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이리아는 천당과 지옥을 번갈아 수십 번 드나들었다. 머리가 깨질 듯 아플 때마다 천사가 손을 흔들고, 배가 미치도록 울렁거릴 때마다 악마가 손을 흔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헛구역질을 시작한 이리아는 결국 속을 두어 번 게워 낸 후에야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녀는 로샨의 도움을 받아 속을 게워 내면서도, 덱스터가 이 모습을 보지 않아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루는 이리아가 아기였을 적부터 그녀와 함께했기에 험한 꼴들을 이미 다 본 상태지만, 덱스터는 아니기 때문이었다.
입 속까지 깨끗하게 행군 이리아는 기력이 다 사라져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가 가진 어젯밤의 기억은 루와 덱스터가 멱살을 잡던 부분에서 끝이 났다. 이후 무언가 커다란 소리가 들렸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으니 알 방법이 없었다.
설마 덱스터와 루가 또 싸웠던 걸까. 이리아는 자신의 횡포를 깡그리 잊은 채, 그 두 남자를 정말 제대로 한번 혼내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하지만 그녀가 마음을 정하기 무섭게, 로샨이 어젯밤 이리아가 소리를 질렀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내가 소리를 질렀다니. 이리아는 처음에는 믿지 않는 투를 보이다가, 로샨의 얼굴이 심각하니 믿을 수밖에 없어졌다.
그녀가 한껏 당황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제, 제가 소리를 질렀었다고요? 정말요?”
“네. 복도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들었는걸요? 너 몇 살이냐며 마구 소리 지르셨어요.”
“‘몇 살’……?”
그 두 남자에게 나이를 물어볼 이유가 대체 뭐가 있는지. 이리아가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보았지만,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뭐지……? 대체 어젯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지?’
설마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덱스터나 루에게 물어보아야 하는 건가. 그 둘에게 어젯밤에 관해 질문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니, 이리아의 얼굴은 절로 시퍼레졌다.
‘아, 안 돼.’
로샨이 소리를 질렀다고 하니, 둘의 앞에서 엄청난 추태를 부렸을 것이 분명했다. 차라리 모르는 게 약이라는 속담까지 있는 만큼, 이리아는 이번만큼은 술에 취해 기억을 깡그리 잊어버린 자신의 몸에 감사했다.
절대로 알고 싶지 않다. 그냥 평생 모르고 말겠어.
두어 번 속을 게워 낸 데다가 머리도 아픈 탓에, 이리아는 아침 식사를 어쩔 수 없이 걸러야 했다. 그녀는 식당에서 꿀을 한가득 탄 물만 벌컥벌컥 들이켜고선 바람을 쐬기 위해 곧장 정원으로 나섰다.
‘……퀸터가 있네.’
정원에서는 퀸터와 마야를 포함한 말들이 따뜻한 아침 햇볕을 쐬는 중이었다. 덱스터가 적어도 달에 두 번씩은 말들을 자유롭게 풀어 주기 위해 노력한다더니, 정원을 나도는 말들에게는 모두 고삐가 없었다.
루 아휜의 눈에도 역시나, 마야와 틸다는 닮았다. 루는 어디선가 얻어 온 당근을 마야에게 먹이며 그녀의 새하얀 갈기 위를 문질러 주고 있었다.
이리아의 시선을 알아챈 루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는 먀야의 주둥이에 남은 당근을 모두 물려 주고선, 누가 봐도 숙취로 고생한 듯한 얼굴의 이리아를 향해 작게 웃었다.
[아가씨, 이제 어엿한 성인이시니 제가 감히 음주하지 말라고 말씀드릴 수는 없겠지만…….]
그는 말을 하며 다가와 이리아의 뜨끈한 이마 위로 손등을 올렸다.
[적당히 마시는 법을 익히셔야 할 것 같네요.]
[너랑 하워드 공이 싸우지만 않았어도 적당히 마셨을 거야.]
[그렇다면 죄송해요.]
바로 앞에서 본 루 아휜은 언제나 그랬듯 숨이 멎을 정도로 곱고 아름다웠다.
어젯밤 덱스터와 멱살을 잡고 치고받은 흔적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기에, 이리아는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루 아휜은 지나치게 과잉보호를 하는 경향이 있는 데다가, 잔소리도 심했다. 이리아는 곧 쏟아질 루의 잔소리를 기다리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준비를 했지만, 예상과 달리 그는 딱 한 문장만을 내뱉었다.
[그 어렸던 아가씨께서…… 정말로 어른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이 어젯밤에 강하게 와닿았네요.]
루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감동과 더불어, 쓸쓸한 기운과 슬픔이 흠뻑 스며들어 있었다.
이리아가 조금 의아스러운 마음으로 루를 올려다볼 즈음, 저 멀리서부터 그를 부르는 다른 성기사의 외침이 들려왔다. 한참 깊은 황금빛 눈동자로 이리아를 응시하던 루는 나중에 보자는 말과 함께, 소리 없이 떠나갔다.
왜인지 평소와 다르게 루의 뒷모습이 무척이나 작아 보였다. 이리아는 아주 긴 시간 아득해지는 그의 뒷모습으로부터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얼굴을 때리는 시원한 바람 때문인지 아니면 오늘따라 이상한 루의 모습 때문일지는 몰라도, 머리를 아프게 했던 숙취가 완전히 깨 버렸다. 이리아는 뺨을 어색하게 긁적이며 다시 저택 내부로 들어갔다.
물론 저택에 들어가기 전, 마야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쓸어 주는 것은 잊지 않았다.
조금 전 로샨과 대화할 때도 언뜻 느꼈던 거지만, 저택의 분위기가 다른 때보다 제법 시끌벅적했다. 심지어 루인은 머리 위에 이상한 모자를 쓴 채로 더욱 이상한 장난감을 가지고 계단에서 뛰어놀고 있었다.
이리아는 상당히 신나 보이는 루인에게 치마 주머니에 있던 막대사탕을 건넨 후,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진 길을 거닐었다.
길의 끝에는 덱스터의 집무실이 있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 나누는 덱스터와의 입맞춤은 이제 하나의 일상이 되어 버렸다. 이리아의 여린 혀끝에 박하 향이 물들어 갈수록, 그녀는 점차 키스에 익숙해졌다.
입맞춤을 나누기 시작한 후 며칠 동안은 너무 부끄러워 아침에 덱스터의 얼굴을 못 보았었다. 하지만 키스가 익숙해지니 점점 부끄러움도 사라져, 눈을 뜨자마자 이리아가 먼저 그를 찾아가는 상황도 적지 않게 일어났다.
덱스터는 아침에 이리아를 만나면 양 뺨을 조심스레 감싸고선, 그녀가 혹시 간밤에 나쁜 꿈을 꾸었는지부터 살폈다. 그리고 만일 이리아가 악몽을 꾸지 않았다면, 좋은 아침이라고 인사하며 이마 위에 긴 키스를 해 주었다.
“하워드 공.”
“이리아.”
당연히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침마다 덱스터의 키스를 받고 있으면, 세상에 반드시 존재해야 할 소중한 사람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루 아휜마저도 채워 주지 못한 가슴의 한 부분을 그가 가득히 채워 주는 느낌이었다.
덱스터는 조금 긴 입맞춤을 끝내고선 열이 올라 따뜻해진 이리아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문질러 주었다.
그가 새빨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물었다.
“몸 상태는 어때?”
“괜찮아요.”
걱정했었는데 다행이네. 덱스터가 나직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이처럼 자신을 따라 웃는 이리아를 한없이 간절한 눈으로 바라보던 그는, 이리아의 엄지에 끼인 금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리아, 당신 정말로 이제 술을 적당히 마시는 법을 익혀야…….”
“하워드 공과 루가 싸우지만 않았어도 적당히 마셨을 거예요.”
“……그렇다면 미안.”
참, 아무리 봐도 하워드 공과 루는 외모를 제외하고는 전부 비슷하단 말이지.
만일 어젯밤 루와 싸웠다면 꼴이 말이 아니었을 텐데, 덱스터 또한 루처럼 흠 하나 없이 매우 멀쩡했다. 그는 오히려 평소보다 더욱 온화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럼 어젯밤에는 정말로 나만 소리를 지르고 아무 일도 없었던 건가. 왜인지 속이 쿡쿡 찔린 이리아는 치맛자락을 어색하게 만지작거리고선 집무실 창틀에 걸터앉았다.
정원에서는 여전히 말들이 여름꽃들을 뜯어먹고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이리아는 퀸터의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는 마야를 구경하며, 입가에 작은 미소를 머금었다.
“오늘따라 저택 분위기가 상당히 들떠 있는 것 같아요.”
“다음 주에 태조(太祖) 던햄 공의 탄생일을 맞아 각 도심에서 행사가 열릴 예정이거든. 그래서 몇몇 사용인들을 제외하고는 모두에게 하루 휴가를 줬어.”
“행사요……?”
말끝이 흐려지며, 이리아의 미소가 순식간에 희미해졌다.
그녀가 천천히 덱스터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덱스터는 등을 돌리고 있었기에, 그의 얼굴을 도통 확인할 수가 없었다.
덱스터의 거대한 등허리를 바라보는 두 녹빛 눈동자가 서슴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덱스터는 과묵한 성격임에도, 이리아의 앞에서만은 꽤 수다스러웠다. 바깥세상에 관해 잘 모르는 이리아에게 이것저것 가르쳐 주려는 것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그저 그녀와 긴 대화를 하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왜 행사가 있다고는 말을 해 주지 않았지……?’
이리아가 루퀼렘 성에 있었던 시절에는 바깥세상에 관한 그녀의 관심을 끊기 위해 루퀼렘인들이 일부러 행사나 축제를 알려 주지 않는 경우들이 있었다.
혹시 덱스터도 그런 걸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리아의 생각이 불안감을 무럭무럭 키울 즈음, 덱스터가 뒤를 돌아보았다.
덱스터는 창백하게 질린 이리아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당황한 낌새를 감추지 못했다. 그가 눈썹 사이를 살짝 찡그리며 물었다.
“혹시 당신도 행사에 가고 싶은 거야?”
“……제가 가고 싶다고 하면 가게 해 주실 건가요?”
“그럼 당연하지. 못 해 줄 이유가 없잖아. 나는 당신이 행사에 큰 관심이 없는 줄 알았어.”
아, 내 괜한 의심이었구나. 긴장했던 이리아의 어깨에서부터 스르르 힘이 빠졌다.
덱스터가 다가와 창틀에 함께 앉자, 평소보다도 더 독한 박하 향이 순식간에 훅 끼쳐 왔다. 그는 치맛자락을 휘어잡고 있던 탓에 새빨갛게 변한 이리아의 손을 부드럽게 마주 잡았다.
“그런데 연례행사는 루퀼렘에서도 많이 참여해 보지 않았어? 루퀼렘은 우리보다 연례행사를 훨씬 더 크게 여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참여해 본 적 없어요. 저는 이른 새벽에 여왕님과 축사만 읽은 후에 곧바로 성으로 돌아가야 했거든요.”
연회에서 춤 한 번 제대로 춰 본 적 없는데, 축제에 참여해 보았을 리가 없다.
이리아는 손바닥을 어루만지는 덱스터의 온기를 느끼며 슬피 웃었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