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가만히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이리아의 볼에 갑자기 부드러운 무언가가 와 닿았다.
깜짝 놀라 옆을 돌아보니, 덱스터가 이리아의 얼굴에 오른 열을 식히려는 듯, 서늘한 손등으로 그녀의 얼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자신은 이미 이리아의 한쪽 손을 독차지하고 있음에도, 그 광경을 목격한 루 아휜의 입매가 대차게 어그러졌다. 그가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덱스터를 노려보며 빈정거렸다.
[루퀼렘과 마법은 혐오하면서, 아가씨와는 결혼을 하고 싶으십니까? 참으로 엄청난 모순이군요, 덱스터 하워드.]
[루퀼렘과 마법이 점점 좋아지고 있으니, 꼭 모순인 건 아니군.]
[어디서 그런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덱스터와 루 아휜 사이서 보이지 않는 천둥 번개가 치는 듯했다.
루 아휜은 이후에도 한참 덱스터를 쏘아보다가, 난데없이 이리아를 향해 휙 고개를 돌렸다.
[아가씨, 옆의 비센티움인이 아가씨를 왜 데리고 있는지는 생각 안 해 보셨어요? 아가씨가 계시지 않아 루퀼렘의 방어가 약해졌을 때, 우리를 치려는 속셈인 게 분명해요!]
[고…… 공은 루퀼렘과 전쟁 안 하겠다고 했어, 루.]
[아가씨께는 그 말을 믿으시는 거예요? 저 남자는 영악합니다!]
[미안하지만, 그쪽의 척박한 땅을 탐낼 정도로 난 한가하지 않아.]
[한가하지는 않으나, 탐욕스럽죠.]
덱스터의 새까만 눈썹 끄트머리가 삐딱하니 올랐다. 그는 이리아의 뺨을 쓰다듬던 손을 천천히 거두고선 거만하게 팔짱을 꼈다.
루 아휜과의 말싸움을 준비하는 자세가, 한두 번 해 본 게 아닌 듯 매우 자연스러웠다.
[탐욕스럽기는 네놈이 더 탐욕스러운 것 같은데? 이리아를 20년 동안 성에 가둬 두고 일만 하게 했잖아?]
[그건 이 세상과 루퀼렘 왕국의 번영을 위해서였습니다.]
[너의 그런 면이 탐욕스럽다는 거다, 하얀 뺀질아.]
[호오? 그럼 당신이 지난 10여 년 동안 전쟁을 내 다른 민족의 터전들을 빼앗았던 일은 탐욕 때문이 아니었다는 겁니까? 그것 또한 당신네 제국의 번영을 위해서가 아니었는지?]
[두, 둘 다 그만해요…….]
점점 높아지는 언행에 이리아가 나서서 두 남자를 말려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둘은 이미 각자의 목에 핏대를 세운 상태였다.
덱스터가 화를 삭이기 위해 길게 심호흡한 후, 한 글자 한 글자를 찍어 내듯 정확히 대답했다.
[나는 우리 제국을 지키기 위해서 전쟁에 나섰던 것뿐이야. 그건 한 나라의 공작으로서, 그리고 군대를 이끄는 군단장으로서의 의무다.]
[의무를 참 중요시하시는군요. 그럼 제 일을 그만 방해하시죠, 아가씨를 루퀼렘 왕국으로 다시 모셔가는 것이 성기사단 단장으로서 저의 의무이니.]
[내 의무랑 너의 의무는 다르지. 이리아가 가기 싫다잖아. 네놈은 가기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고향으로 끌고 가려고 하고 있어.]
[미안하지만, 아가씨께서는 당신과 함께 있고 싶다고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아가씨의 확답도 듣지 않은 주제에, 헛된 꿈부터 꾸고 있군요.]
[두…… 둘 다 그만…….]
[성기사단 단장이라는 놈이 입을 꽤 잘 터는군.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입 터는 연습만 했나?]
[간혹 난처한 질문을 받아 곤경에 처한 아가씨를 구하기 위해 익힌 실력입니다.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당신이 참 딱하군요.]
[뭐? 이 내가 딱해……? 다시는 말을 못 하게 네놈의 앞니를 다 부숴 버려야겠구나, 루 아휜.]
어어? 급기야 이리아의 말간 눈망울이 거칠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너무나도 위험한 방향으로 고조되고 있었다.
팔짱을 끼긴 했지만, 덱스터는 언젠가부터 양 주먹을 거세게 움켜쥔 채였다. 그리고 이는 루 아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분명 웃고 있었으나, 곧 마법을 발동할 모양새였다.
[참으로 야만인다운 말솜씨입니다, 덱스터 하워드. 당신에게 우아함이란 도통 찾아볼 수가 없군요.]
[그렇다면 네놈 눈깔이 맛이 갔나 보군. 마법으로 고쳐야 하는 거 아닌가?]
[아. 그전에, 제가 기꺼이 마법으로 당신의 썩은 정신머리부터 고쳐 드리겠습니다.]
덱스터와 루는 동시에 일어나 서로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분노로 불끈거리는 덱스터의 턱을 본 순간, 이리아는 다급히 두 남자 사이에 제 몸을 던져야 했다.
[네놈이 정녕 넘지 않아야 할 선을 넘고 있구나.]
[먼저 선을 넘은 건 바로 당신입니다, 덱스터 하워드.]
[안 돼! 둘 다 그만해요!]
이리아가 소리를 지르며 힘껏 밀어낸 끝에, 둘은 서로의 멱살을 놓았다.
덱스터가 흐트러진 옷깃을 정리할 동안, 루 아휜은 그의 기나긴 머리카락을 빗어 내렸다.
루가 가슴을 쓸어내리는 이리아에게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돌아가요, 아가씨. 어차피 저 인간을 진심으로 사랑하시지도 않잖아요.]
[내가 이리아를 사랑해.]
[당신의 감정 따위는 알 바 아닙니다!]
언제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뱉었냐는 듯, 그가 덱스터를 향해 거칠게 소리쳤다. 생애 처음 듣는 루 아휜의 고함에, 이리아는 깜짝 놀라 한 발짝 물러나고 말았다.
하지만 그런 그녀와 달리, 덱스터는 몇 번이나 들어 봤는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루 아휜이 화가 날 정도로 태연한 덱스터의 가슴께를 가리키며 으르렁거렸다.
[아가씨를 놓아주시지 않는다면 여왕 폐하의 이름을 걸고, 비센티움 황실에 정식으로 전쟁 선포를 하겠습니다.]
[무슨 소리야, 루! 비센티움과 전쟁이라니, 미쳤어?!]
[네. 미쳤습니다, 아가씨 때문에! 아가씨께서 제멋대로 성을 나가 이 사달이 나 버린 것 아닙니까! 아가씨의 가출 때문에 여왕님께서 짊어지셔야 할 일의 무게는 늘어났고, 종교의 명예는 바닥을 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가씨로 인해 루퀼렘이 비센티움과 싸우기까지 해야겠군요! 거참 잘하셨습니다!]
아. 이어진 호통에, 이리아는 반사적으로 몇 걸음 더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분명 열이 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리아의 낯빛은 서서히 새파래졌다.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루 아휜의 양 뺨 또한 이리아와 더불어 차갑게 식어 갔다.
그가 시체처럼 창백해진 얼굴로 다급히 이리아에게 머리를 조아려 사죄했다.
[제가 실언했어요, 아가씨. 죄송합니다.]
[아냐.]
이리아가 고개를 내저었다. 실언이라고 했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루의 말은 틀린 부분이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이리아는 몹시나 서늘해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왜인지 앞으로 지금과 같은 상황이 수없이 반복될 것 같은 예감이 들자, 그녀의 머리가 깨질 듯 아파졌다.
[아…….]
일순간, 이리아의 시야가 새하얘지며 온몸이 크게 휘청였다. 루 아휜과 덱스터는 이리아에게로 동시에 손을 뻗었지만, 덱스터가 조금 더 빨랐다.
그가 황급히 끙끙대는 이리아를 부축해 그녀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이마는 조금 전보다 훨씬 더 뜨거웠다.
“이리아, 당신 아직 아파. 좀 더 쉬어야 해.”
“괘…… 괜찮아요. 놓아 주세요.”
이리아는 제대로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하면서도 부득불 덱스터의 품을 벗어났다. 루 아휜 앞에서 덱스터에게 인형처럼 안겨 있는 꼴을 보이기는 너무나도 창피했다.
그녀는 굳이 따라오겠다는 덱스터에게 괜찮다고 손짓하고선 로샨을 찾아 집무실을 나섰다. 덱스터는 루 아휜과 함께 비틀거리는 이리아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다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젠장, 이 꼴을 보일까 봐 침실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했던 건데…….”
이리아가 시야에서 사라지기 무섭게 루 아휜과 덱스터는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서로를 노려보았다.
전혀 색이 다른 두 남자의 눈동자에서 지옥 불이 이글거렸다.
이리아는 알지 못했지만, 사실 둘은 저택에서 처음 만난 순간부터 싸웠다. 덱스터는 제 약혼자를 지켜야 했고, 루 아휜은 제 아가씨를 모셔가야 했으니 싸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로샨과 함께 침실로 돌아온 이리아는 수면제를 먹고 다시 침대에 몸을 뉘었다. 덱스터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리아가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생각한 사람은 그가 아닌 루 아휜이었다.
루 아휜을 만나면 할 말들이 참 많았다. 루에게 들려줄 이야기들이 산더미인데도 불구하고, 루퀼렘에 언제 끌려갈지 몰라 그와 단둘이 있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루퀼렘 성에 다시 갇히는 건 절대로 싫다. 그 널따란 성에서 원치 않은 대마법사의 일을 했던 건 지난 20년만으로도 충분했다.
루 아휜은 분명 비센티움에서의 지난 세월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와의 만남을 진심으로 바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루가 제발 나를 루퀼렘으로 데려가는 걸 포기했으면 좋겠다.
이리아는 이루어지지 않을 소망을 수없이 되뇌며, 이불을 머리 위까지 끌어 올렸다.
***
이리아가 꿈도 꾸지 않을 정도로 깊은 잠에 빠져든 저녁. 루 아휜은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저택의 복도를 가로질렀다.
발걸음은 조용했으나, 저택의 사용인들은 모두 한 번씩 루 아휜을 돌아보았다. 루는 괴상한 생물체를 보는 것 같은 비센티움인들의 눈빛마저도 이미 익숙해졌다는 듯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덱스터의 집무실 문 앞에 다다르자마자, 그의 미소는 흔적도 없이 스러졌다.
루는 노크도 하지 않고선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그의 손에서 곧장 빛나는 화살이 나타나 덱스터를 향해 돌진했지만, 덱스터는 가볍게 고개만 움직여서 피했다.
날아간 화살은 덱스터 뒤에 걸려있던 애꿎은 액자만 찢어 먹었다.
왼쪽 눈알을 정확하게 노린 공격이었건만. 루가 낮게 욕설을 중얼거리고선 자세를 바로 했다.
“인내심의 한계가 왔습니다, 덱스터 하워드. 당신을 죽여서라도 아가씨를 모셔 가야겠습니다.”
예고 없이 들어온 데다가 마법까지 날렸지만, 덱스터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기다리고 있었다는 기색이었다.
덱스터가 천천히 제 거대한 몸을 일으켰다.
두 남자는 촛불 하나가 겨우 밝히고 있는 어두운 집무실 양 끝에 선 채, 한참 서로를 험악하게 노려보았다. 아주 짧은 찰나 루 아휜의 황금빛 눈동자가 희미하게 반짝이자, 덱스터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책상 아래를 짚었다.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미리 그려 둔 루 아휜의 손바닥 위 마법진에서부터 거대한 활이 튀어나왔다. 덱스터는 책상 아래에 숨겨 놓았던 소총을 꺼내 들었다. 루 아휜이 활시위를 당길 때, 그는 총을 장전했다.
철컥. 고요한 집무실 가득히 소름 끼치는 강철의 소리가 울렸다.
덱스터의 가늠쇠는 루 아휜의 목을 향하고, 루 아휜의 활은 덱스터의 목을 향했다. 두 남자는 아주 긴 시간, 목숨을 노리는 무기 끄트머리 너머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먼저 입을 연 자는 루 아휜이었다.
“저를 죽이면 바로 전쟁입니다, 덱스터 하워드.”
“머리가 좋지 않아 그새 잊었나 보군. 전쟁은 내 전공이야, 루 아휜.”
루 아휜의 활시위가 더 팽팽해지자, 방아쇠 위 덱스터의 손가락에도 힘이 들어갔다.
하나밖에 없는 촛불이 창틈으로 새어 들어온 바람에 어지럽게 흔들렸다. 두 남자의 얼굴 위로 진 그림자가 파도칠수록, 각자의 팔 힘줄이 점자 도드라졌다. 둘의 눈동자 속 동공은 긴장으로 한껏 확장된 지 오래였다.
하지만 그렇게 계속된 긴장감이 정상을 찍는 순간,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팔을 내렸다.
루가 기나긴 한숨을 내쉴 동안, 덱스터는 거대한 소총을 방 한구석으로 던졌다. 그는 책상 위에 가득히 쌓인 일감들을 거칠게 치운 후, 그 위에 삐딱하니 걸터앉으며 물었다.
“너희 루퀼렘인들은 어린아이를 일평생 성에 가두는 행위가 학대라는 생각은 안 해 봤나?”
“아가씨께서는 널따란 성에서 대접받으며 그 누구나 우러러보는 부귀영화를 누리셨습니다. 당신이 보기엔 아가씨의 삶이 학대로 가득 찬 삶 같습니까?”
“아이의 입에 원하지 않는 음식을 억지로 쑤셔 넣는 것도 학대란다, 하얀 뺀질아. 이리아가 자유를 원했다면 마땅히 자유를 주었어야지.”
후. 루가 마음을 다스리는 듯 길게 숨을 내쉬었다.
“아가씨의 지난 삶에 관하여 왈가왈부하지 마십시오, 덱스터 하워드. 저희도 아가씨께 자유를 드리지 못했던 사정이 있었을뿐더러, 당신은 감히 그분의 삶에 말을 얹을 자격이 없습니다.”
“‘사정’이 있었다고……? 그 ‘사정’이 무엇인지 이리아에게 설명은 했나?”
“설명해 드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겠습니다. 어차피 아가씨께서는 성을 나서면 안 되는 운명이시기에, 사정을 알려 드려 봤자 아가씨의 화만 돋울 겁니다.”
“그럼 너는 앞으로도 이리아에게 그녀가 왜 성에 갇혀 살아야 했는지 이유조차도 알려 주지 않겠다는 뜻이군.”
“예. 이유를 알려 드린다고 하여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아가씨께서는 다시 성으로 돌아와 루퀼렘의 전통과 신앙에 따라 군주의 일을 이어 하시면 될 뿐입니다.”
덱스터의 눈썹 끝이 점차 뒤틀렸다. 그는 더더욱 짙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가만히 루 아휜을 응시하다가, 갑자기 제 입가를 가렸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