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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69/109)

68화

하! 덱스터가 외마디의 실소를 토해 냈다.

루 아휜이 대체 무슨 의미의 웃음이냐며 그를 쏘아볼 때, 덱스터는 루의 가슴께를 가리키며 거친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아, 이제 알겠어. 네놈을 보니까 이리아가 왜 가출을 했는지 완벽하게 이해되는군!”

“지금 그게 무슨 망발…….”

“네놈은 어린 이리아를 어르고 달래기는커녕 지금의 내게 하는 것처럼 루퀼렘의 전통과 신앙을 막무가내로 밀어붙였겠지. 네가 가출의 가장 큰 이유구나, 루 아휜. 너 때문에 이리아가 성을 나왔어!”

마지막 대목을 듣자마자 루 아휜의 아름다운 얼굴은 단번에 일그러졌다. 그는 누가 봐도 분노에 찬 표정을 하고 있었기에, 덱스터는 순간 양 주먹을 꽉 쥐어야 했다.

하지만 아주 오랜 세월 루퀼렘을 수호했던 기사답게 루 아휜은 금세 진정했다.

그는 언제 분노에 차올랐냐는 듯 한껏 평온한 얼굴로 잠시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재차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덱스터 하워드. 아가씨께서 하나의 조건만 충족해 주신다면, 루퀼렘으로 모셔가지 않겠습니다. 당신에게 약조하죠.”

“……조건이라고?”

“네.”

일순간, 루의 입가에 승자의 미소가 떠올랐다.

“조건은 아가씨께서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시는 겁니다.”

웃는 루 아휜과 달리, 덱스터의 안면은 대번에 굳어 버렸다.

그가 당황했다는 사실을 알아챈 루의 입술 끄트머리가 더더욱 길게 늘어졌다.

“행복하지 않은 결혼 생활과 성의 감금 생활이 뭐가 다르겠습니까? 아가씨께서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게 두고 볼 수는 없죠.”

덱스터의 대답 따위는 들을 생각도 없었고, 그럴 필요조차도 없었다. 루는 자신이 내건 조건을 덱스터가 지키지 못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는 이리아의 일평생을 옆에서 지켜봐 왔으며, 그 누구보다도 그녀를 잘 알았다.

루퀼렘의 대마법사 이리아 아델리어는 이웃 나라의 군단장을 절대로 사랑할 리 없다.

루 아휜의 머릿속을 전부 읽어 낸 덱스터는 어느덧 이마에 핏대를 세운 채, 어금니를 강하게 악물고 있었다. 하지만 루는 그런 그를 같잖지도 않다는 투로 흘겨보고선, 그대로 등을 돌려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루의 마지막 두 문장이 펄럭이는 루퀼렘의 의복을 타고 잔잔히 메아리치는 듯했다.

“저는 첫 단풍이 지는 날에 비센티움을 뜰 겁니다. 만일 그때가 되어서도 아가씨의 마음이 그대로라면, 그분을 루퀼렘에 반드시 모셔가겠습니다.”

***

이리아는 아주 긴 시간을 잤다.

자는 동안 약 효과가 잘 들었는지, 오후에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몸이 날아갈 듯 개운했다. 그녀는 침대 위에서 간단하게 죽과 약을 먹은 후, 벌떡 일어났다.

비센티움 사람들은 튜닉 셔츠나 간단한 블라우스 외에는 밝은색의 옷을 자주 입지 않았다. 하얗고 긴 루퀼렘 성기사의 의복을 오랜만에 본 이리아는 자신 또한 흰옷을 입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하녀들이 옷을 내주지 않은 탓이었다.

웨딩드레스를 입기 전까지 흰옷을 내주지 않겠다는 하녀들의 주장은 여전했다. 덱스터에게서 도망쳐 루 아휜을 맞닥뜨렸던 그 날에는, 허약해진 몸 때문에 정말로 ‘마지못해’ 내주었던 거다.

로샨은 불만을 토로하는 이리아를 능숙하게 달래며 그녀가 마음에 들어 할 다른 드레스를 가져왔다.

드레스는 비록 하얗지는 않았지만, 흰색에 가장 가까운 하늘색이었다.

하녀들이 머리를 빗겨 주는 내내, 이리아는 거울 앞에 앉아 온전히 드러난 양어깨를 만지작거렸다. 최근 며칠 동안 슬립만 입고 생활했기 때문인지 여름 드레스가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다.

루시어스는 루퀼렘에 개인적인 흥미가 있었고 루퀼렘인을 만나고 싶어 했음에도, 막상 성기사들이 저택에 들이닥치니 머리가 아픈 듯했다. 그는 이리아에게 한동안은 수업을 하지 못하겠다며 양해를 구했는데, 사실 그때 이리아는 영원히 할 필요 없다고 대답할 뻔했다.

오후에는 주로 루시어스의 수업을 들었기 때문에, 그의 수업이 빠지니 일정이 텅 비어 버렸다.

괜히 덱스터의 일을 방해하거나 루 아휜과 실랑이를 하고 싶지 않던 이리아는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정원으로 향했다.

‘어어……?’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하게, 루 아휜을 포함한 성기사들이 정원에 모여 있었다. 그들은 저택 사용인들의 시선이 불편해 자주 밖에 나오는 것 같았다.

정원으로 나오는 문가에서 서로를 마주치자 이리아만큼이나 성기사들도 당황했다. 그들은 빨간 머리의 이리아를 분명 알아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루 아휜의 명령으로 인해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

어린 루인을 제외한 저택의 사용인들은 눈치가 빨랐다. 특히나 로샨과 루시어스의 눈치가 만만찮았는데, 이리아는 그 둘에게 루 아휜과의 관계를 둘러대느라 한참 진땀을 빼야 했다.

이리아는 이미 약간의 의심을 받고 있다. 혹시라도 저택의 사용인들이 익숙하게 성기사의 경례를 받는 이리아를 목격한다면 그녀의 입장이 더더욱 곤란해지기에, 제 아가씨를 생각한 루 아휜의 특별한 배려였다.

모두 같은 하얀 머리카락과 큰 키를 가진 성기사들 사이에서도 단연 루 아휜은 독보적이었다.

언제나 루퀼렘의 몽롱한 달빛 아래서만 그를 보아 왔던지라, 이리아는 샛노란 노을 속 그의 미소를 보자마자 일순간 숨이 멎는 기분이었다.

루는 루퀼렘 의복을 벗고, 단조로운 비센티움의 정장을 입고 있었다. 이리아가 비센티움 양식 드레스를 입으니, 그 또한 이리아를 따라 비센티움의 옷을 고집한 듯했다.

헛기침을 두어 번 하여 목을 가다듬은 후, 루 아휜이 천천히 이리아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답지 않게 매우 긴장한 모습이었다.

[아가씨.]

이리아는 이번에도, 그가 한 걸음 다가오면 한 걸음 물러났다.

주변에 성기사들이 너무 많은 데다가, 그녀를 지켜 줄 덱스터도 없었다. 루가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이 손목을 잡아챌 것만 같다.

루 아휜은 그가 다가갈수록 이리아와의 거리는 늘어난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가 이리아에게 보란 듯 양손을 등 뒤로 감추며 부드럽게 일렀다.

[어젯밤, 여름이 끝날 때까지는 아가씨를 루퀼렘에 모셔 가지 않겠다고 덱스터 하워드와 약조했어요.]

[어, 그, 나는…….]

[그러니 제발 저에게서 멀어지지 마세요, 아가씨. 아가씨께서 한 걸음 물러서실 때마다 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요.]

루의 양 눈썹 끝이 아래로 축 내려갔다. 그는 깊은 황금색의 눈동자를 반짝이며, 한없이 애처로운 얼굴로 이리아를 바라보았다.

이리아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덱스터와 약조했다는 말을 들으니 조금 마음이 놓이는 기분이었다.

루의 구슬펐던 얼굴은 이리아가 가까이 다가오자마자 활짝 피었다. 더운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번에 이리아의 손을 감싸 쥐었다.

둘은 함께 사람이 없는 정원의 가로수길을 천천히 따라 걸었다. 이리아의 손을 강하게 마주 잡은 루는 단 한 순간도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가씨껜 뭐든 잘 어울리겠지만…… 빨간 머리도 너무 잘 어울리세요.]

[네가 보기에는 이상하지 않아? 눈 색도, 머리카락 색도 전과 너무 다르잖아.]

[그럴 리가요. 전혀 이상하지 않아요, 아가씨. 오히려 예쁘기만 한걸요?]

루의 목소리는 더할 수 없이 감미로웠다. 그는 이리아의 새빨간 곱슬머리를 가만 바라보다가, 정수리를 살포시 쓰다듬었다.

마음이 놓이니 이리아의 말수도 트였다. 그녀는 지금껏 머릿속에 꼭꼭 담아 두었던 이야기들을 하나씩 풀어내기 시작했다. 비센티움에 도착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루에게는 전해 줄 이야기가 참 많았다.

루는 언제나 조용한 청자에 가까웠기에, 이리아가 마물에 의해 종아리를 다쳤다는 순간을 들을 때 빼고는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이리아의 다리에 처음으로 흉터가 생겼다는 말을 듣자마자 덱스터만큼이나 몹시 슬퍼했다.

이리아는 자신이 덱스터를 루로 착각했던 부분은 일부러 언급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루가 덱스터에게 찾아가 어제처럼 빈정거릴까 걱정되어서였다.

이리아의 손을 맞잡은 채, 엄지로 그녀의 손등을 쓸던 루는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제자리에 멈춰 선 그가 이리아의 양손을 모두 살피며 속삭였다.

[고운 손에 굳은살이 생기셨네요, 아가씨.]

[손의 굳은살 정도는 모두가 가지고 살아, 루. 그동안 내가 너무 크게 대접받았던 거지.]

[그래도…… 저는 너무 슬퍼요.]

이리아가 괜찮다는 뜻으로 작게 미소 지었다. 루는 다시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고서, 가로수 사이를 찬찬히 거닐었다.

그가 긴장을 풀듯, 두어 번 크게 심호흡하고 말했다.

[아가씨, 저는 말이에요…….]

답지 않게 말끝이 서슴없이 떨렸다.

이리아가 의아함을 담아 루를 올려다보았지만, 그는 아랫입술을 처연하게 깨물며 고개를 반대로 돌려 버렸다.

[아가씨께서 성을 나선 그날, 텅 빈 방을 보자마자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어요.]

내가 성을 나선 그날…….

숨이 턱 막히며, 이리아의 작은 어깨가 단번에 축 내려앉았다.

그녀 또한 루와 마찬가지로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서서히 땀이 나기 시작한 손바닥은 미끄러웠으나, 루는 그녀의 손을 절대로 놓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심호흡하며 몹시나 힘겹게 말을 이었다.

[눈앞이 캄캄해졌고, 숨을 쉴 수가 없었죠. 기사들에게 성의 모든 장소를 수색하라고 일렀는데, 성의 그 어느 곳에서도 아가씨를 발견할 수 없자 막연한 두려움이 일더군요.]

[루…….]

[차마 아가씨께서 성을 나갔다고 전해 드릴 수 없어, 여왕님께는 장장 일주일 동안이나 아가씨가 아프다며 거짓말을 했어요. 여왕님께 모든 사실을 들켰을 때, 저는 부끄러워 온종일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이리아가 미안하다고 하기 위해 입을 여는 순간, 루가 그녀를 응시하며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사과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였다.

[아가씨께서 비센티움에 오신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비센티움의 온 지역에 수배지를 뿌렸죠. 겨우 수배지 따위로 아가씨가 잡히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저와 성기사들이 아가씨를 찾고 계시리라는 사실 정도는 아셨으면 싶었어요.]

[루, 비센티움에 온 이후로 난 많이 변했어. 난 더 이상 너와 성기사들이 알던 그 이리아 아델리어가 아니야.]

루의 발걸음이 제자리서 우뚝 멈추었다.

그는 아마, 맞잡은 이리아의 손바닥에서부터 점점 더 많은 양의 식은땀이 새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을 터다.

이리아의 입 안이 긴장으로 바싹 말랐다. 성기사단장인 루의 앞에서 차마 당당해질 수 없던 이리아는, 집중하지 않으면 들을 수도 없을 만큼 조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 사람이 죽는 장면을 눈앞에서 봤어, 루.]

[아가씨께서 죽인 게 아니잖아요.]

[총도 잡았어.]

[총을 잡는 것 정도는 루퀼렘의 교리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에요.]

[살아 있는 사람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기까지 했어.]

[……아가씨…….]

대마법사의 몸으로 루퀼렘의 교리를 어겼다. 루가 이제 어떤 말을 할까.

이리아는 더는 어린아이가 아니었고, 용감하게 비센티움에까지 도망쳐 나온 몸이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여전히, 루와 에즈메릴다 여왕의 화는 무섭기만 하다.

이리아는 곧 쏟아질 루의 호통을 기다리며, 두 눈을 꽉 감았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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