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루퀼렘은 현악기보다 관악기가 훨씬 발달한 나라이기에, 일평생을 루퀼렘에서 살아온 이리아에게도 현악기보다는 관악기가 더욱 친숙했다. 그녀는 덱스터가 기타를 연주하기 시작할 때까지, 여섯 개의 줄을 소심하게 한 번씩 툭툭 치기만 했다.
십 대 시절에 선임들에게서 ‘조금’ 배운 것 치고는, 덱스터의 연주 실력은 상당히 수준급이었다.
이리아는 그가 어떤 노래를 연주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지만, 방 안에 은은히 울려 퍼지는 선율과 분위기가 좋아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연주를 끝낸 덱스터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노래는 안 불러 주세요?”
“……나는 노래 부르는 데에는 큰 소질이 없어, 이리아.”
“그래도 듣고 싶은데…….”
덱스터는 손끝을 꼼지락거리며 말을 흘리는 이리아가 귀여워 돌아 버리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는 이미 두 번이나 입을 맞춘 뺨에 다시 한번 키스를 남기고선, 열이 올라 따뜻해진 목덜미를 부드럽게 문질러 주었다.
“그럼 당신 생일날에 한 곡 불러 주지. 생일이 언제야?”
“저는 새로운 해가 시작되는 1월 1일에…….”
“아니, 그 생일 말고. 당신의 ‘진짜’ 생일 말이야.”
‘진짜’ 생일. 이리아가 반사적으로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농담으로 한 말인 줄 알았는데, 덱스터의 표정은 짐짓 심각했다. 장난기 하나 없는 그의 새까만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있으니 괜히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이리아의 인생에서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진짜’ 생일을 물어본 이가 없었다. 모두가 법적으로 정해진 대마법사의 탄생일을 당연하게 생각했기에, 정작 그녀가 진짜로 태어난 날은 너무도 홀대받았었다.
이리아가 입가에 슬픈 웃음을 머금고선, 비밀을 전달하듯 조그마하게 속삭였다.
“저는 7월에 태어났어요.”
“한여름에 태어났군. 나와 정반대야. 나는 추운 겨울바람의 한복판에서 태어났거든.”
“루퀼렘에는 겨울에 태어난 아이가 더 강하다는 속설이 있어요.”
“이런, 여름에 태어난 당신이 몹시나 서운해할 속설이네.”
이리아가 속삭일수록, 덱스터의 목소리도 함께 작아졌다.
한참 이리아의 양 뺨을 쓰다듬던 그는 자그마한 주름이 진 미간에 가볍게 입맞춤을 한 후, 자리서 천천히 일어났다.
“시간이 늦었어. 당신 이제 자야 해.”
이리아가 뒤늦게 본 시곗바늘은 이미 자정을 한참 넘어 달리고 있었다.
덱스터는 혼자서 돌아갈 수 있다는 이리아의 말에도, 부득불 침실까지 함께 가겠다고 우겼다. 하지만 이리아가 자야 한다던 그는, 도리어 침실에 도착한 후에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
첫 핑계는 머리를 정리해 준다는 것이었다. 이리아의 침대맡에 앉아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덱스터는 그 후에 얼굴에 속눈썹이 묻었다는 핑계로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고, 갑자기 손 크기가 궁금하다며 서로의 손바닥을 대보기까지 했다.
덱스터가 이리아의 고운 검지 끝을 같은 검지로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전부터 생각했던 건데, 당신 손은 정말 작아.”
“공이 큰 거예요.”
“내가 큰 건 맞지만, 당신이 작은 것도 맞아.”
몸의 어딘가가 작다는 말은 비센티움에 온 이후로 귀가 닳도록 들었다. 이리아의 양 볼이 둥그스름하게 부풀어 오르자, 덱스터는 나직이 웃으며 손등에 짧은 입맞춤을 해 주었다.
그러잖아도 짧았던 호롱불은 시간이 지나 전부 닳아져 버렸다. 덱스터는 이리아가 어두워진 사방에 당황하기 전에, 능숙히 그 옆 향초에 불을 지폈다.
이리아는 노란 그림자가 파도처럼 울렁이는 덱스터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다가, 반쯤 충동적으로 물었다.
“……저랑 비밀 하나씩 털어놓는 놀이 할까요, 공?”
“나는 더 이상 당신한테 말해 줄 비밀이 없어, 이리아. 이미 전부 털어놨거든.”
“그럼 저 혼자서 할게요.”
비록 이번에는 그녀 혼자서 비밀을 털어놓는 것임에도, 이리아는 덱스터의 비밀을 들었던 저번과 같이 두 눈을 꼭 감았다.
덱스터는 투명한 피부 아래, 푸르게 두드러진 이리아의 혈관을 천천히 따라 그리기 시작했다. 이리아는 왜인지 이 순간을 일전에 똑같이 경험한 듯한 느낌이 들자, 기분이 조금 오묘해졌다.
덱스터의 손끝이 팔 위의 예민한 피부를 은근하게 쓸고 지나가는 동안, 이리아가 나긋이 입을 열었다.
“8년 전의 루퀼렘 성 난간 아래서 하워드 공을 본 순간, 정말로 반가웠었어요. 외국인을 본 게 처음일뿐더러, 루가 아닌 사람과 대화를 나눈 것이 되게 오랜만이었거든요.”
덱스터의 손이 허공에서 잠시 멈추었다. 이리아는 머릿속으로 그의 표정을 상상하며 키득거리다가 이어 말했다.
“공이 어느 날부터 갑자기 나오지 않자, 방 안에 틀어박혀 온종일 울었던 기억이 있네요.”
다시 너무 외로워졌었거든요, 이리아가 구슬픈 목소리로 짧게 덧붙였다.
혈관을 따라 느껴지던 덱스터의 온기가 서서히 멀어졌다. 갑자기 팔이 허전해진 이리아가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는 찰나, 턱 끝에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와 닿았다.
덱스터는 바로 눈앞에서 이리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림자가 파도치는 이리아의 얼굴을 애타게 쓰다듬던 그는, 자그마한 턱에 몇 차례 더 입맞춤을 새겨 주었다.
이리아를 그 나름의 방법대로 위로하는 것이었다.
자신을 짝사랑하는 남자가 키스로 위로해 준다고 생각하니 이리아의 가슴 안쪽은 절로 간질간질해졌다. 양쪽 귀에 천천히 열이 오르기 시작하자, 그녀는 괜히 이불을 턱 바로 아래까지 끌여 올렸다.
덱스터는 자잘한 키스를 끝내자마자 다시 팔의 푸르스름한 혈관을 따라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손짓을 조심스레 이어 가며 잔잔히 울리는 이리아의 목소리를 들었다.
“공께서 해 준 말로 인해 스무 살의 가출을 결심하게 되었어요.”
“아아, 그 점은 나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어.”
“비록 처음부터 엉망이 되어 버리긴 했지만…… 7년 동안이나 열심히 준비한 가출이에요.”
“참 무모하기도 하지.”
덱스터가 희미한 보조개를 드러내며 나직이 웃었다.
비록 머리에는 까치집이 지어져 있고 옷도 후줄근했지만, 덱스터의 미모는 여전했다. 루 아휜이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남성이라면, 덱스터 하워드는 짙은 야성미를 풍겨 뭇 여성의 혼을 쏙 빼놓을 자였다.
두꺼운 붓으로 거침없이 그려 낸 미남. 비센티움의 최고 장인이 만들어 낸 조각상 같은 사람.
샛노란 촛불 때문에 덱스터의 잘생긴 이목구비가 더욱 두드러졌다. 이리아는 새삼 전쟁터에서 그를 처음 만났던 순간을 떠올리며, 소심하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사실 하워드 공을 처음으로 가까이서 보았을 때, 되게 자…… 잘생겼다고 생각했었어요…….”
아, 얼굴이 절로 화끈거린다.
덱스터는 어떻게 그리 예쁘다는 말을 숨 쉬듯 많이 하는지, 괜스레 부끄러워진 이리아가 이불을 머리 위까지 끌어 올렸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이불 밖에서부턴 아무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이리아가 살짝궁 이불을 내려 밖을 확인하니, 덱스터가 눈꺼풀도 깜빡이지 않은 채로 그녀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건……. 음, 전혀 예상치 못했던 비밀인데.”
그의 대답을 듣는 순간, 이리아의 얼굴은 급기야 툭 건들면 터져 버릴 만큼이나 새빨개졌다.
계속해서 이불 속에 숨어드는 이리아를 본 덱스터가 하하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는 새하얀 이불 위로 드러난 곱슬머리를 매만지며 감미롭게 속삭였다.
“고마워. 당신한테 들으니 너무 기분 좋은 칭찬이야.”
“이, 이제 이 놀이 그만할래요. 그만하고 싶어요.”
“그래.”
덱스터의 짧은 대답을 끝으로, 침실에는 잠시 짧은 침묵이 흘렀다.
덱스터는 이불 위로 볼록하게 튀어나온 이리아의 뒤통수를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그녀가 숨을 쉴 때마다 희미하게 오르내리는 이불자락마저도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그는 한참 이불 아래 숨어 있는 이리아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다가, 조심스레 이불 끄트머리를 들어 올렸다. 그저 이리아가 잠들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리아는 깨어 있었다.
덱스터는 숨겨져 있던 이불 안쪽을 확인하자마자 숨을 크게 들이켰다. 어둠 속의 이리아는 흐트러진 머리칼과 분홍빛으로 곱게 달아오른 뺨을 하고서,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두 남녀는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서로를 응시하기만 했다.
덱스터는 언제나 이리아가 저 작은 머리로 어떤 생각들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가슴 아픈 첫사랑을 겪으며 그녀의 생각을 읽기 위해 수없이 노력했지만, 이리아의 머릿속만은 그가 절대로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리고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덱스터는 말간 녹빛 눈동자를 끔뻑이는 이리아가 무슨 생각을 하는 중인지 전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재차 울렁이기 시작한 가슴을 느끼며 이불을 천천히 걷어 냈다. 그리고, 나직이 이리아의 이름을 속삭였다.
“이리아…….”
이리아는 그녀의 이름을 듣자마자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조금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는 듯했으나, 덱스터의 양 뺨을 감싸 쥐는 순간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무리 긴 시간이 흘러도 덱스터에게는 이리아의 머릿속이 여전히 미지의 세계였다. 하지만, 이리아는 아니었다.
그녀는 왜인지, 시간이 지날수록 덱스터의 생각이 훤히 보이는 것 같았다. 이제는 전쟁터에서 보았던 그 무섭고도 알 수 없던 군단장이 낯설게 느껴질 정도다.
덱스터가 오로지 그녀의 이름만을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이리아는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덱스터의 뺨을 조심스레 감싼 그녀는 곧, 그의 입술 위에 제 입술을 찍어눌렀다.
쪽, 하는 귀여운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졌다. 이리아는 살며시 눈을 피하며, 보조개를 보이며 웃고 있는 덱스터에게 물었다.
“이…… 이거 언제까지 해야 해요?”
“당신이 나와 함께 사랑에 빠질 때까지. 설마 루 아휜이 내세운 조건을 벌써 잊은 거야?”
“아녜요. 기억하고 있어요…….”
덱스터는 한껏 열이 오른 이리아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문지르고선, 그녀에게 되돌려 키스해 주었다.
키스는 짧았지만, 덱스터가 아랫입술을 조금 세게 문 탓에 여운이 길었다. 베개에 뒤통수를 폭 파묻은 이리아가 제 입술을 만지작거리는 동안, 덱스터는 그녀의 이마 위에 이어 입을 맞추었다.
그가 입술을 떼지 않은 채로 감미롭게 속삭였다.
“잘 자, 내 사랑.”
그리고 이 말을 끝으로, 덱스터는 조용히 방을 나섰다.
이리아는 이불을 다시 턱 끝까지 끌어 올리고선 닫힌 방문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알기로 덱스터 하워드는 지난 세월 내내 여러 군부대를 전전했다. 군대에 뿌리를 박고 산 탓에 여자를 사귄 적 없다더니, 인제 보니 순 거짓말인 듯했다.
그는 머리를 쓰다듬는 손짓과 입맞춤, 그리고 사랑한다는 말까지도 너무나 능숙했다.
이리아는 아직 입술의 온기가 남은 이마를 만지작거리며 탁상시계를 확인했다. 시계는 벌써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대체 언제 시간이 이렇게 되었는지, 화들짝 놀란 그녀는 곧장 몸을 웅크리고 잠을 청했다. 그리고 다행히, 이리아는 금방 깊은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그녀는 무척이나 오랜만에 꿈을 꿨다.
꿈속의 이리아는 군부대의 계곡에서 틸다의 목을 축이는 중이었다. 그녀가 한창 틸다의 목덜미 위에 새겨진 흉터를 매만지고 있을 때, 바로 뒤에서 단조로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발소리의 주인은 거대한 검은 군마와 함께 이리아의 옆에 섰다.
이리아는 아침 인사를 하기 위해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두 녹빛 눈동자는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강철 흉갑을 지나쳐, 거침없이 위로 향했다.
그리고, 덱스터의 새까만 두 눈동자와 맞닥뜨렸다.
꿈속의 이리아는 과거와 달리, 덱스터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전혀 다른 인종, 전혀 다른 색의 눈동자 색을 가진 두 남녀는 홀린 듯 서로를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하늘로 간 틸다가 옆에 있었기 때문인지, 덱스터가 더 이상 무섭지 않았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유가 무엇이든 덱스터와 눈을 맞추는 내내 꿈속의 그녀는 기분이 상당히 좋았다.
그렇게 덱스터의 저택에 온 이후, 이리아는 처음으로 행복한 꿈을 꿨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