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화 (66/109)

65화

13.

서투르게 올려 묶은 빨간 머리카락 사이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이리아는 땀을 훔쳐 낼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침대 위에 하염없이 앉아 있었다.

멈추지 않을 것만 같던 비도 결국에는 멈추었다. 이리아는 비가 멈추자마자 다시금 빨간 머리카락의 ‘씨시 힐데어’로 돌아왔다.

하녀들과 루시어스 데이즈먼은 비가 멈춘 후에야 침실에 들어와 아픈 이리아를 보살펴 주었다.

자신의 기나긴 이야기를 끝낸 덱스터는 아주 잠깐 얼굴을 비추기만 할 뿐, 단 한 번도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는 마치 이리아가 아직도 잘 살아 있는지만 확인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조용하다.’

문이 굳게 닫혀 있는 탓에, 온 세상이 고요했다. 루 아휜을 만나고, 비센티움의 도심 한가운데서 정체가 발각되었다는 사실이 모두 거짓말 같다.

이리아는 어두컴컴한 천장 위에서 어지럽게 흔들리는 촛불의 그림자를 구경하며 곰곰이 생각했다. 의문점들이 참 많았다.

약속한 석 달이 가까워지고 있는데, 덱스터 하워드와 나의 결혼은 어떻게 되는 건지. 카즈웰 4세는 왜 아무런 움직임이 없으며, 지금쯤 루 아휜은 어디에 있는 걸까.

아마 지금쯤 비센티움 제국은 루퀼렘에서 도망쳤던 대마법사 이리아가 발각된 일로 난리가 났을지도 모른다. 저 밖이 온갖 소란으로 시끄러울 수도 있는데, 대부인의 침실은 한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이리아가 한창 넋을 놓고 있을 때, 문가에서 가벼운 노크가 들려왔다.

단조로운 세 번의 노크. 확실히 덱스터는 아니었다.

그리고 역시나, 문이 열리며 금발을 양 갈래로 예쁘게 땋아 내린 로샨이 들어왔다.

“아가씨. 약 드실 시간이에요.”

로샨은 반쯤 초점을 잃어버린 이리아의 녹빛 눈동자를 보고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그녀는 죽과 약이 있는 쟁반을 내려 두고선, 식은땀이 맺혀 있는 이마에 손을 올렸다.

“가벼운 미열이 있긴 하지만, 전보다는 확실히 몸 상태가 괜찮아지셨네요.”

“그, 그럼 이제 슬슬 밖에 나가도…….”

“아직은 안 돼요, 아가씨.”

생기가 돌았던 양 볼이 단번에 다시 새하얘졌다. 시무룩해진 이리아는 어깨를 잔뜩 웅크린 채로 로샨이 주는 죽을 아이처럼 받아먹었다.

비가 그친 후 들어온 루시어스 데이즈먼은 이리아에게 침실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덱스터의 뜻이니 어길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라는 말까지 붙였다.

방 안에 갇히는 건 루퀼렘에서 토악질이 나올 정도로 지겹게 당했다. 이리아는 침실에 틀어박혀 있는 것만큼은 지키지 못한다고 따지고 싶었지만, 당시에는 몸이 아파 숨을 내쉬는 것마저도 힘들었다.

로샨을 포함한 하녀들은 감기가 혹여 더 심해질까 걱정하여 이리아를 방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한 거라며, 덱스터 대신 이런저런 핑곗거리를 대 주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이 무색하게, 이리아의 기분은 절대로 나아지지 않았다.

로샨은 이리아가 수많은 알약을 모두 삼킨 걸 일일이 확인한 후에야 방을 나섰다. 이리아는 로샨이 문 뒤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녀의 등에서부터 눈을 떼지 않았다.

문이 닫히자마자 다시금 짙은 정적이 찾아왔다. 이리아는 조금 전에 그랬던 것처럼 천장의 그림자를 잠시 구경하다가, 홀린 듯 주섬주섬 일어났다.

그리고, 천천히 문고리를 돌렸다.

‘열린……다?’

놀랍게도, 문이 열렸다.

마법이나 도구를 쓸 필요도 없이 아주 멀쩡하게, 평소대로 활짝 열렸다!

루퀼렘에서 무녀들이 방문을 잠가 놓았던 것처럼, 덱스터가 걸쇠를 걸어 놓았을 줄만 알았다. 그래서 근 일주일 동안 감히 문고리를 돌릴 엄두조차 내지 못했었는데.

‘이, 이럴 수가…….’

열려 있는 문을 두고 방 안에서 짜증만 내며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니. 일순간, 이리아는 저 자신이 천하의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복도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은 샛노랗고 화창했다. 저택의 기나긴 복도 또한 침실과 마찬가지로 매우 조용했기에, 이리아는 잠시 저택의 모든 사람이 증발해 버린 엉뚱한 상상을 했다.

하지만, 상상은 상상일 뿐이었다. 이리아는 정원을 돌아다니는 하얀 머리카락의 사람들을 보자마자 깜짝 놀라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나고 말았다.

혹시라도 눈이 마주칠까, 그녀가 황급히 새빨간 머리카락을 풀어 헤쳐 앞을 가렸다.

‘……성기사들이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창백한 피부, 티 하나 없이 하얀 머리카락과 펑퍼짐한 옷소매는 분명 루퀼렘 성기사의 것이었다.

혹시 약 기운 때문에 환각을 봤나 싶어 이리아가 한 번 더 정원을 확인했지만, 성기사들이 확실했다.

그러잖아도 열이 오른 이리아의 머릿속이 핑핑 돌기 시작했다. 눈앞에 별이 보이는 듯했다.

이리아는 성기사들이 자신을 루퀼렘으로 끌고 가기 위해서 기다리는 중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도주한 대마법사라 해도 감기가 든 몸을 억지로 끌고 갈 수는 없으니, 감기가 나을 때까지 기다리는 거다.

‘덱스터 하워드는 오랜 짝사랑에 지쳐서 나를 포기해 버린 걸까……?’

그렇지 않다면, 덱스터가 자신의 저택에 이토록 많은 수의 성기사들을 들일 리가 없었다.

이리아는 덱스터가 당장 루퀼렘으로 데려가라며 성기사들 앞에 그녀를 내던진 기분이었다. 최근 며칠 동안 말을 하지 않던 덱스터의 모습이 생각나며, 침실 밖으로 나온 게 뒤늦게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약이 제대로 들지 않았는지, 머리가 찢어질 듯이 아프기 시작했다.

방에서 나온 김에 두통약을 받고 돌아가야겠다. 분명 허락 없이 침실을 나왔다며 로샨에게 잔소리를 들을 게 뻔했지만, 곧장 침실로 돌아간다면 이 두통을 견디며 하녀들이 올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이리아는 약을 위해 로샨에게로 가지 못했다.

계단을 내려가려는 찰나, 그녀의 시야에 하얀 머리칼의 아름다운 남성이 들어온 것이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며 말했다.

[아가씨.]

[……루……?]

루 아휜의 기나긴 머리카락이 복도를 가로지르는 바람결에 나부꼈다.

계단 아래 선 그는 루퀼렘 특유의 눈동자를 빛내며 한참 이리아를 올려다보다가, 천천히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가 한 계단 위로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 이리아의 정신이 퍼뜩 돌아왔다. 그녀는 아픈 머리도 잊고선 다급히 계단을 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가쁜 숨을 허덕이며 뜀박질하는 이리아의 등 뒤로, 루 아휜의 고함이 울려 퍼졌다.

[아가씨, 제발 서세요! 이곳에선 아무리 도망치셔도 소용없습니다!]

[그래도 싫어! 따라오지 마!]

비센티움 도심에서 도망칠 당시 상처가 터져 버린 탓에, 이리아의 발목에는 두꺼운 붕대가 감겨 있었다. 절대로 뛰거나 과하게 움직이지 말라던 의사의 말이 생각났지만, 이리아는 뜀박질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아가씨!]

[싫다니까-!!]

고개를 돌릴 때마다 매서운 속도로 뒤쫓아오는 루 아휜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두 황금빛 눈동자 속에서 이번에는 절대로 잡고 말겠다는 의지가 불타오르자, 이리아는 절로 식겁했다. 마치 그녀를 쫓아 거대한 호랑이 한 마리가 달려오는 느낌이었다.

차라리 루가 먼저 제자리에 선다면 이 뜀박질도 멈출 수 있을 것만 같은데, 그는 끝까지 집요했다.

복도 한가운데에 누군가가 나타나는 순간까지도, 둘은 하지 않아도 될 추격전을 펼쳤다.

“……아!”

달려가던 이리아의 뺨이 갑자기 등장한 인영 속에 폭 파묻혔다. 깜짝 놀란 그녀가 흐트러진 새빨간 머리 사이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덱스터 하워드의 날렵한 턱선이 눈에 들어왔다.

덱스터는 달려와 부딪친 이리아를 양팔로 끌어안았다. 그의 거대한 손이 파르르 떨리는 이리아의 뒷덜미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덱스터가 둥그런 이마 위의 식은땀을 훔쳐내며 으르렁댔다.

“이리아가 싫다잖아.”

어느덧 제자리에 선 루 아휜이 덱스터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이리아를 의식해서인지, 루는 어금니를 악물면서도 한없이 아름다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와 저의 문제입니다. 당신은 빠지시죠, 덱스터 하워드.”

“네가 언급한 그 ‘아가씨’가 내 약혼자인 이상 그럴 순 없지, 루 아휜.”

“합의되지 않은 약혼을 제가 인정할 것 같습니까?”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이리아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두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가빴던 숨이 진정되자마자, 이리아의 잇새서는 세찬 딸꾹질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덱스터가 괜찮다는 뜻으로 축축하게 젖은 그녀의 목덜미를 몇 차례 더 문질러 주었다.

루 아휜이 이리아의 새빨간 정수리를 정리하는 덱스터를 더욱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는 한껏 뜨거워진 숨결을 내뱉고선, 이리아에게로 손을 뻗었다.

[아가씨. 제게로 오세요.]

“가지 마, 이리아. 안 가도 돼.”

이리아는 또 한 번, 혼란스러운 눈으로 두 남자를 바라보았다.

제 마음을 전부 고백했다가 한동안 말도 걸지 않은 남자다. 덱스터에게 이렇게 안겨 있는 상황이 그녀의 입장에서는 참 이상했지만, 그렇다고 루 아휜에게 가고 싶지도 않았다.

문득, 이리아의 머릿속에 열려 있던 침실 문이 떠올랐다.

지금 루 아휜의 손을 잡는다면, 다시는 조금 전처럼 방문을 활짝 열지 못할 수도 있다.

이리아의 인생에서 잠겨 있던 문과 열려 있던 문의 차이는 컸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덱스터의 허리께를 꼭 껴안고 있었다.

루 아휜의 아름다운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아가씨…….]

하지만 그와 반면, 덱스터의 입가에는 승리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루 아휜을 향해 싸늘한 조소를 내던진 후, 이리아를 타이르며 어디론가 이끌었다.

이리아는 덱스터의 팔 아래서 몇 번이고 루 아휜을 돌아보았다. 널따란 복도 한가운데 우두커니 선 그는 멀어지는 이리아에게서 끝까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덱스터가 향한 곳은 그의 집무실이었다. 습관적으로 제일 익숙한 장소에 이리아를 데려온 듯싶었다.

그가 붕대가 칭칭 감긴 이리아의 발목을 살피며 물었다.

“몸 상태는 어때?”

“괜찮아요.”

당연히,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이리아의 몸은 언뜻 봐도 상당히 좋지 않아 보였으니까.

루 아휜을 피해 계단을 뛰어오른 탓에 상태가 악화하였나 보다. 덱스터가 이리아의 뺨 위로 조심스레 제 손등을 대었다.

“괜찮기는……. 여전히 얼굴이 뜨거워.”

옷차림은 또 왜 이래? 덱스터는 불만스럽게 덧붙이고선, 곧바로 겉옷을 벗어 이리아의 등 뒤에 둘러 주었다. 감기에 걸린 그녀가 슬립 차림으로 나온 게 영 마음에 안 드는 듯했다.

강하게 끼쳐 온 박하 향을 들이마시며, 이리아는 터무니없이 긴 덱스터의 옷소매를 만지작거렸다.

어느덧 고개를 푹 수그린 그녀의 머리 위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 아휜은 당분간 저택에서 지내기로 했어. 그가 당신을 봐 버린 이상, 다른 곳으로 보내는 건 불가능해. 그리고 오히려 루 아휜이 곁에 있는 게 당신한테도 편할 거야.”

“편하다니요. 루는 저를 루퀼렘에 다시 데려가려고 할 거예요, 공…….”

이리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창문 맡에 팔짱을 끼고 선 덱스터는 새까만 눈동자를 빛내며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안 만들어. 난 쉽게 당신 포기할 생각 없어.”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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