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분출할 수 없는 분노가 속에서 차곡차곡 쌓여 가는 느낌이다.
이리아는 루의 만류를 무시하며 제 머리를 쥐어뜯다가, 그에게 화풀이하듯 거칠게 내뱉었다.
[그럼 루퀼렘어를 하던 마물은 대체 뭐야?]
[마물에 대해서는 훨씬 먼 과거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해요, 아가씨. 대마법사 엘드리지 님의 시대까지…….]
[상관없어. 당장 말해.]
머리가 잔뜩 엉망이 된 이리아가 루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마치 긴장을 푸는 듯, 루는 크게 심호흡을 한 뒤에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의 말대로, 이야기는 훨씬 먼 과거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비센티움 왕국과 팔런 왕국이 전쟁을 하고 있을 당시, 루퀼렘민들을 엘퀸즈 산맥 안으로 이주시켰던 대마법사 엘드리지의 시대까지.
마물은 예로부터 상당히 지능이 높은 생명체에 속했다. 그렇기에 대마법사 엘드리지는 마물을 가축화하면 생활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여겨, 루퀼렘 북부의 만년설에 서식하던 마물들을 잡아 훈련하여 가축화 시도를 했다.
하지만 너무나도 높은 지능 때문에 훈련은 실패로 돌아갔고, 대마법사 엘드리지는 마물은 개와 달라 절대로 가축화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과거에는 마물의 수가 현재처럼 많지 않았으며, 마물들도 집단 지성을 가지지 않았었다. 루퀼렘의 마법사들은 마물의 방생이 안전하다고 여겨 그들이 원래 살던 루퀼렘 북부 만년설이 아닌, 엘퀸즈 산맥 동부에 훈련했던 마물들을 전부 풀어 버렸다.
하지만 당시의 마법사들은 마물에 관해 두 가지를 간과했다. 하나는 그들의 번식력이 어마어마하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훈련을 하며 인간의 언어를 배워 버렸다는 점이다.
루퀼렘어를 알게 된 마물들은 번식으로 자신들의 수를 점점 늘려 나갔고, 루퀼렘어로 마법사들을 유혹하여 잡아먹는 만행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피해자의 수가 속수무책으로 늘어 가자 루퀼렘 왕실과 대마법사 엘드리지는 마물을 엘퀸즈 산맥 밖으로 억지로 밀어낸 후, 결계를 치는 결정을 내렸다.
에즈메릴다 여왕과 루는 사실 처음부터 이리아에게 마물과 관련된 과거를 숨길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어느 날 어린 이리아가 두 마리 고양이를 데려와 ‘씨시’와 ‘힐데어’라는 이름을 붙여 주고 키우는 모습을 목격하자마자, 마음을 굳혔다.
이리아는 다른 루퀼렘인들보다도 특히나 생명에 정이 많았다. 혹여 마물의 과거를 알게 된 그녀가 책임감을 느껴 그들을 다시 루퀼렘 영토 내부로 들여오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들이 펼쳐지게 된다.
결국, 에즈메릴다 여왕과 루는 생명에 대한 이리아의 정과 책임감을 제일 무서워했던 거다.
루의 이야기를 한 글자도 빠짐없이 모두 들은 이리아는 한동안 숨통이 막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눈앞이 절로 새까매지며, 온몸이 휘청거렸다.
[아아…….]
전쟁터에서 간호사 일을 하며, 자신의 손을 스쳐 지나갔던 군인들의 모습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그들의 몸에 새겨졌던 잔인한 상처들이 모두 엘퀸즈 산맥에 마물들을 방생해 버린 루퀼렘의 소행이었다니.
차라리 다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다. 차라리 다 농담이었으면.
루퀼렘의 대마법사로서, 루퀼렘은 언제나 정의롭고 생명을 사랑하는 국가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국가를 만들기 위해 수없이 여신께 기도하며 나라의 안위를 빌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루퀼렘은 정의롭지도 않았고, 생명을 사랑하는 국가도 아니었다. 마물의 가축화 시도와 잘못된 방생이라니, 이리아의 상식선에서는 모두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이리아의 잇새서 고통스러운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녀가 손바닥으로 흥건하게 젖은 두 눈가를 가리며 속삭였다.
[루퀼렘인으로서 비센티움에게 미안하지 않아, 루? 전부 우리의 선조가 저지른 일이야…….]
[카즈웰 3세는 이미 마물의 과거를 알고 있어요. 그렇기에 저희 왕실도 몇 번이나 비센티움 황실에게 손길을 건넸었지만, 그때마다 마법사의 도움 따위는 필요 없다고 거부당했어요. 왕실은 지쳐 버렸고, 어차피 거부당할 손길을 또다시 내미는 건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죠.]
[하, 하지만 그래도 어떻게…….]
[비센티움 황실은 과거 루퀼렘의 실수를 자신들이 대신 만회함으로써 힘과 능력을 과시하고 싶은 거예요. 아마 저와 아가씨를 포함한 루퀼렘인들은 절대로, 영영 그런 비센티움 황실을 이해할 수 없겠죠.]
이리아가 천천히 눈 앞을 가린 손바닥을 내렸다.
바로 앞에 서 있는 루 아휜은 티 하나 없이 새하얗고 기다란 머리카락을 휘날리면서도, 그 어떤 때보다 어둡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가씨. 민족성을 떠나, 비센티움과 루퀼렘은 아주 먼 과거부터 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혀 왔어요. 우리는 아마 일평생 서로를 완벽하게 포용할 수 없을 테죠.]
순간 이리아는 온 세상의 소리가 전부 사라지고, 오로지 루 아휜의 목소리만 남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가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가 귓가에서 오래도록 메아리쳤다.
[가치관이 다른 배우자를 섬기는 건 어려워요. 아가씨께서 설령 덱스터 하워드를 사랑하게 된다고 하여도, 분명 그와 사사건건 다투실 거예요. 무척이나 힘겨운 결혼 생활이 될 텐데, 그래도 덱스터 하워드와 함께 있고 싶으신가요?]
이리아는 그 어떤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어지럽던 머릿속은 급기야 완벽하게 새하얘져 버렸다.
지금껏 루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었기에, 루의 말솜씨가 든든했었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자신이 원하는 대로 대답을 유도해 버리는 루의 대화법을 겪으니, 든든함보다는 답답함과 화가 먼저 찾아왔다.
‘대체 어떻게 대답을 해야…….’
루의 말에는 확실히 흠잡을 부분이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덱스터와의 가치관 차이를 인정해 버리면, 일평생 비센티움과 루퀼렘이 서로를 포용할 수 없다는 대목도 정말 사실이 되어 버릴 것만 같았다.
루퀼렘 사람들은 비센티움인들을 야만적이고 잔인한 악마라고 묘사했지만, 이리아가 지금껏 만난 비센티움인은 절대로 악마들이 아니었다. 루퀼렘과 비센티움이 서로를 포용하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루의 깊은 황금빛 눈동자는 당황한 이리아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던진 물음에 관한 대답을 갈구하는 눈빛이었다.
이 자리에 계속 있으면 루에게 말려들 것만 같다.
하워드 공과 함께 있을 수 없다고 말해 버릴 것만 같아.
이리아는 그에게서 조금씩 주춤거리며 물러나다가, 뒤이어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와 버렸다. 곤란한 질문을 던지는 루 아휜이 미우면서도, 당당하게 대답을 하지 못하는 그녀 자신이 몹시 한심했다.
도망친 이리아의 두 발은 제멋대로 덱스터에게로 향했다. 루의 생각을 너무나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이리아를 제멋대로 그에게 이끈 것이다.
이리아는 덱스터의 집무실 앞을 지나간 적은 않았으나, 단 한 번도 직접 들어간 적은 없었다. 루 아휜을 피해 무작정 달려오기는 했는데, 막상 문을 두드리기에는 조금 망설여졌다.
거대한 여닫이문 앞에서 한참을 머뭇거리던 이리아는 이내 천천히 손을 올렸다.
똑똑. 단조로운 두 번의 노크 소리가 끝나자, 문 너머에서부터 무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 그리고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이어졌다.
곧이어 나타난 덱스터는 문 앞의 새빨간 정수리에 활짝 웃었다가, 눈물 젖은 두 뺨을 보고 표정을 굳혔다.
덱스터가 답지 않게 허둥지둥 이리아의 눈물 자국을 닦아 냈다. 그가 붉어진 눈가를 엄지로 쓸며 조심스레 물었다.
“왜 그래……? 대체 무엇이 당신을 속상하게 한 거야?”
“비센티움과 루퀼렘은 절대로 서로를 포용할 수 없대요. 공과 저의 가치관도 너무 달라서, 결혼을 한 후에 사사건건 다툴 거라고 했어요.”
“누가 당신한테 그런 말을 했어?”
“루가요.”
덱스터는 잠시 이리아의 녹빛 눈 안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잔잔히 미소 지었다. 그가 이리아를 집무실 안으로 이끌며 말했다.
“그놈은 사랑을 몰라.”
이리아는 그녀를 부드럽게 잡아끄는 덱스터의 뒷모습을 보고 내심 놀랐다. 자신의 말을 듣고 분명 속상해할 줄 알았는데, 그는 너무나도 태연했다.
덱스터는 무척이나 자연스레 이리아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는 여전히 얇은 붕대가 자리한 이리아의 왼쪽 발목을 살피고선, 머리카락을 귀 뒤로 살며시 넘겨 주었다.
곧이어, 덱스터의 낮고도 굵은 목소리가 집무실에 나직이 울려 퍼졌다.
“당신과 나의 가치관이 다르다는 점은 인정해. 나는 여전히 루퀼렘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마법이 불쾌하거든. 루퀼렘의 평화주의적인 관점은 이해하기 힘들며, 보이지 않는 여신을 섬기는 행위도 잘 알지 못하지.”
“하…… 하워드 공…….”
“하지만 이리아, 이 세상에서 상대방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의 수는 얼마나 될까?”
덱스터의 옷소매를 쥐려던 손이 허공에서 우뚝 멈추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거칠게 흔들리던 녹빛 눈동자가 차차 진정되었다. 덱스터는 그런 이리아를 보며 희미하게 웃다가, 허공의 손을 부드럽게 그러잡았다.
“10년을 함께한 친구도 서로를 온전하게 알지 못해. 몸속에 같은 피가 흐르는 혈육도 마찬가지이지. 하지만 그럼에도, 우정은 유지되고 가족은 함께 살아. 서로를 존중해 주기 때문이지.”
이리아의 오른손 엄지에는 여전히 그가 끼워 준 금반지가 자리했다. 덱스터는 낡아 흠집이 많은 금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난 당신을 사랑하게 된 이후로, 비로소 루퀼렘인들의 가치관을 온전히 존중할 수 있게 되었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동물을 죽이지 못하는 루퀼렘인을 겁쟁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함부로 살생을 저지르지 않는 태도가 현명하다고 느껴.”
아. 이리아가 짧은 탄식을 뱉어 냈다. 덱스터의 말을 듣고 있으니, 왠지 가슴 안쪽에서 꽃이 피어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금반지 위에 짧게 입을 맞춘 덱스터는 이후, 점차 혈색을 되찾아 가는 이리아의 뺨에 이어 키스했다. 순간 얼굴이 저릿한 느낌이 들며 고개를 돌리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지만, 노력을 결심한 마당에 덱스터의 스킨쉽을 피하고 싶진 않았다.
그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한쪽 귓가서 잔잔히 맴돌았다.
“루 아휜은 사랑을 몰라. 아마 그놈은 사랑이라는 감정이 인간의 얼마나 많은 부분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 평생 알지 못할 거야.”
덱스터는 잘게 떨리는 이리아의 새빨간 속눈썹을 지그시 응시하다가, 별안간 그녀를 번쩍 들어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깜짝 놀란 이리아가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으나 그는 능청스레 모른 척했다.
덱스터의 허벅지 위에 앉으니 그와 눈높이가 같아졌다. 왜인지 그를 더 가까이서 보는 듯한 느낌이 들어, 이리아의 두 귀에 제멋대로 열이 올랐다.
덱스터는 제 허벅지 위에 자리한 이리아의 허리를 꽉 끌어안은 채로, 그녀의 보드라운 눈가에 입술을 여러 번 찍어 눌렀다. 그리고, 그가 아침에 새로이 선물해 준 목걸이를 손끝으로 매만지며 넌지시 속삭였다.
“음…… 나도 오늘부터 채식을 시작해 볼까? 전부터 생각했는데, 루퀼렘의 대마법사 옆에서 육고기를 먹는 행동은 조금 무례한 것 같기도 하군.”
“하나도 안 무례해요, 공. 억지로 시작하는 채식은 저도 원치 않아요.”
덱스터가 어렴풋이 그래, 라고 대답하며 이리아의 뺨에 또 한 번 키스했다.
덱스터는 간만에 앞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모두 넘긴 상태였다. 이마를 가리지 않으니, 잘생긴 이목구비가 더욱 두드러진 듯했다.
이리아가 고운 손끝으로 조심스레 덱스터의 새까만 눈썹과 관자놀이를 만지작거렸다. 덱스터는 잠시 어깨를 들썩이며 웃다가, 그녀가 제 얼굴을 자유롭게 만지도록 두었다.
덱스터의 말은 이리아의 마음속에 비센티움인과 루퀼렘이 서로를 이해할 가능성을 심어 주었다. 루 아휜의 의견을 완전히 부정하기에는 조금 부족했지만, 이리아에게는 이 정도도 충분했다.
이리아가 덱스터의 새까만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상냥히 미소지었다. 그녀가 먼저 그의 목덜미를 양팔로 꼭 껴안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일순간, 덱스터의 온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대담하게 이리아를 매만지던 그의 양손은 허공에서 어찌할 줄 모르다가, 다시 그녀를 부드럽게 껴안았다.
덱스터의 기다랗고 뜨거운 손가락이 새빨간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들어왔다. 그는 이리아의 목덜미를 두어 번 문질러 준 후에, 뺨에 입술을 찍어 누르며 속삭였다.
“사랑해, 이리아. 영원히.”
덱스터의 목덜미를 껴안은 팔에 한층 힘이 들어갔다.
이리아가 그를 안고 있는 내내, 덱스터는 속상한 아이를 어르듯 그녀의 등을 가벼이 두드려 주었다. 가끔은 뺨에 키스도 남긴 통에 이리아의 얼굴은 곧 눈물 대신 입술 자국으로 범벅이 되었다.
절대로 덱스터의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애정 공세는 루시어스의 침입으로 막을 내렸다. 루시어스가 제 막내아들의 손을 잡고 집무실을 들어오자마자, 이리아는 불에 덴 듯 퍼뜩 일어나 도망쳐 나가 버렸다.
다친 발목을 조심하라는 외침이 등 뒤에서 들려왔지만, 부끄러워 뜀박질을 멈출 여유 따윈 없었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