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7화 (78/109)

77화

온 저택의 분위기가 떠들썩한데도, 이리아만은 평소보다 더더욱 기운이 없는 듯했다.

덱스터는 빨간 곱슬머리를 휘날리며 정원의 말들을 구경하는 그녀를 빤히 응시하다가, 자그마한 손등 위에 살포시 입을 맞추었다.

“정말 즐거울 거야. 장담할게.”

덱스터가 입 안에 박하 잎을 머금고 있는 탓에, 그의 입술이 닿아 오자 시원한 기운이 손등 널리 퍼져나갔다. 덱스터의 숨결이 간지러워, 이리아는 순간 희미하게 어깨를 떨었다.

창밖으로 막내아들의 손을 잡은 채 정원을 가로질러 오는 루시어스가 보였다. 그는 곧 아들과 함께 집무실로 들어올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리아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창틀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녀가 발걸음을 내딛기 무섭게, 근육이 두드러진 팔이 허리를 감아 왔다.

“……아!”

이리아는 그대로 당겨져 덱스터의 품에 폭 파묻혔다.

한껏 당황한 이리아가 고개를 돌리자, 그녀의 어깨에 턱을 올리고선 씩 웃고 있는 덱스터가 보였다. 양 보조개가 전부 드러날 만큼 짙은 웃음이었다.

“따…… 따로 더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세요?”

“응. 우리 어젯밤에 가장 중요한 것을 하나 빼먹었잖아.”

빼먹은 것? 이리아는 잠시 머리를 굴리다가, 이내 그의 말뜻을 깨닫고 탄식했다.

이어, 그녀가 소심하게 볼멘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조금 전에 이마에 하셨잖아요.”

“그건 안 세는 것으로 하면 안 될까?”

이마에 했잖아. 덱스터가 웃으며 덧붙였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이리아의 두 눈 속에는 약간의 망설임이 있었지만, 정염도 함께 있었다.

이윽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운 손끝이 덱스터의 뺨에 천천히 닿아 왔다.

바로 앞에서 제 얼굴을 쓰다듬는 이리아를 홀린 듯 바라보던 덱스터는, 그녀가 입을 맞춰 오고서야 두 눈을 감았다.

그녀의 성격대로, 이리아의 키스는 언제나 상냥하고 소심했다. 마치 서로의 코를 맞대는 고양이들처럼, 이리아는 제 입술을 덱스터의 입술 위에 가만히 포개고만 있었다. 간혹 아랫입술을 살짝 깨무는 것만이 그녀가 할 수 있는 가장 우악스러운 키스였다.

하지만 덱스터는 아니었다. 그는 닫혀 있는 입술을 억지로 벌리고, 잇새를 파고들었다. 맞붙은 서로의 입술 안쪽으로 자신의 숨결을 불어 넣어 이리아의 숨결에서도 독한 박하 향이 나도록 만들었다.

그래, 마치 지금처럼.

“으, 흐으…….”

덱스터의 옷소매를 부여잡고 있는 손이 파르르 떨렸다. 덱스터는 신음성을 흘리는 이리아의 목덜미를 괜찮다는 듯 어루만져 주면서도, 계속해서 그녀를 몰아붙였다.

입 안을 헤치고 있는 살덩이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다. 결국, 숨통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만 이리아가 옷소매를 잡아당겼을 즈음에야, 덱스터는 그녀를 놓아주었다.

할딱이는 이리아의 호흡 안쪽에서부터 은근한 박하 향이 퍼져 나갔다. 덱스터는 계속해서 그녀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달아오른 뺨에 자잘한 키스를 해 주었다.

그가 어지러워 힘겨워하는 이리아의 귓가에 감미롭게 속삭였다.

“한 번 더 할까?”

“루, 루시어스 씨가 올 것 같아요…….”

“안 와. 안 올 거야.”

그렇게, 이리아는 마지못해 또 한 번 덱스터에게 입술을 내어 주어야 했다.

덱스터와 키스를 하고 있으면 세상에 이리아와 그, 단둘만 남은 느낌이었다. 몸의 온 신경이 덱스터를 향하며, 그의 손바닥이 닿아 있는 옆구리가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화창한 태양이 내리쬐는 밖에서 새들이 지지배배 울고 있는데도, 들려오는 건 서로의 혀와 타액이 진득하게 섞여 드는 소리뿐이다.

“으, 읏…….”

숨이 찬 이리아가 덱스터의 어깨를 주먹으로 콩콩 때렸다. 덱스터가 입술을 떼니, 허공에서 하얗고 가느다란 실이 늘어지다 끊겼다.

이리아가 애처롭게 할딱이며 한 글자 한 글자 힘겹게 내뱉었다.

“더는…… 더는 못 해요.”

“이런. 두 번은 더 하고 싶었는데.”

“숨 막혀 죽을 것만 같아요, 공…….”

겨우 키스만 했을 뿐인데도, 이리아의 꼴은 단번에 엉망이 되었다. 그녀는 덱스터가 손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고, 젖어 반들거리는 입술을 닦아 줄 때까지 하염없이 호흡만 가다듬어야 했다.

덱스터는 나머지 두 번은 저녁으로 미루어야겠다는 말을 속삭이고선, 이리아를 미련 없이 놓아주었다. 이리아는 그가 또 허리를 붙들기 전에 후다닥 집무실을 도망쳐 나왔다.

‘하워드 공의 기세를 도무지 따라잡을 수가 없어…….’

복도를 돌아다니는 사용인들의 시선이 괜히 신경 쓰여, 이리아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진하게 달아오른 얼굴을 보여 주기가 너무 창피했다.

덱스터와 지내면서 이리아는 그에 관해 많은 걸 알게 되었다. 덱스터는 오른손잡이보다 왼손잡이에 가까웠고, 빨간색보다는 파란색을 더 좋아했다. 피로보다는 허기를 참기 힘들어하며, 복수보다는 정의의 수호를 사랑했다.

그리고 방금의 키스로 알게 된 또 다른 사실 하나.

덱스터는 밤보다 아침이 더 격했다.

***

대륙을 떠돌던 마법사들이 하나둘씩 모여 형성된 루퀼렘 왕국은 개국 군주가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루퀼렘 왕국민들의 이주를 이끌었던 대마법사 엘드리지를 개국 군주 정도의 높은 위치로 대우하긴 했으나, 단지 그뿐이었다.

살아생전에도, 그리고 사망 이후에도 그는 루퀼렘의 거대한 발전을 도모한 ‘명망 있는 대마법사’로만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비센티움은 루퀼렘과 다르다. 비센티움인들은 힘을 추구하는 민족성을 지닌 데다가, 어려운 전쟁을 이겨 내기 위한 결속력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군인이자 개국 군주였던 던햄을 단순한 인간을 넘어 신적 존재로 대우하기 시작했다.

국교가 없다고는 하나, 실상 비센티움에서는 던햄 공이 곧 종교이자 신이었다. 그의 탄생일이 전국의 모든 도시에서 행사가 열리는 아주 중요한 날인 것만 봐도, 던햄 공이 비센티움인들에게 어떠한 존재로 인식되는지 잘 알 수 있었다.

비센티움의 국기는 짙은 보라색의 바탕 가운데에 검은 사자와 검이 그려져 있는 형식이다. 국기가 검은색과 보라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보니, 비센티움을 대표하는 색 또한 자연스레 그 두 색으로 정해졌다.

새해가 시작하는 1월 1일에 루퀼렘인들이 일부러 하얀 로브를 챙겨입는 것처럼, 던햄 공의 탄생일에 비센티움인들은 보통 무채색의 옷 위로 보라색 망토를 두른다.

로샨을 포함한 하녀들은 이른 아침 이리아를 치장하고선 곧바로 저택을 나서야 했다. 그들은 화려한 드레스를 입으면 돌아다니기 불편할 것이라며 이리아에게 단조로운 블라우스와 검은 치마를 입힌 후, 짧은 보라색 망토를 둘러 주었다.

이리아는 이른 아침 자신을 위해 따로 시간을 내준 하녀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그녀는 골반에 닿을 만큼 길어 버린 새빨간 곱슬머리를 손수 옆으로 땋아 내리며 방을 나섰다.

덱스터와 루 아휜 또한 보통 때보다 단조로운 옷차림이었다. 둘은 크라바트가 있는 검은 정장을 입고선 기다란 보랏빛 망토를 두른 상태였는데, 비센티움의 전통을 따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둘은 옷이 겹친다는 사실이 못내 불쾌한 듯했다.

이리아가 내려오기만을 기다리던 두 남자는 계단 양극단에 서서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는 중이었다.

“눈치가 있으면 지금이라도 빠지지 그래, 루 아휜?”

“눈치가 있기 때문에 꼭 붙어 다닐 겁니다. 제가 없는 사이 당신이 아가씨와 함께 도주할까 봐 심히 걱정되는군요.”

“도주라니. 너는 네 아가씨에 대한 믿음이 전혀 없나 보군?”

“아가씨는 믿습니다. 당신을 못 믿을 뿐이죠.”

계단 위에서 둘을 지켜보던 이리아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 소리를 듣자마자 덱스터와 루는 곧장 말싸움을 멈추고, 동시에 그녀를 돌아보았다.

이리아의 눈에 가장 먼저 띈 것은 단연 루의 머리카락 색이었다. 그의 머리와 눈동자의 색은 덱스터의 것처럼 새까맸다.

보통의 루퀼렘인들은 머리카락 색을 바꾸는 마법 하나마저도 힘겨워한다. 머리카락의 수가 수억 개인 데다가, 자라는 속도에 맞추어 매일 마법을 적절히 조절해야 하기 때문이다.

머리카락을 제외하고도, 외형을 바꾸는 마법은 여러 이유로 난도가 높다. 루 아휜도 루퀼렘인 특유의 창백한 피부색까지는 바꾸지 못했는지, 머리와 눈동자는 비센티움인 같았으나 피부색만은 여전히 루퀼렘인스러웠다.

덱스터는 이리아가 계단을 내려오자마자 참지 못하고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루의 표정이 돌을 씹은 듯 구겨졌으나, 다행히 빈정거리지는 않았다.

덱스터가 이리아와 함께 비센티움 도심을 돌아다닐 예정이라는 사실을 듣자마자, 루는 곧바로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둘에서 셋이 되니 당연히 오붓한 데이트는 진즉 물 건너갔다. 이리아는 마차 좌석에 마주 보고 앉은 두 남자를 발견하자마자 한숨부터 내쉬었다.

‘아아, 진짜 미치겠다…….’

이 마차는 대체 왜 4인용이며, 하워드 공과 루는 대체 왜 ‘간택’을 해 달라는 눈빛으로 날 쳐다보고 있는지.

이리아는 차라리 마부를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대신 앉아 마차를 끌고 싶은 기분이었다. 덱스터의 옆에 앉으면 루가 시비를 걸 게 뻔하고, 루의 옆에 앉으면 덱스터가 실망할 게 뻔했다.

같은 검은 머리를 가진 두 남자를 한참 번갈아 바라보던 그녀는 아주 긴 고민 끝에 자리를 선택했다.

[웃지 마, 루…….]

이리아가 작게 속삭이며 빙글대는 루 아휜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찔렀다.

덱스터에겐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가 실망하는 것보단 루가 시비를 걸어 둘이 싸우지 않는 게 이리아로서는 더 중요했으니까.

도로는 여느 때와 다르게 몹시 화려했다. 아직 도심으로 들어가지도 않았건만, 이리아는 인적이 드문 길목에서부터 요란한 장식들과 펄럭이는 비센티움 국기들을 볼 수 있었다.

분명 바로 옆에서 두 남자가 무시무시한 기 싸움을 벌이고 있는데도, 이리아는 창밖으로부터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생애 처음으로 경험하는 이웃 나라의 행사는 그녀의 가슴을 절로 벅차오르게 했다.

이리아는 도심에 도착하자마자 행복한 강아지처럼 두 다리를 들썩였다. 덱스터는 머리카락 색만큼이나 붉게 물든 그녀의 뺨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마차가 멈추기 무섭게 문을 박차고 뛰어내렸다.

그가 엉거주춤 마차에서 내리려는 이리아의 허리를 덥석 잡았다. 이제 덱스터의 손길에 꽤 익숙해진 이리아는 두 발이 땅에 닿을 때까지만 해도 깜짝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덱스터가 갑자기 자신을 가슴팍에 폭 파묻는 순간, 이리아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 하워드 공!”

“옆자리에 앉지 못했으니까 이 정도는 하게 해 줘.”

그는 이리아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그녀의 체향을 듬뿍 들이마셨다. 바로 뒤에서 루의 시선을 알아챈 이리아가 식은땀이 맺힌 손바닥으로 황급히 덱스터의 어깨를 두드렸지만, 그는 뺨에 키스까지 남긴 후에야 비로소 이리아를 놓아주었다.

귓가에 울리는 쪽, 소리가 그렇게 공포스러울 수가 없었다.

루 아휜의 시비가 문제가 아니다. 이리아는 세상 민망한 장면을 그에게 다 보여 버린 기분이 들며, 당장 쥐구멍에 숨고 싶어졌다.

그러나 이런 이리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덱스터는 그녀의 옆에 딱 붙어 두 걸음 이상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전부 지켜보고 있던 루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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