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잠시 머뭇거리던 이리아가 소심하게 입을 열었다.
“저, 저는 하워드 공이 절 루퀼렘에 보낼 생각이신 줄 알았어요. 방에서 나와 보니 저택에 성기사들이 있던 데다가…… 공께서 최근 며칠 동안은 한 번도 제게 말을 걸지 않으셨잖아요.”
“난 그저, 잠시 혼자 마음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야.”
“마음을 추스를 시간이라니요……?”
“나도 자존심이라는 게 있어, 이리아.”
아. 이리아의 잇새서 외마디 탄식이 새어 나왔다. 추억을 다 토해 냈던 일주일 전의 일을 말하는 거였다.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이리아는 스스로가 너무나도 배려가 없는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녀가 땀방울이 흘러내리는 목덜미를 문지르며 슬쩍 시선을 피했다.
나직이 웃으며 다가온 덱스터는 이리아의 새빨간 곱슬머리를 귀 뒤로 조심스레 넘겨 주었다. 손등으로 조그마한 관자놀이를 살짝 스쳐 지나가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덱스터의 겉옷 안주머니에는 담배 한 개비와 라이터가 들어 있었다.
이리아는 불이 단 한 번도 붙지 않은 온전한 장초를 보자마자 작게 안도했다. 온전한 장초는 덱스터가 그녀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명이었으니까.
이리아가 살짝 옷 앞을 여미며 조심스레 질문했다.
“그럼 하워드 공과 저의 약혼은 아직 유효한 건가요?”
“당신과 나의 약혼이 아직 유효하냐고……?”
덱스터의 말끝이 어렴풋이 떨려 왔다.
덱스터가 커다란 손바닥을 들어 제 눈 앞을 가렸다. 몹시나 작아 보이는 그 모습은 덱스터와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았기에, 이리아의 눈썹이 제멋대로 축 내려갔다.
“당신은 여전히 우리의 약혼이 끊어지길 바라는구나, 이리아.”
“아…… 아니에요! 그런 의미로 한 질문이 아니었어요, 공.”
이리아가 반사적으로 얼굴을 가린 덱스터의 손을 덥석 잡았다. 놀랍게도, 그의 손바닥은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긴장으로 인해 나온 식은땀이었다.
이리아는 잠시 물기가 묻어 나온 그녀의 손끝을 멍하니 응시했다.
만일 이 자리에 있는 이가 과거의 그녀였다면, 분명 덱스터의 손이 다른 이유로 젖었다고 오해를 했을 터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진실을 알아 버렸다. 도저히 오해란 걸 할 수가 없다.
검은 앞머리 사이로 언뜻 보이는 덱스터의 두 눈은 한없이 처연했다. 그는 마치, 곧 이별의 선언을 들을 남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둘 사이서 관계의 끈을 쥐고 있는 이는 덱스터였다. 분명 덱스터만이 이 관계를 잘라 낼 힘을 가지고 있는데도, 그는 혹여 이리아에게 버림을 받을까 초조해하고 있었다.
내내 긴장으로 굳어 있던 이리아의 어깨가 스르르 풀렸다.
그녀가 조금은 어색하게 미소를 머금고선 말했다.
“약속한 석 달이 거의 되어 가는데도 아무 말씀이 없으시길래, 궁금해서 물어본 거였어요.”
하. 덱스터가 마치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처럼, 참았던 숨을 짧게 내뱉었다. 그는 이어 이리아를 따라 살짝 웃고선, 손등으로 그녀의 둥근 턱을 살포시 따라 그렸다.
“이리아, 우리의 약혼은…….”
[한낱 외국의 공작이 독단적으로 루퀼렘의 대마법사와 결혼을 할 수는 없습니다.]
아주 짧은 찰나에, 덱스터의 목 위로 거친 핏대가 오른 듯했다.
대체 언제 온 건지, 루 아휜은 집무실 문에 기대서 있었다. 그의 미성(美聲)을 듣는 순간 이리아는 깜짝 놀라 어깨를 떨었지만, 덱스터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눈 한 번 깜빡하지 않았다.
이리아가 겉옷을 여미며 허겁지겁 자리서 일어났다. 그녀가 두려움이 흠뻑 밴 눈을 하고선 다시금 도망치려고 할 때, 루 아휜이 무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도심 거리에서 아가씨를 봤던 사람들의 기억은 저와 성기사들이 전부 소거했습니다. 복잡한 작업이었기에 상당히 애를 먹었죠.]
[외…… 외국인에게 함부로 마법을 사용하면 안 되잖아, 루.]
[맞아요. 사용하면 안 됩니다.]
루 아휜이 도망치지도, 다시 앉지도 못한 채 엉성하게 서 있는 이리아에게로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그의 발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긴 머리카락이 어깨를 타고 아름답게 흘러내렸다.
[저는 여왕님의 허락 없이 루퀼렘의 커다란 규율 중 하나를 어겼어요, 아가씨. 오로지 아가씨를 지키기 위해서요.]
제자리에 굳어 버린 이리아의 눈썹과 어깨가 동시에 아래로 내려앉았다. 그녀는 고지식한 루 아휜에게 규율을 어기는 행위가 얼마나 큰 의미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제는 루 아휜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는데도, 도망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자신을 꿰뚫어 보는 듯한 루 아휜의 시선을 피하며, 이리아가 소심하게 고개를 수그렸다.
[……미안해.]
[아가씨께서 제게 죄송해할 필요는 없어요. 루퀼렘으로 돌아간 후, 에즈메릴다 여왕님께 어떤 핑계를 대야 할지가 난감할 뿐이죠.]
이리아는 그녀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루 아휜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당장이라도 손목을 낚아채 루퀼렘으로 끌고 갈 것 같아 겁이 났지만,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머리 위에서부터 루 아휜의 부드러운 물음이 들려왔다.
[이제 저와 대화를 나눌 마음이 조금이라도 생기셨나요?]
이리아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새빨간 머리칼 사이로 루를 훔쳐보았다.
그는 입가에 여느 때보다 더더욱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저희는 대화가 필요해요, 아가씨. 계속해서 자리를 피하기만 해서는 해결되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그 누구보다도 잘 아시잖아요.]
사실, 루의 말이 옳긴 했다. 성기사들과 이미 한 지붕 아래 함께 있는 만큼, 이리아도 계속해서 도망만 다닐 순 없었다.
사람 간의 대화가 중요하다는 건 덱스터와의 경험으로 더 뼈저리게 깨달았다. 이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루는 더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자리로 이끌었다.
루와 이리아가 딱 붙어 앉으니, 둘을 줄곧 지켜보던 덱스터의 미간이 서슴없이 일그러졌다. 그의 인상은 루가 이리아의 뺨을 매만질 때 최악으로 구겨졌다.
[못 본 사이에 얼굴이 많이 상하셨어요, 아가씨.]
[아…… 아파서 그래.]
부디 아프지 마세요, 아가씨. 루가 나직이 속삭이며 이리아의 조그마한 관자놀이를 쓰다듬었다.
아주 긴 시간 떨어져 있었음에도, 루의 손길은 여전히 익숙했다. 이리아는 이마를 어루만지는 따스한 손바닥을 몹시나 오랜만에 느끼며, 자기도 모르는 새 미소 지었다.
잔잔하게 울렁이는 루 아휜의 두 황금빛 눈동자에서부터 사랑이 흘러나오는 듯했다.
그가 이리아의 새빨간 눈썹을 엄지로 따라 그리며 입을 열었다.
[전해 드릴 말들이 너무 많아 어느 것부터 꺼내야 할지 모르겠네요. 우선, 에즈메릴다 혼 루미에르 여왕님께서는 매우 건강하십니다. 얼마 전에 왼쪽 눈을 다치시긴 했지만…… 건강에는 아무 문제가 없으세요.]
여왕이 눈을 다쳤다는 대목에서 루 아휜은 살짝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혹시 크게 다치신 건지. 이리아가 걱정을 담아 루를 올려다보자, 그가 다시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외국에 있는 그녀가 걱정할 만큼 크게 다친 건 아니라는 뜻이었다.
[비센티움에서 아가씨와 만났다는 소식은 아직 여왕님께 전해 드리지 않았어요. 그럴 확률은 낮지만, 혹여 여왕님께서 아가씨의 안위를 두고 비센티움 황실을 자극하실까 걱정이 되어서요. 아가씨께서 사라지신 이후로, 여왕님이 많이…… 음, 예민해지셨거든요.]
아아. 이리아의 잇새서 앓는 듯한 긴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일전에 군부대에서 마법으로 에즈메릴다 혼 루미에르 여왕의 상태를 확인했을 땐 몸도 마음도 상당히 건강해 보였는데, 착각이었나 보다.
여왕이 많이 예민해졌다는 말은 분명 루 아휜이 많이 미화했을 터였다. 스스로 원해서 루퀼렘 성을 탈출했으나, 막상 여왕의 근황을 들으니 그녀에게 미안한 감정이 드는 건 피할 수 없었다.
이리아의 긴 속눈썹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루는 아직 익숙지 않은 그녀의 녹빛 눈동자를 지그시 들여다보다가, 부드럽게 손을 마주 잡으며 말했다.
[카즈웰 4세가 아가씨를 공격했던 일은 옆의 야만인에게 들었어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감히 아가씨께 자객을 보내다니, 루퀼렘에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사건이죠.]
[루. 마, 말을 조금 조심스럽게…….]
이웃 제국의 황태자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라고 칭하다니……. 이리아가 어색하게 웃으며 양옆에 앉아 있는 두 남자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셋 중 당황한 이는 이리아뿐이었다. 루는 이리아의 눈초리를 받자마자 어깨를 으쓱했고, 덱스터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옆의 야만인’이라는 말을 더 불쾌하게 여기는 듯했다.
애써 태연한 척했으나, 카즈웰 4세는 여전히 이리아에게 큰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녀의 손바닥이 서서히 식은땀으로 젖기 시작하자, 루가 이리아의 손을 더 강하게 마주 잡았다.
[카즈웰 4세에 관해서는 너무 심려치 마세요, 아가씨. 그는 당분간 아가씨께 신경을 쓸 여유가 없을 거예요. 황태자비가 셋째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이 며칠 전에 밝혀졌거든요.]
[황태자비가……? 그건 나조차도 처음 듣는 소식인데.]
[그렇겠죠, 덱스터 하워드. 당신이 혐오한다는 그 ‘마법’으로 은밀하게 알아낸 사실이니 말입니다.]
덱스터가 루퀼렘어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데도, 이리아는 그가 루퀼렘어를 내뱉자마자 내심 깜짝 놀랐다.
비센티움어로 대화할 때는 잘 몰랐는데, 루퀼렘어를 하니 8년 전의 목소리와 정말로 비슷했다.
잠시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덱스터가 턱을 짚으며 말했다.
[황태자비가 임신이라면…… 그녀의 회임 소식은 당분간 제국민들에게도 철저히 비밀에 부치겠군.]
[예, 분명 그럴 겁니다. 카즈웰 4세는 여러모로 약점이 많은 녀석이니까요.]
이리아가 말을 조심하라는 뜻으로 또 한 번 눈길을 주었지만, 루는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카즈웰 4세는 겨우 15세의 나이에 지금의 황태자비를 맞아, 슬하에 두 아이가 있었다. 두 아이 모두 마땅히 황위를 물려받을 수 있는 아들이었지만, 첫째 아들은 선천적인 발달 장애를 지닌 탓에 계승권을 잃어버렸다.
황태자비가 둘째를 임신했을 당시, 카즈웰 4세를 포함한 온 비센티움 황실은 또다시 장애를 지닌 아이가 태어날까 노심초사했었다. 아이의 장애는 황위 계승의 문제를 떠나, 제국민들이 황태자비의 건강과 황실의 유전병 보유 여부를 의심토록 만들기 때문이었다.
과거 던햄 공이 비센티움 왕국과 팔런 왕국을 통합할 때, 그는 팔런 왕국의 공주를 세 번째 부인으로 맞았다. 하지만 당시 공주는 근친혼으로 인한 병들을 앓던 중이었고, 그 결과 던햄 공은 정신적으로 심약한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아이는 주변의 여론을 견디지 못하고 성인이 되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힘과 권력을 중시하던 비센티움 제국에서 황족의 자살은 너무나도 충격적이었기에, 후대 비센티움인들은 근친혼이나 유전병에 절로 민감해졌다.
카즈웰 4세의 둘째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난 덕에 비센티움 황실은 겨우 제국민들의 유전병 의심을 잠재울 수 있었다. 하지만 만일 셋째 아이가 첫째처럼 건강하지 않게 태어난다면, 의심은 또 한 번 불거질 테고 그때는 카즈웰 4세의 황위 계승이 흔들릴 가능성이 있다.
카즈웰 4세는 아내의 배 속 아이에 온 신경이 가 있어 루퀼렘과의 전쟁은 뒤로 제쳐 두었을 게 분명했다.
이리아는 안심했지만, 한편으로는 아이의 건강과 황위에 목을 매는 카즈웰이 안쓰럽기도 했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