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4화 (75/109)

74화

15.

대체 왜 상황이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이리아는 그녀의 좌우에 궁둥이를 붙인 두 남자를 몇 차례고 번갈아 바라보았다. 루와 덱스터는 사이에 커다란 체스판을 둔 채, 서로를 죽일 듯 노려보는 중이었다.

‘아, 가혹한 여신이시여…….’

어쩌다 보니 두 남자 사이에 껴 고래 등에 터지는 새우 꼴이 된 이리아는 술만 홀짝거렸다. 둘을 보고 있을 때마다 목이 타 술을 마시지 않고야 버틸 수가 없었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최근 자수에 빠진 이리아는 로샨의 손수건 위에 커다란 장미꽃 한 송이를 수놓아 준 후, 자수를 쉬기로 결심했다. 자수에 질린 건 아니었지만, 슬슬 손과 눈이 아프기 시작해 잠시 그만두는 게 좋을 듯했다.

원래의 예정대로였다면, 이리아는 이맘때쯤 웨딩드레스와 결혼식 준비로 매우 바빴어야 했다. 하지만 루 아휜과 덱스터의 약조로 인해 결혼식이 미뤄진 바람에, 그녀는 지금 인생에서 가장 한가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그렇게 이리아가 한창 복도를 천천히 거닐고 있을 때, 덱스터가 체스판을 들고 그녀를 찾아왔다.

이리아는 군부대에 있을 때 체스를 두던 몇몇 간호사들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체스가 상당히 재미있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그녀는 체스를 가르쳐 주겠다는 덱스터의 말에 흔쾌히 좋다고 대답했다.

덱스터는 이리아에게 체스를 가르쳐 주면서도, 서로 말을 하나씩 잃을 때마다 술을 한 잔씩 마시자는 조건을 걸었다. 술을 빨리 마시는 나쁜 버릇도 고칠 겸, 이 기회에 그녀의 주량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둘의 평화로운 체스 게임은 루 아휜의 침범으로 머지않아 끝이 나고 말았다.

루는 며칠 전의 대화 이후로, 이리아가 그에게 살짝 화가 났다는 사실을 금세 알아차렸다. 그는 덱스터보다도 이리아를 훨씬 잘 알았기에, 온갖 노력을 선보이며 이리아의 화를 쉽게 풀어냈다.

그는 나이 이백이 넘은 루퀼렘의 성기사단장답지 않게, 강아지처럼 이리아를 졸졸 따라다녔다. 늦은 저녁이 아닌데도 만일 이리아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녀를 찾아 온 저택을 샅샅이 뒤지기 일쑤였다.

이날도 사실 루는 이리아를 찾아 저택을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덱스터와 함께 체스를 두며 술을 마시는 그녀를 발견하자, 냅다 둘 사이에 끼어든 것이다.

체스를 처음 배우는 이리아의 하얀 말은 검은 말에 비해 수가 턱없이 부족했다. 차마 루퀼렘의 대마법사가 비센티움의 군단장에게 지는 모습을 두 눈 뜨고 볼 수 없던 루는 그녀 대신 말을 잡았다.

루가 대신 말을 잡으니 화를 낼 줄 알았던 덱스터는 예상외로 조용했다. 그의 두 새까만 눈동자는 ‘오냐, 너 잘 걸렸다’라는 뜻을 담아 이글이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루는 이리아와 달리, 머리가 좋아 간단한 규칙만 알았음에도 체스를 상당히 잘 두었다. 그가 덱스터의 비숍(*Bishop) 하나를 무너뜨리며 말했다.

“머리가 나쁜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체스는 꽤 하시는군요?”

“그건 내가 할 말이야. 허약하게 생겨서 머릿속도 비실비실할 줄 알았는데, 체스는 또 제법 하는군.”

“미안하지만 저는 모든 방면에서 특출난 사람입니다, 덱스터 하워드. 검술과 사격에만 소질이 있는 당신과 다르게 말이죠.”

“거참 안타깝군. 이리아가 예의의 측면에서는 영 별로라고 말 안 해 주던가?”

아아, 목이 탄다…….

이리아는 초점이 반쯤 사라진 눈을 하고서 바로 앞의 술만 홀짝거렸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데, 덱스터와 루는 서로에게 고운 말 따위 해 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이리아는 둘 중 누가 이겨도 난감하기에, 가운데서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루가 남은 또 하나의 검은 비숍을 잡으며 조소했다.

“이런, 곧 패배의 씁쓸함을 맛보시겠군요.”

“승패는 끝까지 두고 봐야 아는 법이야. 전쟁을 한 번도 경험하지 않은 자의 티가 나는군, 루 아휜.”

“전쟁의 경험은 자랑이 아닙니다. 오히려 부끄럽게 생각하셔야죠.”

“참 우스운 말이네. 나라를 위해 한 몸을 바친 것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하나?”

“패전국의 입장 또한 헤아리는 것이 덕을 갖춘 성인(成仁)의 도리입니다.”

툭. 덱스터의 바로 앞 폰(*Pawn)이 루의 손길에 체스판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하긴, 당신은 덕을 갖추지 않았으니 패전국의 입장을 헤아릴 수도 없겠군요.”

일순간, 덱스터의 이마 위 핏대가 불거졌다.

혼자서 이미 럼 두 병을 해치워 버린 이리아는 어느덧 새로운 술병을 따고 있었다. 조금 독한 위스키인 듯했지만, 지금은 술의 도수 따위를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술 때문인지, 아니면 감기 기운이 다시 오르기 시작했는지는 몰라도,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지기 시작했다.

이리아가 한창 술잔을 새롭게 채우며 관자놀이를 문지르고 있을 때, 덱스터가 루의 하얀 퀸(*Queen)을 먹어 버렸다.

“이리아가 너의 말투를 배우지 않아 참 다행이구나, 하얀 뺀질아.”

“그 ‘하얀 뺀질이’라는 단어 좀 그만 쓰시면 안 되겠습니까?”

“네놈이 먼저 ‘야만인’이라는 단어를 그만 쓴다면 생각해 보지.”

“싫습니다.”

“그럼 나도 싫어.”

대화 수준이 참 유치하고 한심하구나. 이 두 남자는 정말로 서로 사이좋게 지낼 순 없는 건지, 이리아는 속으로 제발 둘 다 입을 닫았으면 좋겠다고 소망하며 술을 입 안에 들이부었다.

덱스터와 루가 만날 때마다 싸운다는 사실은 이리아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지난날 한 지붕 아래서 지내며 둘의 말싸움을 말린 적이 셀 수 없이 많았으니까.

루가 덱스터에게 만날 때마다 시비를 거는 이유가 이리아 자신 때문이라는 점은 잘 안다. 하지만, 비센티움에 머무는 것에 ‘조건’을 붙였다면 적어도 그와 싸우지는 말아야지.

이리아는 한참 다 자란 성인인데도 불구하고, 루와 덱스터가 어른스럽게 행동하지 못하고 티격태격할 때마다 피곤해 죽을 것만 같았다.

특히나 둘의 싸움을 더 피곤하게 만드는 부분은, 바로 이리아가 두 남자 중 그 누구의 편도 들어줄 수 없다는 점이었다. 덱스터와 싸우다가도 종종 루는 이리아가 자신의 편을 들지 않으면 시무룩한 낌새를 보였고, 이는 덱스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중립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리아를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은근한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피곤하고 짜증 나. 어린애들도 아니고, 둘 다 이게 무슨 추태야…….’

지금껏 가운데서 둘을 중재하며 쌓인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리아가 며칠 전 덱스터와 루가 또 한 번 서로의 멱살을 잡았던 사건을 곱씹으며 술을 따를 때, 루가 마침내 체크메이트를 외쳤다.

그가 거만하게 고개를 치켜들고선, 덱스터를 향해 비릿한 실소를 보였다.

“패배했군요, 덱스터 하워드. 참 멍청하게도 말이죠.”

“네가 말로 방해만 안 했어도 내가 이겼어, 하얀 뺀질아.”

“당신도 이 체스 말처럼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면 정말로 좋았을 텐데, 아쉽습니다.”

“루퀼렘의 성기사단장이라는 놈이 대마법사 앞에서 처리한다는 말을 내뱉는군. 루퀼렘의 교리와 규율이 너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나 보지?”

“성인이 되자마자 성을 나간 아가씨를 겨우 찾아냈더니, 이상한 외국인에게 코가 꿰여 원치도 않은 결혼을 앞두고 있으셨습니다. 이 상황에서 교리와 규율 따위가 제 눈에 들어올 것 같습니까? 마음만 같아서는 당신을 당장 능지처참하여…….”

아아, 두 남자 모두 너무 짜증스럽다.

취기가 오르며, 이리아의 속이 데일 듯 뜨겁게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끊임없이 술을 들이부은 그녀가 이름 모를 위스키병까지 깡그리 비웠을 즈음, 덱스터와 루는 테이블을 엎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금니를 악문 덱스터의 턱이 분노로 불끈거렸다. 그가 목에 핏대를 세우고선 루를 향해 짐승처럼 으르렁댔다.

“그래, 좋아. 이딴 말 게임은 집어치우고, 이만 제대로 된 싸움을 하자, 뺀질아.”

“좋습니다. 맞고 울지나 마십시오, 야만인.”

하지만 그렇게 둘이 또 한 번 멱살을 잡으려는 순간.

지난 며칠 새 쌓였던 스트레스와 더불어,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이리아의 가슴속 화산이 끝끝내 펑 폭발해 버렸다. 술 덕분에 소심했던 성격 위로 용기까지 생기니, 이리아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상태였다.

와장창. 테이블이 엎어지고, 술병들이 깨졌다. 체스판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흑백의 말들이 이리저리 튀었다.

반쯤 서로의 멱살을 잡았던 두 남자가 동시에 이리아를 돌아보았다.

테이블을 발로 밀어 버린 이리아는 제자리에 우뚝 서서 힘겹게 씩씩대고 있었다.

혼자서 얼마나 술을 마신 건지, 녹빛의 두 눈은 이미 정상인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이미 산발이 된 머리카락을 마구 쥐어뜯으며 고함을 질렀다.

“두…… 둘 다 조용히 좀 해! 너, 너희들 때문에 내…… 내가 죽겠어, 내가아-!”

언젠가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하겠다고 생각 중이기는 했지만, 이런 걸 생각한 건 절대로 아니었는데.

하지만, 이미 터져 버린 말문을 다시 닫기는 불가능했다.

이리아가 그녀의 머리카락 색만큼이나 새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덱스터를 휙 돌아보았다.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덱스터의 어깨가 크게 흔들렸다.

“너! 며, 몇 살이야?!”

“스…… 스물여덟…….”

“너는!”

“몇 년 전에 이, 이백을 넘겼어요.”

“나이가 그렇게 많은데도 애……애처럼 싸워? 너, 너희들이 무슨 두…… 두 살짜리 꼬맹이야?!”

“아가씨, 두 살은 말을 못 하고 옹알이를…….”

“조용히 해!”

이리아가 새된 목소리로 소리 지르자, 루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아아. 이리아가 거친 신음성을 흘리며 미친 듯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녀의 몸이 휘청이며 깨진 유리병 파편들이 신발 밑창에 마구 밟혔다.

이리아는 취기가 올라 새빨개진 얼굴을 거칠게 문지르고선, 덱스터와 루를 삿대질했다.

“너희 둘 때문에 내 머리가 너, 너무 아파. 너무 아…… 아프다고!”

“이, 이리아…….”

“만지지 마!”

이리아가 새된 목소리로 소리 지르니, 덱스터도 곧바로 손을 거두었다.

이리아의 잇새서 딸꾹질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가슴을 두드리며 힘겹게 딸꾹질하면서도, 횡설수설 제 할 말을 다 쏟아부었다.

“너희 둘은 치, 친절한 대화라는 걸 몰라? 꼭 서로를 그, 그렇게 물어뜯어야 소…… 소, 속이 편하니? 아,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말할 거면 입…… 입 닫고 살아! 그냥 입이 어…… 없다고 생각해, 알겠어?!”

“으, 응…….”

“알겠어요, 아가씨.”

참 어리석게도, 대답을 들은 이리아는 조금 안심한 듯했다. 숨을 힘겹게 들이마시는 입술이 일순간 살짝 길어진 것이다.

이리아가 보는 세상은 몹시나 느리게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그렇게 술을 들이켰는데도 또다시 목이 탄 그녀는 난장판이 된 방 안을 뒤져 새로운 위스키를 찾아냈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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