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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76/109)

75화

바보처럼 손을 더듬거리며 술병을 따려는 이리아를, 뒤늦게 정신을 차린 덱스터가 막아섰다.

그가 휘청이는 이리아의 허리를 능숙히 붙잡으며 일렀다.

“그만 마셔, 이리아. 당신 숙취 심하잖아.”

“싫어! 너…… 너희 둘이 화해할 때까지 마, 마실 거야!”

“……화해?”

덱스터와 루의 미간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이리아는 덱스터의 팔 안에 반쯤 대롱대롱 매달린 채, 둘을 손가락으로 번갈아 가리켰다.

“두, 둘이 당장 손잡고 미안하다고 서, 서…… 서로한테 사과해…….”

“난 절대로 못 해.”

“아가씨, 그것만은 안 돼요. 미안하다는 말은 둘째치고, 저 야만인이랑 어떻게 손을 잡아요?”

그럼 하지 말든가. 이리아가 중얼거리며 코르크 마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둘이 ‘화해’를 하지 않는다면, 언제까지고 연거푸 술을 들이켤 모양새였다.

방 안은 이미 엉망이 된 지 오래였고, 덱스터의 팔에 매달려 있는 이리아는 정상이 아니었다. 일단 난장판이 된 이 상황을 수습해야 한다는 생각에, 루와 덱스터는 처음으로 한뜻이 되어 시선을 교환했다.

이리아는 어느새 병 끄트머리를 귀엽게 물고 있었다. 덱스터가 그런 그녀를 살짝궁 흔들며 말했다.

“알겠어, 할게. 할 테니까, 제발 그만 마셔.”

정말로 마시고 있었던지, 이리아는 병을 놓자마자 거칠게 딸꾹질했다. 그녀는 힘겹게 헐떡이면서도, 두 남자의 ‘화해’ 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놓치지 않았다.

난장판이 된 방 한가운데서, 덱스터와 루는 서로를 노려보며 악수했다.

“전혀 미안하지 않지만 미안하군, 루 아휜.”

“전혀 죄송스럽지 않지만 죄송합니다, 덱스터 하워드.”

이리아는 두 남자가 각자의 오른손에 핏대가 오를 만큼 힘을 주고 있다는 사실 따위는 꿈에도 몰랐다. 바보가 되어 버린 그녀는 드디어 둘이 사이가 좋아졌다는 생각에, 아이처럼 싱글벙글 웃을 뿐이었다.

나중에 콘라드 메이필드를 만나면 이 역사적인 순간을 꼭 말해 줘야겠다. 이리아는 술기운이 사라지면 곧바로 잊힐 엉뚱한 다짐을 하며, 뺨을 감싸는 덱스터의 손길을 가만히 받아들였다.

이리아의 얼굴은 술에 진탕 취한 사람이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몹시 불그스름했다. 단숨에 기분이 좋아진 이리아는 덱스터가 루의 앞에서 눈꺼풀을 매만지고 있음에도, 핀잔을 주지 않았다.

“당신 많이 취했어. 이만 들어가서 자자, 이리아.”

“안 돼. 치, 침실까지 못 가…….”

“갈 수 있어. 데려다줄게.”

덱스터는 절대로 못 간다며 칭얼거리는 이리아의 허리를 잡아 둘러업어 버렸다. 그는 뒤통수를 찌르는 루 아휜의 눈초리마저도 간단히 무시하고서는, 이리아를 대부인의 침실로 데려갔다.

방금까지 루가 함께 있었기 때문인지, 술에 취한 이리아는 다른 때보다 더더욱 어린아이가 되어 버렸다. 어렸을 적 루의 앞에서 했던 것처럼, 덱스터에게 잠자리에 들기 싫다고 떼를 쓰던 그녀는 로샨이 들어오고 난 후에야 잠잠해졌다.

덱스터는 희미하게 딸꾹질하는 이리아의 이마 위에 부드러운 키스를 남긴 후, 루 아휜에게로 돌아갔다. 한때 난장판이었던 방은 그의 마법으로 인해 말끔해진 상태였다.

덱스터가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체스 말들을 하나하나 세우고 있던 루는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선 질문했다.

“아가씨는요?”

“잠자리에 들었어.”

조금 전 체스를 두었을 때처럼, 덱스터는 루의 맞은편에 앉아 남은 술병 하나를 땄다. 이리아는 아직 단 한 번도 마셔 본 적 없는 칼바도스(*Calvados: 사과를 원료로 하는 브랜디의 한 종류)였다.

덱스터가 유리잔 가득 술을 채워 루 아휜의 앞에 들이밀었다.

“마셔.”

“저는 술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마셔. 마시지 않는다면 내가 직접 입에 처넣어 주겠어.”

루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유리잔 가득히 담겼던 술을 반 정도 입 속에 들이부었다. 그는 잔을 내려 두자마자 사납게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매일 이런 걸 마시고 사시는 겁니까? 비센티움인의 수명이 짧은 이유를 알겠군요.”

“조금 전에 못 봤어? 네 아가씨가 제일 좋아하시는 게 술이다, 뺀질아.”

루는 아무런 대꾸 없이, 남은 술까지 깡그리 마셔 없애 버렸다.

짧은 침묵이 흐르는 방 안에서, 덱스터는 그의 앞에 놓은 위스키병을 만지작거렸다. 방금까지 이리아가 입에 물고 있던 병이었기에, 그녀의 귀여운 손자국들이 여기저기에 가득히 찍혀 있었다.

보통의 비센티움인들은 열넷이나 열다섯 정도의 나이가 되면, 와인을 마시기 시작하여 음주를 상당히 이른 나이에 배운다. 일찍이 군대에 몸을 의탁했던 덱스터는 그보다도 더 빨리 술을 입에 대었기에,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술을 한 번도 마시지 않았다는 이리아의 말을 듣고 조금 놀랐었다.

사실, 술뿐만이 아니었다. 아주 오랜 시간 루퀼렘 성에 갇혀 지냈던 이리아는 비센티움에 나와 경험한 거의 모든 것들이 처음이었다.

덱스터는 언젠가 그가 이리아에게 어머니의 오래된 오르골을 보여 주었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녀는 뻔한 오르골조차도 무엇인지 알아보지 못해 한참 어리둥절해했었다.

이리아는 많은 것들을 궁금해하면서도, 성격이 소심해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기를 상당히 꺼렸다. 그렇기에 덱스터가 먼저 이것저것을 알려 주면 처음에는 기뻐하다가, 혼자서만 바보처럼 몰랐다는 사실을 깨닫고 속상해하기 일쑤였다.

한참 위스키병 위의 자그마한 손자국들을 따라 그리던 덱스터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하나만 묻자, 루 아휜. 네가 전에 이리아에게 자유를 주지 못했던 사정이 있었다고 했잖아. 그 ‘사정’이란 게 대체 뭐지? 그 어린아이를 성에 일평생 가둬 놓았을 정도로 중요한 건가?”

“당신은 언제나 사건의 앞면만 알고 뒷면은 모릅니다, 덱스터 하워드. 루퀼렘 왕국민들을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아가씨께서는 절대로 성을 나가면 안 되셨었습니다.”

덱스터의 한쪽 눈썹이 그게 무슨 의미냐는 투로 삐딱하게 올라섰다. 그 모습을 본 루는 그답지 않게 비릿한 웃음을 흘리다가, 그에게 되돌려 질문했다.

“저도 하나만 묻죠. 당신이 보기에 루퀼렘의 무녀와 성기사들은 왜 존재하는 것 같습니까?”

“글쎄. 대마법사 이리아 아델리어를 지키려고?”

“아니요, 그 반대입니다. 아가씨로부터 세상을 지키는 겁니다.”

문밖에서 사용인들의 발소리가 들려오자, 둘은 잠시 대화를 멈추었다.

제 막내아들의 이름을 부르는 루시어스의 목소리, 그리고 루인의 웃음소리가 이어진 후에, 복도는 다시금 고요해졌다.

루의 나지막한 미성(美聲)이 복도만큼 고요했던 방 안을 재차 가득 채웠다.

“시간과 공간을 다루는 대마법사가 자칫 흐트러져 잘못된 마법을 발동한다면 자연의 모든 규칙은 무너지고 맙니다, 덱스터 하워드. 아가씨께서 잘못된 마법을 발동하려는 낌새가 보이면 곧바로 그녀를 저지하는 것이 성기사들의 주 업무입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아가씨를 지키는 게 아니라, 아가씨로부터 세상을 지킨단 말입니다.”

루는 말을 끝내자마자 그의 맞은편에서 술병만 바라보는 덱스터를 향해 조소를 내뱉었다. 덱스터는 당연히 그의 비웃음을 들었지만,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당신이 아가씨를 사랑한다는 사실은 잘 알겠습니다, 덱스터 하워드. 하지만 아무리 아가씨를 깊이 사랑한다 해도, 당신은 절대 그분과 함께 있지 못합니다. 아가씨 본인조차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마법은 대체 어떻게 감당해 내실 겁니까?”

“감당하지 못한다니, 웃기지 마. 이리아는 그 위험한 전쟁터에서도 마법을 쓰지 않았었어.”

“하지만 밖으로 나와서 쓰셨죠. 비센티움 도심 한가운데서 시간을 멈추셨잖습니까.”

“그건 내 불찰이야. 앞으로 이리아가 비센티움에서 마법을 쓰는 일은 없을 거다.”

“칼을 잡는 군단장이라 그런지, 참 근거 없는 자신감이 넘치시는군요. 여신도 맹세하지 못하는 미래를 겨우 한낱 인간이 어떻게 확신한단 말이죠?”

루가 말을 하며 그의 겉옷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작고 푸른 보석이 끝에 달린 은줄의 목걸이였다.

“이건 루퀼렘 왕실이 보관해 두었던 가장 강한 봉인석입니다. 대마법사 엘드리지 님께서 기나긴 세월 공을 들여 만들어 내셨죠.”

루가 목걸이를 던지고, 덱스터는 날아오는 목걸이를 허공에서 가볍게 낚아챘다.

“마법을 인위적으로 억누르는 역할을 합니다. 부작용이 있기에 단 한 번도 제대로 사용해 본 적은 없지만…… 효과는 분명 뛰어납니다”

확실히, 마법에 대해서 잘 모르는 덱스터가 보아도 목걸이 끝에 달린 보석은 평범하지 않았다. 햇빛을 비추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마법으로 만들어진 보석의 안쪽에서는 무지갯빛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사실 루는 술기운 때문에 반쯤 충동적으로 목걸이를 던져 버린 듯했다. 그는 설령 세상이 무너져도, 덱스터에게만은 절대로 저 봉인석을 주고 싶지 않았다는 표정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미 준 걸 다시 뺏을 순 없는 노릇이다. 루가 창백한 얼굴을 거칠게 문지르고선, 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일렀다.

“아가씨께서…… 진실로 당신을 사랑하여 비센티움에 머물겠다고 하시면, 아무리 싫어하셔도 아가씨의 목에 반드시 그 봉인석을 채우셔야 합니다.”

“이걸 차면 빨간 머리로는 다시 못 변하는 건가?”

“예. 어차피 루퀼렘인의 모습을 드러내는 건, 이곳에서 살기 위해 아가씨께서 반드시 견뎌 내야 하는 과정 중 하나입니다.”

“이리아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겠군.”

“아가씨께서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되는 일입니다.”

루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새하얀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넘기며, 목걸이를 쥐고 있는 덱스터를 못마땅히 흘겼다.

[물론, 당연히 그럴 일은 없겠지만.]

루는 가벼운 조소를 끝으로, 방을 완전히 나가 버렸다.

홀로 남은 덱스터는 루가 닫고 나간 방문을 빤히 바라보다가, 나직이 한 문장을 중얼거렸다,

“저 존댓말 뺀질이 새끼…….”

덱스터는 위스키병의 코르크 마개를 따 이리아가 물었던 병 끝을 똑같이 물었다. 그는 조금 남아 있던 술까지도 깔끔하게 해치운 후, 자리서 일어나 목걸이를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빨간 머리로 변하지 못한다면 이리아는 목걸이를 극히 꺼릴 게 분명했다. 비센티움에 계속 머물기 위해서는 봉인석을 반드시 차야 하는데, 어떻게 그녀의 목에 목걸이를 채울 수 있을까.

손아귀의 목걸이가 조금 무겁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덱스터는 봉인석에 관해 곰곰이 고민하며 루를 따라 방을 나섰다.

하지만, 그는 다음 날이 되어 깨어난 이리아를 보자마자 주머니 속 봉인석은 잠시 잊고 말았다.

봉인석보다도, 그녀의 숙취가 더 문제였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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