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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71/109)

70화

14.

감기는 거의 나았으나, 로샨은 완치가 될 때까지 안심할 수 없다며 어김없이 이리아에게 수많은 알약을 먹였다.

이리아는 몰아치는 약 기운 덕분에 금세 잠들 수 있었다. 만일 로샨이 약을 주지 않았다면, 그녀는 어쩌면 덱스터와의 키스를 되짚으며 밤을 지새웠을 터다.

루 아휜은 ‘진정한 사랑’을 비센티움에 머무는 조건으로 걸었다. 루퀼렘에 돌아가기는 죽어도 싫기에 루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도 생각해 보았으나, 들키지 않을 리가 없다.

루는 이리아가 옹알이를 했던 시절부터 그녀를 지켜봐 온 남자다. 눈빛 하나만으로도 속내를 읽어 버리는 그 앞에서, ‘사랑’이란 감정을 속이기는 불가능했다.

솔직히 지난 전쟁터에서의 덱스터의 이야기를 듣고, 심경의 변화가 생기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비록 계획한 것은 아니었으나 덱스터가 자신의 마음을 전부 털어놓은 이후로, 이리아는 자신 또한 덱스터를 위해 무언가 노력하고 싶었다.

노력해야 할 점이 ‘사랑’이라는 감정의 발전이라 할지라도, 기꺼이 하고 싶었다.

덱스터는 술고래였지만, 술기운이 보통 사람보다 늦게 올라오는 편이기도 했다. 새빨개진 두 귀를 겨우 원래대로 되돌린 이리아가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 그는 술에 취해 반쯤 졸고 있었다.

덱스터는 바로 앞에서 똘망똘망한 눈동자로 그를 구경하던 이리아에게 예쁘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참 이리아의 외모를 칭송하던 덱스터는 이후 그녀의 뺨에 진한 입맞춤을 새기고선, 비척비척 제 침실로 올라갔다.

덱스터는 이리아와 달리, 아무리 술에 진탕 취해도 전날을 정확하게 기억했다. 업무 때문에 이리아를 자주 볼 수 없던 그는 아침마다 짧은 메모와 쪽지를 보내곤 했는데, 이번 아침도 매한가지였다.

이리아의 얼굴은 감기가 옮은 것 같다는 메모를 보자마자 터질 듯 새빨개졌다. 그가 종이 뒷면에 농담이라고 써놓았음에도, 열이 오른 그녀의 얼굴은 한참 진정되지 못했다.

덱스터는 지금껏 꽃, 향수, 구두 등의 수많은 선물을 보내왔지만, 이상하게 가장 흔한 목걸이 선물은 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이리아는 메모와 함께 온 조그마한 상자 속에서 목걸이를 발견했을 때, 내심 깜짝 놀랐다.

목걸이는 단조로웠다. 은으로 만든 사슬 끝에는 조그맣고 하얀 보석이 달려 있었는데, 보석에 관해 다양한 지식이 없는 이리아는 어느 종류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어리둥절한 그녀의 귓가에 로샨이 오팔(*opal: 단백석, 오팔을 몸에 지닌 자는 병마로부터 보호된다는 설이 있다)이라고 작게 귀띔해 주었다.

텅 비었던 목에 목걸이가 채워졌다. 이리아는 그녀의 왼손 엄지에 자리한 금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하녀들의 아침 시중을 받았다.

덱스터에게 목걸이를 선물해 줘서 고맙다는 인사라도 전해야 하는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얇아지는 드레스를 입으며, 이리아가 곰곰이 생각했다.

하지만 목걸이를 하녀들을 통해 전한 걸 보면 덱스터는 아침부터 매우 바쁜 듯했다. 게다가 그를 만나면 분명 어젯밤의 일을 언급할 텐데, 떠올리기만 해도 부끄러운 입맞춤을 주제로 대화를 하고 싶진 않았다.

이리아는 그녀 대신 고맙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루시어스 데이즈먼을 찾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루시어스는 후원에 루 아휜과 함께 있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비센티움인과 루퀼렘인이 붙어 있다. 이리아는 잠시 울창한 나무 뒤에 숨어, 둘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대화가 잘 안 들려…….’

시끄러운 새들의 울음과 바람 소리가 계속해서 이리아를 방해했다. 간혹 ‘여왕님’이나 ‘비센티움’이라는 단어가 들려오는 것으로 봐선 루퀼렘의 정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듯한데, 정확히는 알 수가 없었다.

비록 횡설수설하긴 했지만 이리아가 잘 둘러댄 덕분에, 루시어스는 루와 이리아가 초면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는 루가 단지 공작의 약혼녀인 이리아와 친해지기 위해서 그녀의 주변을 서성거린다고 생각했다.

괜히 먼저 루에게 다가가 루시어스의 의심을 받고 싶지 않던 이리아는, 둘의 대화가 끝날 때까지 나무 뒤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 그녀의 옆을 어떤 두 꼬마가 빠르게 뛰어 지나갔다.

완벽한 비센티움인이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두 꼬마는 모두 새까만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다. 이리아는 뒤늦게 그중 한 명이 루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루인은 그보다 조금 어린 남자아이와 루시어스 주변을 뛰어다니며 놀았다. 루시어스의 온 신경이 아이들에게로 향하자, 이리아는 안심하고 두 남자에게 은근슬쩍 가까이 다가갔다.

루의 목소리가 조금 더 선명하게 들렸다.

“저 아이의 외모와 상당히 비슷하신 듯합니다.”

“당연히 그렇겠죠. 제 막내아들이니까요.”

“결혼을 이르게 하셨나 보군요. 실례지만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시는지……?”

“올해로 마흔셋입니다.”

루의 눈썹 사이가 서서히 찌푸려졌다. 그는 조금 실례가 될 만큼이나 루시어스의 얼굴을 자세히 살피고선, 감탄을 내뱉었다.

“호오, 엄청난 동안이시군요?”

루시어스는 수없이 들어 본 말인지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아는 바람결에 어렴풋이 들려온 루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동안’이라니, 나이 이백을 넘은 그가 할 소리는 아니었다.

루 아휜은 대마법사 엘드리지 시절에 태어나 지금껏 살아 있는 몇 안 되는 마법사였다.

언젠가 루가 이리아에게 말해 주었었다. 자신은 과거 기나긴 세월을 오로지 이리아를 만나기 위해서만 살아왔으며, 루퀼렘의 긴 만년설 안에서 그녀를 발견했을 때 처음으로 삶의 가치를 느꼈다고.

일정이 꽉 차 있는 루시어스는 이내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두 꼬마를 이끌고 저택으로 들어갔다.

이리아가 나무 뒤에 있다는 사실을 진즉 알고 있었던지, 혼자가 되기 무섭게 루가 곧장 그녀를 돌아보았다.

[좋은 아침이에요, 아가씨.]

[자, 잠깐. 루……!]

루가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가 이리아를 조금 거칠게 껴안았다. 아침 인사치고는 상당히 격했다.

그는 제 너른 가슴 안에 이리아를 품은 채 한참 그녀의 체향을 들이마시다가, 언제나 그랬던 대로 손을 꼭 맞잡았다. 깜짝 놀란 이리아가 주변에 사람이 있는지 두리번거리자 그는 능숙하게 괜찮다며 타일렀다.

후원의 꽃밭은 두 꼬마가 밟고 지나가 엉망이었다. 무참히들 꺾인 꽃송이와 잔디들로부터 장난꾸러기 악동들의 기운이 느껴졌다.

이리아도 루퀼렘의 교리를 잘 알지 못했던 어린 시절, 루퀼렘 성 정원을 난장판으로 만든 적이 몇 있었다. 그리고 루는 양손에 쥐어뜯은 꽃들을 잔뜩 든 그녀를 발견할 때마다 크게 혼을 냈었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이리아의 잇새서 작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녀가 루 아휜의 손을 더욱 강하게 맞잡으며 물었다.

[루. 어렸을 적에, 네가 날 바깥세상으로 데려다주겠다고 약속했었잖아?]

[네, 아가씨.]

[그 약속, 진심이었어?]

[그럼요, 아가씨. 전 아가씨께 단 한 번도 진심이 아닌 말을 전한 적 없어요.]

[그렇다면 다행이네. 만일 그 약속이 겨우 사탕발림 말 정도였다면, 난 정말로 크게 상처받았을 거야.]

말이 끝나자마자, 이리아의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천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진심이 아닌 말을 전한 적 없다니. 루 아휜은 ‘진심’이라는 단어의 뜻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날 일평생 속였으면서, 어떻게 감히 내 앞에서 진심이 아닌 말을 전한 적 없다는 소리를 지껄이는지…….’

침실 서랍장에 있는 라이터의 모습이 이리아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제자리에 멈춰 선 그녀는 냅다 루 아휜의 손을 탁 놓아 버렸다.

루는 곧바로 당황하여 이리아를 향해 몸을 돌렸다. 이리아는 어느샌가 한껏 붉어진 눈가로 그를 매섭게 흘기고 있었다.

[그런데 왜 내게는 루퀼렘인들이 마법석 없이 불을 쓰지 못한다고 거짓말했어?]

그녀는 물음을 내뱉은 순간, 새파래지는 루의 낯빛을 보고야 말았다.

울컥. 무언가 뜨거운 감정이 가슴의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치밀어 올랐다. 라이터라는 존재를 처음 알았을 때의 충격과 공허함이 해일처럼 몰려와 그녀 자신을 또 한 번 휩쓸고 가는 듯했다.

말문이 막혔었는지, 잠시 제자리서 아무 말도 못 하던 루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아, 아가씨. 그건…….]

[그거 알아? 내가 전쟁터에 있을 적 마물을 맞닥뜨렸을 때, 마물이 루퀼렘어를 했어. 루퀼렘에 마물이 없다는 말도 거짓말이지, 루?]

루의 황금빛 눈동자가 매섭게 요동쳤다. 이리아는 그의 흔들리는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어렸을 적 그가 귓가에 속삭여 주었던 많은 이야기들이, 실은 다 거짓이었음을.

다른 루퀼렘인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을까. 이리아는 순간, 루 아휜을 포함하여 진실을 알려 주지 않은 수많은 루퀼렘들에게 배신감과 분노를 느꼈다.

마치 사전에 짠 듯, 지금껏 온 세상이 그녀 한 명을 천하의 등신으로 만들고 있었다.

조금 전에 막 치밀어 올랐던 뜨거운 감정은 이제 심장에 자리를 잡아 미친 듯이 부글부글 끓는 중이었다. 차마 제 분노를 온전히 감당하지 못한 이리아의 눈에 제멋대로 물기가 차올랐다.

끝내 볼을 타고 흘러내고 만 눈물 한 방울에, 루의 아름다운 얼굴이 무참히 일그러졌다.

그가 다급히 머리를 조아리고선 애원했다.

[제가 다 설명해 드릴게요. 제발, 제발 울지 마세요, 아가씨…….]

한 치의 거짓 없이, 모든 걸 제대로 설명해야 할 거다. 이리아가 옷소매로 거칠게 눈물을 닦아 내며 루를 노려보았다.

루는 에즈메릴다 혼 루미에르 여왕의 허락 없이 이리아에게 모든 진실을 알려 주는 점이 몹시나 마음에 걸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몇 번의 망설임 끝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엘퀸즈 산맥의 만년설에서 어린 아가씨를 발견했을 당시, 아가씨의 힘은 너무 불안정했어요. 아가씨께서 5살이 되던 해, 루퀼렘 하늘에 두 개의 달을 창조해 낸 후엔 힘이 조금 진정된 듯했지만, 시간이 지나니 또다시 불안정해졌죠.]

루 아휜의 두 황금빛 눈동자는 먼 과거를 되짚어 어딘가 아득한 곳을 보고 있었다.

그는 하루가 다르게 끓어오르는 힘을 감당하지 못해, 화를 내고 울음을 터뜨리던 어린 시절의 이리아를 회상하는 중이었다.

[아가씨의 힘은 저희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강력하기에, 아가씨께는 장난일 수 있는 마법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이에요. 저와 에즈메릴다 여왕님은 성을 지나다니는 사람을 향해 언제라도 마법을 쓸 것만 같던 아가씨를 그대로 둘 수 없었어요.]

[그래서, 내가 사고를 치기 전에 힘을 미리 다 빼놓으려고 온종일 마법석을 만들게 한 거야……?]

[마법석은 예방 차원이었어요. 마법석 생성을 통해서 아가씨의 힘을 미리 덜어 두어야 설령 아가씨께서 실수로 사람에게 마법을 쓴다고 해도, 목숨에 치명적이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요. 이유를 아시면 제작을 게을리하실까 봐, 아가씨께는 일부러 말씀드리지 않았었어요. 죄송해요.]

두 눈에서 또다시 눈물이 튀어나오며 실핏줄이 터졌다. 이리아는 머리카락 색만큼이나 새빨개진 눈가를 옷소매로 다시 거칠게 문질렀다.

특별한 행사가 없는 날에는 온종일 루퀼렘 성의 그 방에 갇혀 마법석만 만들어야 했다. 창밖의 하늘을 가르고 날아가는 새의 울음을 들을 때마다, 성의 난간 아래서 뛰어다니는 꼬마들의 웃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너무 외롭고 고통스러웠다.

차라리 한없이 이기적인 이유였다면 지난 과거를 되짚으며 루에게 화라도 낼 수 있었을 터다. 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과정이었다니. 이리아는 짜증이 나면서도, 루의 말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그녀 자신이 너무나도 분했다.

‘그럼 날 성안에 일평생 가둬 두었던 것도 조절하지 못한 힘 때문이었을까.’

이리아의 머릿속에 질문이 하나 떠올랐지만, 지금은 다른 의문점의 해소가 먼저였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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