비싼 수입품 중 하나였다. 땅콩, 커피와 더불어 상류층만 즐길 수 있는 3대 기호식품 중 하나였기에, 서민들은 설탕에 관해 막연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던햄 공은 대륙의 서쪽에서부터 설탕 제조 기술을 수입한 후, 전쟁으로 벌어들인 외화를 통해 대규모 사탕수수 상업 농장과 제당소를 건설한다. 과거에는 수입했던 설탕을 나라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하니, 상류층은 당연히 돈을 벌기 위해 사탕 사업에 적극적으로 투자했다.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추진한 설탕 산업은 여러 의미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상류층의 투자금을 효과적으로 회수하여 침체하였던 국가 경제를 다시 돌아가게 했으며, 기호식품의 보급을 통해 흉흉했던 민심까지도 잠재웠다.

던햄 공의 대표적인 업적 중 하나가 설탕 산업의 추진이기에, 그를 대표하는 음식은 저절로 사탕이 되었다. 그의 탄생일 행사에서 사탕 봉지 하나씩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건, 인제 거의 전통으로 자리 잡은 수준이었다.

이리아도 그 전통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는 거리를 돌아다니며 사탕 가게란 가게는 다 들렀는데, 나올 때마다 손안에 사탕이나 초콜릿 한 봉지를 들고 나왔다. 덱스터는 절대로 돈 낭비를 하는 편이 아니었지만, 이날만큼은 가게들에서 동전을 펑펑 뿌렸다.

덱스터는 단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루는 입맛까지도 늙수그레했기에, 모든 사탕은 이리아의 몫이 되었다. 그녀는 입 안에 커다란 레몬 사탕을 굴리며 돌아다녔다.

비록 사탕 가게만큼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도시의 보석상도 입구를 화려하게 꾸민 건 매한가지였다. 이리아는 주렁주렁 매달린 조화와 장식물들로 요란하게 꾸민 보석상 안쪽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새롭게 꺼낸 막대사탕 껍질을 까며 덱스터에게 물었다.

“비센티움 사람들은 보석을 좋아하나요?”

“음……?”

“언젠가 한 번 보석상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사람이 저렇게 많았었거든요.”

“그래? 그때가 혹시 이른 아침이었나?”

“네. 어떻게 아셨어요?”

루퀼렘에서 비센티움으로 도망쳐 나온 후 이튿날 아침, 마법석을 팔기 위해 들어갔던 보석상도 인파로 복작거렸었다. 마법석을 팔지 못해 무척 당황스러웠던 당시의 기억이 있다.

덱스터가 이리아의 새빨간 정수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금 투기자들이 변동하는 금 시세를 확인하려고 아침마다 보석상에 모이는 거야. 우리나라에는 금 시세를 오로지 보석상에서만 알 수 있거든.”

“아……. 그건 전혀 예상치 못한 이유네요.”

이리아는 뻔뻔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녔다. 그녀가 아이 같은 질문을 던진 것 같아 무안해하자, 덱스터는 괜찮다는 의미로 그녀의 정수리를 한 번 더 매만졌다.

이후 그는 이리아의 보드라운 눈가를 빤히 바라보다가, 허리를 숙여 그 위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바로 옆에서 루 아휜의 매서운 시선이 느껴졌다. 이리아가 황급히 눈치를 주었지만, 덱스터는 능청스레 모른 척 반대편 눈가에도 재빨리 키스했다.

그가 흔들리는 이리아의 녹빛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한없이 감미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기왕 저택을 나온 김에 목걸이라도 하나 선물해 줄까, 이리아? 가장 비싸고 예쁜 보석이 달린 목걸이로 사 줄게.”

“괘, 괜찮아요. 굳이 안 사 주셔도…….”

“여자는 꽃과 보석을 좋아한다던데. 당신은 꽃은 좋아하지만, 보석은 딱히 좋아하지 않는 듯해.”

이리아가 살짝 웃으며 하나로 엉성하게 땋아 내렸던 머리카락을 풀어 버렸다. 그녀는 잘 익은 복숭아처럼 달아오른 얼굴을 머리카락 아래 숨기고선, 루 아휜의 표정을 살펴야 했다.

‘……보석상에 왔을 당시에는 상황이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보석상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니, 이후의 기억들도 뒤이어 새록새록 떠오르기 시작한다.

루 아휜에게 루퀼렘에서 도망친 다음의 이야기는 대부분 들려주었었다. 하지만 전쟁터에서의 삶이 주 내용이었지, 전쟁터까지 가는 과정은 말을 안 해 주었던 것 같다.

덱스터의 키스로 인해 양옆의 두 남자는 어느 새부턴가 날카로운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분위기도 풀 겸, 이리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난해 루퀼렘 국경을 넘고 나서, 비센티움 북쪽 도시를 잠시 나돌았었어요.”

“그래? 그럼 보석상에는 그때 간 건가?”

“네. 그리고 이후 뒷골목에 잘못 들어갔을 때 거기 있던 마약쟁이들을 맞닥뜨렸었는데, 저와 틸다를 팔려고…….”

“……뭐?”

“네?”

아……. 마약쟁이 이야기는 하지 말 걸 그랬나.

분위기를 풀려고 꺼냈던 이야기인데, 도리어 더욱 험악하게 만들고 말았다. 강간을 당할 뻔했다는 말까지는 하지 않은 걸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이리아가 서둘러 덱스터의 주먹을 풀었다.

그의 새까만 두 눈동자는 어두워지다 못해 계속해서 가라앉고 있었다.

“화내지 마세요. 옛날이야기잖아요.”

“어떻게 화를 안 내? 그 개새……아니, 그놈들 얼굴은 기억이 나?”

“아뇨. 어두워서 제대로 보지도 못했어요.”

“지금은 괜찮으신 거죠, 아가씨?”

“말했잖아, 루. 옛날이야기라니까.”

하지만 양옆의 두 남자는 괜찮다는 대답을 딱히 믿지 않는 것 같았다.

어떤 대답을 해도 불난 집에 기름 붓기 꼴인 듯해서, 이리아는 그냥 주제를 돌려 버리기로 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그녀의 눈에 술병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들어왔다.

특히나 술 수입량이 많고 애주가가 다수인 비센티움에는 모든 나들이가 ‘술집’으로 시작해서 ‘술집’으로 끝난다는 설이 있다. ‘비센티움인이 술집을 그냥 지나치랴’라는 속담까지도.

분명 비센티움인들이 술을 사랑하는 건 사실이나, 길거리에서 저리 대놓고 술병을 들고 다니는 이는 거의 없다고 들었다. 길거리에서 병나발을 부는 사람들이 있으면 거리 치안을 위해 정찰병들이 잡는다고 알았는데.

“행사가 있는 날이니 그냥 눈감고 넘어가 주는 거야. 정찰병들도 이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는 않겠지.”

이리아가 화들짝 놀라 옆을 돌아보니, 입술 양 끝을 올려 웃고 있는 덱스터가 보였다.

가끔 덱스터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질문에 답을 던질 때면, 이리아는 그녀 자신도 모르게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새빨간 머리카락 사이서 조그마한 땀방울 하나가 나와 관자놀이를 타고 또르르 흘러내렸다. 당황해서 흘린 땀은 절대로 아니었다.

한여름을 맞아, 날이 너무 더웠다.

셋 중 둘은 순수한 혈통의 루퀼렘인이다. 루와 이리아는 술을 사랑하는 비센티움 사람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어쩌다 보니 더위를 피해 술집에 들어가게 되었다.

덱스터와 함께 갔던 술집만큼은 아니었지만, 술집의 분위기는 퍽 괜찮았다.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가 가운데 있고, 샛노란 조명과 프리즘이 앞을 밝혀 주는 바(*bar)였다.

이리아가 의자에 궁둥이를 붙이기 무섭게, 루 아휜과 덱스터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도수 있는 술은 안 돼.”

“밖에서 음주는 안 돼요, 아가씨.”

잔소리꾼은 한 명으로도 충분했는데. 루 아휜과 덱스터가 닮았다고는 수없이 생각했건만, 이 부분까지 닮았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리아는 한숨을 삼키며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드카 마티니(*Vodka Martini: 보드카를 베이스로 하는 마티니, 도수가 높은 편의 술) 두 잔과 라임 모히토(*Mojito: 칵테일의 하나) 한 잔이 나왔다. 올라오는 독한 알코올의 냄새만 맡아도 어떤 술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가 있었다.

이리아의 모히토는 단순한 과일 음료 수준이었다. 짙은 라임 향이 올라오는 모히토를 홀짝이는 그녀의 시야 속에 순간, 엉성하게 튀어나온 블라우스 끝이 들어왔다.

‘이런…….’

지난주까지만 해도 블라우스는 가터벨트로 고정했었는데, 여름이 되니 땀이 차서 가터벨트 착용도 쉽지가 않다.

가터로 고정하지 않은 탓에 걸을 때마다 블라우스 끄트머리가 치마를 빠져나왔다. 군부대에서는 셔츠가 늘어지든 찢어지든 아무렴 괜찮았지만, 세상 멀끔한 남자 둘 사이에 끼어 있으니 옷소매 하나마저도 신경 쓰게 되었다.

이리아가 슬그머니 몸을 일으키자, 루가 물었다.

“어디 가세요, 아가씨?”

“화장실. 옷을 좀 정리해야 할 것 같아서…….”

흐려지는 이리아의 말끝을 들은 덱스터가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치켜들었다. 그녀는 이미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를 대고 도망간 전적이 한 번 있는 여인이었다.

“금방 돌아와야 해.”

이리아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 아휜도 함께 있는 이 상황에서는 도주를 해 봤자 금세 잡히고 말 거다.

그리고 애초에 그녀는, 더는 덱스터 하워드에게서 도망칠 생각 따위 없었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