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2화 (73/109)

72화

덱스터 덕분인지, 아니면 오랜만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하게 된 덕분인지는 몰라도, 이리아는 오후가 되니 상당히 기분이 괜찮아졌다. 마법석의 이야기를 들을 당시에는 너무나도 화가 났었는데, 뒤늦게 곱씹어 보니 그럴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마법석을 만들었던 건 사고를 예방하는 방법이었다 쳐도, 마물에 관한 이야기는 루퀼렘의 대마법사로서 쉽사리 넘어가기가 힘들다.

루는 분명 카즈웰 3세가 마물의 과거를 알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 말이 덱스터 하워드도 마물의 과거를 알고 있다는 뜻을 내포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하워드 공은 과연 마물의 과거를 알고 있을까.’

그는 지금껏 수많은 마물 대 토벌전을 거쳐 온 군인이었고, 수많은 후임을 마물로 인해 잃은 남자였다. 덱스터만큼은 반드시 마물의 과거에 관해 알아야 할 것만 같았다.

이리아는 덱스터에게 언젠가 마물에 관해 따로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식사 준비를 했다.

아침과 점심으로 죽을 먹은 탓에 오후 내내 배고팠던 이리아는 미리 양해를 구하고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저녁 식사를 했다. 음식으로는 두부로 만든 파스타와 산딸기 파르페(*parfait: 디저트의 일종, 각종 과일, 생크림, 시럽 등으로 아이스크림을 장식한 빙과)가 나왔다.

이리아는 거대한 식당에서 홀로 식사를 하며 덱스터와의 대화를 곱씹었다. 덱스터가 점점 루퀼렘인을 이해하려는 태도를 보이니, 그녀 자신 또한 비센티움인들을 따라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은 책임감이 들었다.

‘나도 활쏘기를 한 번 배워 볼까……?’

대다수의 비센티움인들은 기본적으로 사격과 활쏘기를 능통하게 한다. 전쟁터에서 사격을 억지로 배웠으니, 궁술 정도는 그녀가 먼저 나서서 배우고 싶었다.

많은 수는 아니었지만, 몇몇 루퀼렘인들은 신체 단련을 위해 어린 시절부터 활쏘기를 연마한다. 루퀼렘인들도 배우는 활쏘기 정도라면 루 아휜도 너그럽게 넘어가 줄 듯했다.

혼자서 파스타를 두 접시나 해치운 이리아는 기분 좋게 배를 두드리며 복도를 거닐었다. 왼쪽 발목을 진찰한 의사가 이제 가벼운 운동 정도는 가능하다고 했으니, 그녀는 오랜만에 저택을 빙 돌아 구경할 생각이었다.

‘하워드 공과 루에게 궁술을 배우고 싶다고 어떻게 전하면 좋을까?’

여러 상황을 가정하여 이런저런 고민을 하던 이리아의 귓가에 문득 악동들의 소란이 들려왔다. 루시어스의 막내아들과 루인이 복도에서 자신들의 몸뚱어리보다도 더욱 커다란 무언가를 구경하는 중이었다.

이리아는 처음에는 그들이 무엇을 구경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하다가, 이내 조그마한 신음성을 흘렸다. 둘은 다름 아닌 덱스터의 검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구경만 했으면 정말 좋았겠지마는, 장난기 가득한 아이들은 검집을 손끝으로 툭툭 건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본 이리아는 절로 식겁했다.

저 검은 대체 왜 저기에 세워져 있는 건지. 이리아가 황급히 두 악동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앞을 막아섰다.

그녀가 등 뒤로 검을 가리며 소리쳤다.

“만지면 안 돼요! 자칫하다 넘어질 수도 있잖아요!”

“몇 번 치는 것만으로는 절대로 안 넘어지던데요……?”

“그래도 안 돼요!”

이리아는 손을 뻗는 루인에게 재차 안된다고 윽박질렀다.

하워드 공은 위험하게 대체 왜 검을 이런 복도 한복판에 세우고 간 건지! 마음속으로 덱스터를 무섭게 나무라며, 이리아는 검을 다른 곳으로 옮기기 위해 검집을 품 안에 그러안았다.

그러나 참 이상하게도, 분명 열심히 힘을 줬건만 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

검이, 안 들린다……?

이리아가 아무리 더 세게 힘을 줘 봐도, 검은 절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너무 무거운 탓이었다.

검 하나도 제대로 못 드는데 도대체 활시위는 어떻게 당길 건지.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난관을 맞이한 이리아가 반쯤 공황에 빠진 사이, 멀리서부터 루 아휜과 덱스터가 옥신각신 실랑이하며 나타났다.

계속해서 싸우던 두 남자는, 복도 한가운데서 검을 두고 끙끙대는 이리아를 보자마자 동시에 새파랗게 질렸다.

“아가씨!”

“이리아!”

눈썰미 좋은 루 아휜은 검의 주인을 단번에 알아챘다. 그가 덱스터를 매섭게 노려보며 소리쳤다.

“당신은 무기 간수 하나도 제대로 못 합니까?!”

“빌어먹을, 급한 일이 있어서 잠시 세워 두었던 거야!”

덱스터가 신속하게 이리아의 두 손에서부터 검을 낚아채 갔다. 순식간에 제 가슴팍이 휑해진 이리아가 그를 올려다보았지만, 덱스터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이건 안 돼. 위험하잖아.”

“조심히 다루고 있었는데요……?”

“그래도 절대 안 돼.”

방금 루인에게 했던 말을 덱스터에게 똑같이 들으니, 이리아의 기분이 오묘해졌다.

루가 괴상한 얼굴을 한 이리아의 머리를 정리해 주며 잔소리를 시작했을 즈음, 옆에서 그 모든 상황을 가만히 구경하고 있던 루인이 덱스터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는 덱스터가 자신을 내려다보자,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런데 주인님, 이리아가 누구예요?”

그 순간, 덱스터는 루의 매서운 눈초리를 한 번 더 받아야 했다.

이리아가 반쯤 죽은 눈을 하고선 루의 잔소리를 듣는 내내, 덱스터는 꽤 능숙한 솜씨로 두 아이의 관심을 돌렸다. 루인이 어려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둘러대느라 밤새 진땀을 뺐을 터다.

검을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걱정을 샀기에, 이리아는 끝끝내 두 남자에게 궁술을 배우고 싶다는 말을 못 꺼냈다.

비센티움인인 덱스터는 허락한다 쳐도, 루는 궁술의 ‘궁’이라는 앞 글자를 듣는 순간 세상의 모든 활시위를 다 끊어 버릴 것만 같은 기세였다.

‘루는 내가 아직도 다섯 살짜리 어린애인 줄 아나 봐.’

참 지겨운 잔소리와 쓸데없는 걱정들이다. 겨우 루 아휜을 성기사들에게로 되돌려 보낸 이리아는 툴툴대며 대부인의 침실로 향했다.

이리아는 최근 취미로 자수를 놓기 시작했다. 꽃꽂이를 할 수 없다면 대신 자수라도 배워 두라는 루시어스의 말에 시작한 것인데, 생각보다 재미가 쏠쏠했다. 완성된 자수를 보면 가슴이 뿌듯하기도 했다.

그녀는 로샨이 가져다준 옷감에 유채꽃 두 다발을 수놓은 후에 잠자리에 들었다. 취침 시간이 되었다기보다는 피곤해서 침대에 누운 것인데, 이상하게도 쉽사리 잠이 들지 않았다. 최근 계속해서 약 기운에 힘입어 잠든 탓이 컸다.

향초도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이리아는 창밖에서 올빼미의 울음소리가 들릴 때까지 뒤척이다가, 결국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심심해…….]

하녀들에게 찾아가기에는 왠지 그들을 불편하고 부담스럽게 만드는 것 같아 싫다. 하지만 그렇다고 루 아휜에게 가고 싶지도 않다.

루는 이리아가 아기였을 때부터 규칙적인 생활을 고수해 왔기에, 이미 잠들었거나 만일 잠들지 않았다면 성기사들과 있을 게 뻔했다. 게다가, 아침에 나누었던 대화 때문에 이리아는 아직 루가 조금 미운 상태였다.

‘그러고 보니 하워드 공은 왜 밤에 날 보러 안 왔지…….’

루와의 ‘조건’도 있으니 왜인지 올 것만 같은 느낌이었는데.

참 이해할 수 없게도, 잠자리에 들기 전 그가 찾아오지 않으니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이리아는 아주 잠시 침대 위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주섬주섬 일어나 대충 겉옷을 껴입었다.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발목 때문에 걸을 때마다 신발 밑창이 바닥에 질질 끌렸다. 복도를 가로지르고 계단을 오를 때까지만 해도 거침없던 이리아는 덱스터의 침실 문 앞에 서자마다 얼음이 되었다.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덱스터의 침실 앞에 서니 그와 나누었던 깊은 입맞춤이 서서히 떠올랐다.

얼굴에 열이 오른 것을 알아차린 이리아는 잠시 돌아갈까 고민했다가, 냅다 문을 두드렸다.

복도는 올빼미의 울음이 울릴 정도로 고요했고, 그녀는 신발 밑창을 질질 끌면서 왔다. 덱스터가 자신이 오는 소리를 못 들었을 리 없었다.

그리고 역시나, 덱스터는 진작 문밖의 손님을 알아차린 채였다.

“이리아.”

호기롭게 침실까지 왔음에도, 막상 문이 열리고 덱스터의 모습이 나타나니 몸이 긴장되었다.

덱스터는 한창 자는 중이었던지, 새까만 머리 위에 까치집이 요란스레 지어져 있었다.

그는 아무 말 않고선 깊은 눈으로 이리아를 내려다보았다. 어느덧 고개를 푹 수그린 그녀가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속삭였다.

“그게…… 통 잠이 안 와서요.”

덱스터는 잠시 그녀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듯하다가, 뒤늦게 ‘아’라며 탄식했다. 그가 서둘러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이리아를 안으로 이끌었다.

언제나 호롱불 하나를 옆에 두고 자는 이리아와 달리, 덱스터는 완전한 어둠 속에서만 잠을 청했다. 너무나도 깜깜한 방을 맞이한 이리아가 당황한 낌새를 보이자 그가 곧장 등불을 켜 주었다.

같이 밤 산책을 하려고 했지, 침실에 들어올 생각은 아니었는데. 얼떨결에 방 한편에 마련된 쇼파에 궁둥이를 붙이게 된 그녀는 뒤늦게 문가를 돌아보았다.

방문은 이미 굳게 닫혀 있었다.

‘어어…….’

닫힌 방문을 확인하자마자 이리아의 입 안은 절로 바싹 마르기 시작했다. 긴장으로 손발이 오그라들고, 머릿속에서는 후회가 막심하게 몰려왔다.

대체 어떤 충동이 들어서 온 건지……. 괜히 왔나 보다.

이리아는 누가 봐도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 버린 상태였다. 덱스터는 잠시 멀리서 그런 이리아를 지그시 응시하다가, 방 창문을 활짝 열어 버렸다.

서서히 긴장이 풀리기 시작한 이리아는 다가오는 덱스터의 정수리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새까만 정수리 위에는 채 정리되지 않은 머리카락들이 이리저리 솟구쳐 있었다.

거울을 보고 제대로 정리하지 않는 이상, 저 까치집을 완전히 없애기는 불가능한가 보다.

이리아는 짧은 머리도 은근히 관리하기 힘들겠다는 생각을 하며, 자신의 새빨간 곱슬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덱스터는 아직 잠이 덜 깬 눈으로 제 뒤통수를 매만지는 이리아를 구경하고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그와 허공에서 시선이 딱 만난 이리아가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

“하워드 공은 하얀 머리보다 빨간 머리를 더 좋아하시겠죠? 하얀 머리는 너무 루퀼렘인다우니까…….”

“아니. 난 둘 다 좋아.”

약간 잠긴 듯한 웃음소리가 촛불이 은은하게 비치는 방 안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희미하게 어깨를 들썩이던 덱스터는 이미 엉망이 된 이리아의 새빨간 정수리를 가볍게 헝클어뜨렸다.

“솔직하게 털어놓자면, 루퀼렘인의 새하얀 머리카락은 별로 마음에 안 들어. 하지만 그 머리 색을 당신이 가졌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그는 이리아의 정수리에 손을 올린 상태로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조금 우악스럽게 머리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새빨간 머리는 정전기가 퍼져 순식간에 요란스레 부풀어 올랐다. 덱스터가 이리아와 눈높이를 맞추며 양 볼에 보조개가 질 정도로 씩 웃었다.

“뭐, 하얀 머리일 때는 이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조금 아쉽기는 해.”

“하, 하지 마세요…….”

이리아가 이리저리 머리를 수습해 보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이 곱슬머리는 한 번 엉망이 되면 원래대로 되돌리기가 참 어려웠다.

덱스터는 아주 가끔 입술 양쪽을 늘어뜨려 웃을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의 두 뺨 위로 숨겨져 있는 보조개가 나타나는데, 보조개가 있는 그의 얼굴은 약간 낯설면서도 천진난만한 아이 같아 정감이 갔다.

덱스터는 이리아가 자신의 보조개 자국을 빤히 보고 있다는 사실을 금세 알아차렸다. 그는 이리아에게 보조개를 자랑하듯 입술 한쪽을 길게 늘어뜨리다가,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이미 많이 경험했던 가벼운 키스인데도 불구하고 어두운 방에서 쪽,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자, 이리아는 괜히 민망해졌다.

그녀는 어찌할 줄 모르며 소심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낯선 물건 하나를 발견했다.

‘저건…… 설마 기타?’

저번에 덱스터의 침실에 왔을 때는 없던 기타가 침대 바로 옆에 세워져 있었다.

제국의 공작이자 군단장인 남자의 침실에 기타가 있다니. 이리아는 덱스터와 기타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기타를 구경하고 싶어졌다.

“잠시만 기다려. 가져다줄게.”

덱스터는 시시때때로 변하는 이리아의 관심사를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그는 뽀얀 뺨 위에 또 한 번 짧은 키스를 남기고서는, 기타를 가지러 거대한 몸을 일으켰다.

“기타 연주는 십 대 시절에 선임들에게서 조금 배웠어. 군인들의 출신이 가지각색이기에, 군대에서는 생각보다 이런 것들을 많이 배워.”

“비센티움 기타를 실제로는 처음 봐요.”

“한번 쳐 볼래?”

이리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가장 아래에 있는 줄을 살짝궁 튕겼다. 기타를 잘 모르니, 음이 제대로 맞춰져 있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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