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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화 (70/109)

69화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루의 호통 따위는 들려오지 않았다.

화를 다스리는 듯한 그의 숨소리조차도 들리지 않았기에, 이리아가 눈꺼풀을 살짝 치켜드는 순간이었다.

이리아의 자그마한 몸이 루에게 당겨지며, 한쪽 뺨이 그의 가슴팍에 폭 파묻혔다. 루가 이리아를 제 품속에 부드럽게 끌어안고선 속삭였다.

[어떤 일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많이 무서우셨었나 보네요.]

[……루…….]

루퀼렘의 교리를 어겼다며 크게 혼낼 줄 알았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그의 말에, 이리아의 두 녹빛 눈동자 위로 제멋대로 눈물이 차올랐다.

그녀는 어린 시절에 했던 것처럼, 양팔 가득 루의 허리를 꼭 그러안았다.

이리아에게 자객들을 만났던 밤은 살아 있는 악몽이었다. 그녀가 어쩔 수 없이 사람에게 총구를 겨누어야 했던 그 순간을 떠올리며 앓는 동안, 루는 새빨간 정수리를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었다.

이리아가 루의 허리께를 더 세게 껴안았다. 눈물이 살짝 묻은 정장 안쪽으로 얼굴을 감추며, 그녀가 웅얼거리듯 말했다.

[루, 부탁이 하나 있어.]

[말씀만 하세요, 아가씨.]

[밤하늘에 영혼을 기리는 불꽃을 하나 띄워 줬으면 해.]

[푸른 불꽃 말씀이세요? 푸른 불꽃은 대체 왜…….]

루퀼렘의 마법사들은 가까운 사람이나 동물이 죽었을 때, 육신을 떠난 영혼을 기리기 위하여 밤하늘에 푸른 불꽃을 쏘아 올린다. 이는 루퀼렘인들이 엘퀸즈 산맥으로 이주하기 전부터 존재했던 오랜 전통이었다.

이리아가 왼쪽 팔목에 감아두었던 하얀 갈기를 잡아당겼다. 한때 튼튼했던 갈기도 시간이 지나 약해졌는지, 이리아의 손힘에도 쉽게 끊어졌다.

그녀가 얼기설기 흐트러진 갈기를 루에게 넘기며 속삭였다.

[작년 이맘때에, 틸다가 세상을 떠났어.]

루는 제 품 안의 이리아를 더욱 강하게 안아 주었다.

그는 이리아의 부탁대로, 틸다의 털에 푸른 불꽃을 붙여 하늘 위로 날려 보냈다. 불꽃은 어느덧 온전한 저녁이 찾아온 하늘 위로 점점 올라가 하나의 별이 되었다.

이리아는 루의 가슴께에 뺨을 폭 파묻은 채, 틸다에게 뒤늦게 하지 못했던 작별 인사를 전했다.

틸다의 육신은 비록 새빨간 불꽃에 타올랐지만, 그녀의 영혼은 푸른 불꽃이 되어 저 하늘 위에 영원토록 머물리라.

줄곧 비센티움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에, 이리아는 아주 오랜 시간 틸다의 명복을 제대로 빌지 못했었다. 푸른 불꽃을 날리니 가슴속에 맺혀 있던 응어리가 드디어 사라진 기분이었다.

이리아가 조금은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침실 방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하지만 그녀는 당당했던 손짓과 달리, 침실 문 너머를 보자마자 퍼뜩 놀라 뒷걸음질 치고 말았다.

예상치 못하게, 대부인의 침실에는 손님이 한 명 와 있었다. 그는 루 아휜과 전혀 다른 새까만 머리칼과 눈동자를 가진 자였다.

창틀에 삐딱하게 걸터앉은 덱스터의 고운 머리카락이 밤바람에 휘날렸다. 그는 저 머나먼 초승달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숨결에 박하 향과 함께 술기운이 스며들어 있는 것을 보아 꽤 많은 양의 술을 마신 듯했다.

그가 창밖을 가리키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밤하늘에 몹시나 밝은 별이 하나 껴 있던데.”

“조…… 조금 늦었지만, 틸다를 기리는 푸른 불꽃을 하늘 위로 날려 보냈어요. 루퀼렘의 오랜 전통이거든요.”

복도에서 사용인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자 이리아가 살포시 문을 닫았다.

덱스터는 한참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응시하다가, 무척이나 담담하게 내뱉었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으면 가도 돼, 이리아. 분명 나는 당신을 수차례 잡을 테지만, 결국에는 이기지 못해 놓아 주겠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요. 루퀼렘으로 돌아가면 저는 또다시 성에 갇혀 매일 일을 해야 할 거예요…….”

“……그럼 나와 함께 있고 싶어?”

이리아는 덱스터를 힐끔거리고선 굳게 닫힌 문에 등을 기대었다. 그녀가 조그마한 발끝을 꼼지락거리며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루퀼렘에서처럼 갇혀 살지 않을 수 있다면요.”

“난 당신을 사랑하는데, 당신은 단지 자유롭다는 이유로 나와 함께 있고 싶어 하는구나.”

염치가 없다는 건 이리아 그녀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차마 덱스터를 똑바로 볼 수 없어, 이리아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덱스터의 낮은 웃음소리가 방 안을 잔잔히 메웠다. 그의 웃음소리는 언제나 그랬듯 감미로웠지만, 묵직한 슬픔이 스며들어 있었다.

“결혼 생활은 자유롭지 않아, 이리아. 나와 함께 있다 해도 무수한 이유로 억압받겠지. 그럼 당신은 괴로워질 테고, 결국에는 다시 자유를 찾아 날 떠날 거야.”

“하…… 하워드 공, 그건…….”

“이거 봐. 확답을 못 주잖아.”

이리아가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덱스터가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녀의 가슴속 미안한 감정은 배로 부풀었다.

방 안에 감도는 침묵은 길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덱스터의 표정을 살피기 위해 이리아가 눈꺼풀을 치켜든 즈음,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루 아휜이 내게 조건을 걸었어. 당신이 나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루퀼렘으로 데려가지 않겠다는 조건을.”

아. 이리아가 외마디의 탄식을 흘렸다. 그녀의 고개가 제멋대로 퍼뜩 올라갔다.

거칠게 흔들리는 눈으로 앞을 바라본 이리아와 달리, 덱스터는 희미한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가 한 글자, 한 글자를 서로의 머릿속에 새기듯 정확히 내뱉었다.

“당신이 여기에 계속 머무를 수 있는 조건은 하나뿐이야. 날 사랑하는 것.”

이후 덱스터는 잠시 짧은 심호흡을 하고선, 여전히 문가에 서 있는 이리아에게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당신이 고향에 그렇게 돌아가기 싫다면…… 나랑 함께 사랑에 빠져 볼래?”

“저…… 저는 사랑에 빠지는 방법 같은 건 몰라요, 하워드 공.”

“쉬워. 내가 눈을 감고 있을 테니까, 당신이 와서 입을 맞춰 주면 돼.”

“그것뿐이에요……?”

“응.”

이리아는 아주 긴 시간 제자리서 덱스터의 새까만 눈동자 속을 지그시 들여다보다가, 천천히 문에서 등을 뗐다.

그리고 동시에, 덱스터는 눈을 감았다.

서로가 차츰 가까워지는 찰나에, 이리아는 문득 덱스터에게 루퀼렘인으로서의 모습을 제대로 보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하얀 머리로 돌아왔던 순간마다 둘은 항상 어딘가 어긋나 있었다.

이제 그의 앞에서 비센티움인의 껍질은 벗어도 되지 않을까.

이리아가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던 마법이 차례로 벗겨졌다. 새빨간 머리카락은 원래의 하얀색으로 돌아오고, 녹빛의 눈동자는 서서히 황금색을 띠어 갔다.

이리아가 덱스터의 바로 앞으로 도착했을 때, 그녀는 어느덧 완벽한 루퀼렘인이 되어 있었다.

덱스터의 얼굴은 이제 어둠 속에서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숱하게 봤다. 그런데도, 초승달 아래서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그를 마주하니 감회가 색달랐다.

이리아는 은은한 달빛의 그림자가 진 덱스터의 얼굴이 참 곱고 예쁘다고 생각했다.

이리아가 루퀼렘인 특유의 창백한 손으로 살며시 그의 양 볼을 감쌌다. 그리고, 천천히 다가가 서로의 입술을 맞물렸다.

입술이 머문 시간은 짧았다.

이리아의 손과 입술이 소리 없이 멀어지자마자, 덱스터는 감고 있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밤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고 지나갔다. 바로 앞에서 하얀 머리의 이리아를 발견한 그의 두 눈이 막 행복한 꿈을 꾼 소년처럼 몽롱하게 풀렸다.

“이리아…….”

덱스터는 홀린 듯 손을 뻗어 달빛에 반짝이는 이리아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이리아는 그녀가 먼저 키스한 게 창피하여 자리를 피하고 싶었지만, 머리카락 끝에 입을 맞추고 있는 덱스터 때문에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덱스터의 입술은 기나긴 머리카락을 타고 차츰 위로 올라왔다. 그는 술기운이 흠뻑 밴 숨결을 내뱉으며 드러난 이리아의 어깨, 턱, 뺨에 차례대로 키스했다. 덱스터의 숨결이 피부에 닿을 때마다, 이리아는 그와 함께 술에 취해 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결국, 그녀는 덱스터가 또 한 번 서로의 입술을 맞물릴 때까지도 움직이지 못했다.

맨정신으로 나누는 그와의 두 번째 키스는 훨씬 길고 뜨거웠다. 이리아가 잠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어느덧 덱스터의 허벅지 위에 앉아 파고드는 혀를 전부 받아들이고 있었다.

취기가 오른 탓에 덱스터는 키스를 다른 때보다 조금 서투르게 했지만, 어차피 이리아는 그와 나누었던 입맞춤들을 기억하지 못했다. 서로의 입술이 스치는 소리가 두 귓가를 아득하게 메울수록, 그녀는 온몸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술은 마신 후에도 어김없이 박하를 씹었는지, 덱스터의 혀끝에서는 박하 특유의 시원한 맛이 느껴졌다. 덱스터는 그가 지녔던 독한 박하 향을 전부 이리아의 입 속에 옮겨 두고선, 태연하게 입술을 뗐다.

덱스터가 힘겹게 허덕이는 이리아의 뺨을 쓰다듬으며 나직이 질문했다.

“기분이 어때? 사랑에 빠진 것 같지 않아?”

“자, 잘 모르겠어요…….”

“그래? 이상하네. 아직 부족한가 봐.”

낮은 웃음소리를 흘린 그가 이리아의 허리께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다시 키스했다.

키스는 전보다 짧았지만, 이리아의 호흡을 더욱 가녀리게 만드는 데엔 충분했다. 둘의 입술이 또 한 번 떨어졌을 때, 이리아는 머리가 어지러워 덱스터의 어깨에 제 머리를 기대야 했다.

덱스터는 두 눈을 감고 있는 이리아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창백한 이마 위에 천천히 입술을 찍어 눌렀다.

그가 입술을 떼지 않은 채로 감미롭게 속삭였다.

“사랑해, 이리아. 설령 당신이 날 떠난다 해도, 난 영원히 당신만을 사랑할 거야.”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이리아의 잇새선 희미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황급히 긴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며 덱스터의 가슴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덱스터는 갑자기 제 가슴 깊숙이 안기는 이리아가 의아한 듯했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는 달빛을 반사하여 아름답게 빛나는 그녀의 하얀 머리카락을 잔잔히 쓰다듬을 뿐이었다.

그렇게 덱스터가 한창 다가온 고요를 즐길 때, 이리아는 그의 그림자 아래에 숨어 거친 호흡을 가다듬어야 했다.

심장은 세 번의 입맞춤보다도 사랑한다는 한마디에 우뚝 멎어 버린다.

터질 듯 새빨개진 그녀의 두 귀를, 덱스터가 보지 못해 참 다행이었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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