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별이 휘황찬란하게 피어난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이리아는 곧 부대의 가장 높은 언덕 위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펄럭이는 치맛자락을 따라, 사냥개가 컹컹 짖으며 함께 달렸다.
높다란 언덕 꼭대기에 선 이리아는 쏟아지려는 별들을 기어코 받으려는 듯, 두 팔을 앞으로 뻗었다.
그리고,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아!”
아아. 덱스터의 잇새서 희미한 신음성이 새어 나왔다.
둔한 이리아 아델리어는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세상을 다 가졌다는 것을.
별 아래서 웃음을 터뜨린 그 순간, 덱스터의 세상을 또 한 번 통째로 앗아가 버렸다는 것을.
다시금 세찬 밤바람이 불어와 이리아의 새빨간 머리카락을 휘날렸다. 이리아가 머리카락을 넘기기 위해 고개를 숙였을 때, 덱스터는 그녀의 말간 눈동자와 맞닥뜨렸다.
덱스터 하워드와 이리아 아델리어.
두 남녀의 시선이 별 그림자가 잔뜩 진 허공에서 만났다.
분명 저 먼 언덕 위에 서 있는데도, 이리아의 얼굴이 무척이나 가까이서 보이는 듯했다. 덱스터는 커다랗게 뜨인 그녀의 녹빛 눈동자, 그 위의 새빨간 속눈썹 한 올까지도 차마 놓칠 수가 없었다.
문득 세상이 우뚝 멈춘 듯한 느낌이 들며, 이리아를 만난 모든 순간이 덱스터의 머릿속에서 주마등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루퀼렘 성에서의 첫 만남과 헤어짐. 7년이란 시간이 지난 후의 재회. 꽃이 피는 봄부터 시작하여 지나간 세 개의 계절…….
그리고, 마침내. 지금 이 순간까지.
주마등의 끝에서 바로 앞의 이리아를 마주하자, 덱스터는 끝내 와르르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그는 밤하늘 아래의 이리아로부터 빠르게 달아나, 다시금 짙은 그림자 속에 모습을 감추었다.
드디어 성공한 줄만 알았는데, 아니었다.
덱스터는 여전히, 이리아 아델리어를 놓을 수가 없었다.
‘너를, 도저히 놓을 수가 없어…….’
뜨거운 눈물 한줄기가 뺨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렸다. 겨우 하나였던 물줄기는 점점 그 수를 늘려 온 얼굴을 적셨다.
그렇게 덱스터는 어리고 어렸던 시절에 전쟁터에 몸을 맡긴 이후, 처음으로 울었다.
이리아 아델리어를 담은 기억들은 흐려지지도, 잊히지도 않을 정도로 머릿속에 강렬하게 각인되어 버렸다. 겨우 세 개의 계절 만에, 그녀는 덱스터의 온 사랑을 저 혼자서 독차지하고 가져가 버렸다.
전쟁이 끝나면, 이리아 아델리어와는 헤어진다. 하지만 설령 그녀와 헤어진다고 해도, 절대로 이 사랑은 끝나지 않을 거다.
나는 분명 볼 수 없는 이리아를 일평생 혼자서 그리워하고, 죽을 때까지 사랑할 테지.
덱스터는 볼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잘 알고 있었다.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와 어머니를 10년도 더 넘은 세월 동안 그렇게 사랑하고 있었으니까.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그런데 그 위에 이리아 아델리어까지 그리워하며 살아야 한다니, 덱스터는 다가오는 그의 미래가 미치도록 두려워졌다.
‘이렇게 될 바엔 차라리…….’
차라리, 세상이 지금 끝나 버렸으면.
부모님이 살해를 당했을 때조차 세상의 멸망을 바라지 않았었다. 과거의 그는 절망을 극복하기 위해서 스스로 강해지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이제는, 차라리 세상의 끝을 원한다.
이리아 아델리어 때문에 깎이고 또 깎여, 덱스터는 너무나도 나약해져 버렸다.
휘황찬란하게 피어난 별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대지를 환히 비추었다. 밤임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밝은 하늘을 만끽하는 와중, 덱스터만은 어둠에 숨어 있었다.
그는 별들이 사라지고, 태양이 떠오르는 순간까지 하염없이 세상의 끝을 소망했다.
덱스터는 사실, 이날 이후로 자신에게 닿는 이리아의 시선이 강렬해졌단 걸 알고 있었다. 종전의 날이 다가오는 순간까지 몇 번이고 그녀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는 이리아를 보지 않는 시간 동안 가슴속의 사랑이 옅어져, 그녀와의 마지막이 조금이라도 덜 괴로웠으면 했다.
하지만 당연히 이리아는 이러한 덱스터의 사정을 몰랐다. 그녀는 마지막 날, 찢어진 셔츠를 손에 쥐고선 쪼르르 그를 찾아왔다.
“하…… 하워드 공.”
이리아가 망토를 잡아당기는 순간, 덱스터는 그의 표정을 있는 힘껏 갈무리해야 했다.
정말 원망스럽게도, 이리아 아델리어는 마지막까지 한없이 예뻤다. 지난 세 개의 계절 내내 이리아 때문에 아프고 괴로웠는데, 덱스터의 두 눈에 들어온 그녀는 여전히 예쁘기만 했다.
덱스터는 찢어진 튜닉 따위에 관심 없었다. 그는 손톱이 파고들 정도로 세게 주먹을 쥔 채로 이리아의 마지막 모습을 감상하다가, 등을 돌렸다.
“죄송해요. 정리하다가 그만 실수로 찢어 버렸어요.”
“됐어. 그건 불에 태워 버려.”
“그…… 저, 정말로 죄송…….”
“할 말 끝났으면 가.”
“죄, 죄송해요…….”
감정을 절제해야 한다고 주술을 외듯 되뇌었지만, 다 헛수고였다. 아주 찰나의 순간, 덱스터의 가슴 안쪽에서부터 슬픔과 분노가 울컥 차올랐다.
이리아 아델리어와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대화라는 걸 나눠 본 적이 없다. 서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마지막 순간에도, 이리아는 그깟 죄송하다는 말만 중얼거린다.
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덱스터는 결국, 그녀를 향해 거칠게 고함치고 말았다.
“죄송하다는 말 좀 그만할 수 없어?! 나한테 할 말이 죄송하다는 것밖에 없나?!”
“그, 그럼 제가 공한테 무슨 말을 해야…….”
이리아는 단번에 두려움에 떨었다. 그녀의 떨리는 눈빛을 보는 것만으로도, 덱스터는 이리아가 자신을 무서워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쯤에서 멈추어야 했다. 하지만 덱스터는 터져 버린 감정을 차마 다시 담아 낼 수 없었다.
그는 이리아에게 처음으로 제 순수한 감정을 온전히 내보이며, 목이 터지도록 소리 질렀다.
“너도, 죄송하다는 말도, 이곳도 이제는 모두 지긋지긋해! 네가 별 뜻 없이 내뱉은 말 한마디를, 아무 생각 없이 내보인 행동 하나하나를 밤새워 곱씹을 때마다 난 등신, 머저리가 된 기분이란 말이다!”
그의 눈앞에서 주체할 수 없이 떨던 이리아는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하얀 볼을 타고 또르르 흘러내리는 눈물 한 방울을 보자마자, 덱스터의 새까만 눈동자에도 서서히 물기가 차올랐다.
이 상황에서 울어야 할 사람은 이리아 아델리어가 아니라 그 자신이었다. 만남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상처 준 사람은 이리아였고, 상처받은 사람은 덱스터였다.
그런데 왜 마지막 순간에는 이리아 아델리어가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 있는지. 덱스터는 더더욱 서러워졌다.
이리아는 어느새 눈물을 걷잡을 수 없이 한가득 쏟고 있었다. 덱스터는 이를 악물고 흐느끼는 이리아가 불쌍했지만, 저 자신도 마찬가지로 너무 불쌍해서 절규를 멈출 수가 없었다.
“그래, 차라리 잘됐어. 오늘이 마지막 날이니 다시는 네 얼굴을 볼 일 없겠지. 다시는……다시는 멀어지는 네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볼 일도 없을 거야! 겨우 너 따위 거 때문에 나의 언행을 밤새워 곱씹을 일도, 이딴 비참한 기분을 느낄 일도 없을 거라고-!!”
이리아의 잇새서 끅끅대는 소리가 새어 나올 동안, 덱스터는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힘겹게 숨을 내쉬던 그는 문득 이 마지막 순간에, 또 한 번 사랑을 다 끊어 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최악의 기억으로 추억을 끝맺음한다면, 이리아와의 과거를 돌아보지 않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그의 뇌리를 강하게 지배했다.
덱스터가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들어 이리아의 얼굴에 들이밀었다.
그는 곧 눈물이 흘러내리려는 눈가에 힘을 주고선, 한 글자 한 글자 찍어 내듯 내뱉었다.
“돌아가는 길에 내 눈에 띄지 마. 혹여 눈이라도 마주쳤을 땐, 곧바로 죽여 버릴 테니까.”
“아…….”
이리아는 눈앞에 들이밀어진 손가락과 덱스터의 얼굴을 몇 번이고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매섭게 흔들릴수록, 덱스터는 심장이 찢어지는 기분이었다.
이미 내뱉어 버린 말을 후회하기 전에, 그가 떨리는 숨결을 내뱉으며 천천히 등을 돌렸다.
“이제 제발 가. 네 얼굴을…… 네 얼굴을 보기가 너무 힘들어.”
인생 처음으로 가졌던 한 여인을 향한 사랑도, 이리아 아델리어와의 관계도, 7년 전부터 시작된 추억의 흐름까지도 뎅강 잘라 냈다.
나와 이리아 아델리어는 서로를 최악으로 기억할 거고, 이로써 다시는 과거를 추억하지 않을 거다.
양 손바닥에 얼굴을 푹 파묻은 덱스터는 도망치는 이리아의 발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서 있었다.
곧이어 그의 어깨가 희미하게 들썩이더니, 손 틈으로 투명한 눈물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소리 없는 흐느낌은 고요한 계곡을 가득 메웠다.
홀로 남은 덱스터는 이리아만큼이나 많이 울었다.
오열한 덱스터의 얼굴은 오로지 콘라드만이 봤다. 콘라드는 그의 양 뺨이 눈물로 얼룩졌다는 걸 알아차리자마자 피우던 담배를 떨어뜨렸다.
“야, 너 얼굴이 왜…….”
덱스터는 실핏줄이 다 터져 새빨개진 눈으로 콘라드를 응시했다.
아주 한참 아주 말도 하지 않던 그는, 입가에 잔잔히 미소를 머금으며 답했다.
“다 끝났어.”
이로써, 세 계절을 앗아 갔던 덱스터 하워드의 사랑은 마침내 끝이 났다.
아니, 끝이 난 줄만 알았다.
마지막 날 밤. 술에 취한 이리아 아델리어가 ‘나쁜 놈’을 부르짖으며 막사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렇게, 다 끝난 줄만 알았다.
***
이리아 아델리어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거칠게 떨리는 눈망울로 바로 앞에 앉아 있는 덱스터를 응시했다.
이리아는 알지 못했던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내내, 덱스터는 무표정이었다. 그는 마치 다른 사람의 사랑 소설을 읊는 듯 무덤덤하게 모든 기억을 토해 냈다.
하지만 그렇게 길고 길었던 이야기가 끝났을 때, 덱스터는 너무나도 지쳐 보였다.
이리아를 마주한 새까만 눈동자 속에는 온갖 감정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다. 지난 세월 덱스터가 가슴속에 지녔던 감정을 헤아릴 수 없었기에, 이리아는 방을 나서는 그를 차마 잡을 수 없었다.
쿵. 방문이 닫히고, 쉬라는 말 한마디도 없이 나가 버린 덱스터는 창밖의 비가 멈춘 후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홀로 남은 이리아는, 그의 향이 감도는 침대에 아주 긴 시간 멍하니 앉아 있어야 했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