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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64/109)

63화

겨울이 다가오며, 덱스터의 눈 아래는 하루가 지날수록 퀭해졌다.

얼굴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 이는 콘라드였다. 그가 혹시 최근 불면증을 앓고 있냐고 물었을 때, 덱스터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건 거짓말이다.

덱스터는 사실, 인생에서 가장 극심한 불면증을 앓는 중이었다.

이리아와의 키스 이후로, 그는 밤에 깊은 잠을 못 잤다.

비록 술에 취해 한 것이었지만 키스는 미치도록 황홀했다. 이리아의 입술은 그가 수없이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부드러웠고, 그녀가 내뱉은 숨결은 달콤했다.

덱스터는 고요한 막사에 누워 있으면 그 순간이 자꾸만 기억나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술기운이 느껴지던 입맞춤이 떠오르기만 하면 심장이 제멋대로 펄떡였다.

잠을 자지 않으니 몸은 당연히 하루하루 녹초가 되었다. 하지만 콘라드 메이필드는 그런 덱스터의 상태도 모르고선, 감정을 자꾸만 건드렸다.

“덱스터 하워드! 씨시가 손톱 잘라 달란다-!!”

콘라드의 고함이 온 부대를 쩌렁쩌렁 울렸다. 그는 이리아를 제 팔목에 반쯤 대롱대롱 매단 채로 다가오고 있었다.

덱스터가 본 이리아의 얼굴은 울기 일보 직전이었다. 점점 크게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는 잘게 떨리면서도 다급했다.

“아…… 안 자를래요. 저, 저 혼자 할 수 있어요. 싫어요, 안 자를래요.”

“왜 그래? 너 나 못 믿냐? 저 양반이 손톱 하나는 진짜로 잘 자른다니까?”

“그, 그래도 싫어요. 그냥 아……안 자를래요!”

아. 이리아 아델리어의 저 울상인 얼굴을 보니 갑자기 심술이 난다.

“앉아.”

이리아가 분명 불편해할 거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덱스터는 그의 옆자리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판을 만들어 낸 콘라드는 그의 행동을 보자마자 씩 미소 지었다.

이리아는 우물쭈물하면서도 순순히 자리에 가 앉았다. 덱스터는 갑자기 강하게 끼쳐 온 그녀의 체향을 삼키며, 뽀얗고 자그마한 손을 감싸 쥐었다.

루퀼렘 성에서 나온 후 지난날의 고난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리아의 손에는 어느덧 자잘한 굳은살들이 박여 있었다. 덱스터는 그녀의 거칠어진 손마저도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딱했다.

덱스터는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정성스럽게 손톱을 잘라 주었다. 그건 이리아를 짝사랑하는 그의 마음에 대한 위로 겸, 소심한 증명이었다.

일부러 숨을 죽이고 있는지, 이리아의 숨결은 무척이나 희미했다.

오른손 손톱을 모두 잘라 낸 덱스터가 다음 손을 쥐었을 때, 그녀가 숨결만큼이나 조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 저기 혹시 사…… 사과…….”

……이제야 물어보는구나.

덱스터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리아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가까이서 본 그녀의 얼굴은 변함없이, 심장이 멎을 만큼 아름다웠다.

맺음을 하지도 못한 저 질문에 대답을 해 봤자 무슨 소용인가 싶다.

덱스터는 조금 전, 손톱을 자르지 않겠다며 소리치던 이리아를 떠올려 냈다. 손톱을 잘라 주는 것마저도 싫다고 울먹이던 이리아의 얼굴은 그에게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닫게 했다.

설령 저 질문에 대답해도, 이리아 아델리어는 절대로 내게 호감의 감정을 가지지 않을 거다.

절대로.

“하하…….”

덱스터의 잇새서 제멋대로 너털웃음이 튀어나왔다.

옆에 앉은 이리아는 그가 갑자기 왜 웃는지 참 의아하다는 눈빛이었다. 그녀의 커다란 녹빛 눈동자는 놀랍도록 순수했다.

덱스터는 간밤에도 이리아와의 입맞춤을 곱씹었다. 술에 취해서 마구 애교를 부리던 그 모습이 여전히 눈앞에 생생한데, 그때와 지금의 모습은 너무 달랐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이 얼굴이 미치도록 밉다.

‘너는 아마, 네가 먼저 내게 입맞춤을 했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겠지. 내가 너를 이토록 사랑한다는 사실도, 영영 모를 거야.’

덱스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스스로가 불쌍했다. 그가 잘게 떨리는 손을 들어 이리아의 턱 끝을 살포시 쓰다듬었다.

“예상은 했지만, 정말로 기억 못 하는구나.”

커다란 녹빛 눈동자가 거칠게 요동쳤다. 덱스터는 한없이 순수하기만 한 이리아의 모습에 문득 울고 싶어졌다.

참 애석하게도, 이리아 아델리어는 덱스터가 내뱉은 말의 의미를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정지선 없이 다가오는 요한을 상대하느라 너무나도 바빴기 때문에.

부대의 사람들은 요한 엘로이스가 이리아를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 덱스터는 아니었다.

그는 요한이 이리아를 사랑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렇지 않으면, 저 멀리 서 있는 요한 엘로이스가 이리아를 보며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을 리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와 요한이 다른 점은, 요한은 이리아 앞에서 사랑에 빠진 얼굴을 하고 있고, 덱스터는 어둠에 숨어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사랑에 빠진 얼굴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 둘은 완전히 달랐다. 천지 차이였다.

이리아의 앞에서 제 사랑을 나타낼 수 있는 요한 엘로이스가 미치도록 부럽고, 미치도록 싫었다. 요한과 이리아가 함께 있을수록, 덱스터의 가슴속에는 해소되지 않는 응어리가 쌓여 갔다.

그렇게 새까만 응어리가 쉼 없이 쌓여 간 끝에, 그는 결국 화산처럼 펑 폭발해 버렸다.

그날은 여느 날들과 별다른 바가 없었다. 겨울이 가까워지는 통에 날은 추웠고, 하늘은 청명했다. 부대 사람들은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하루를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리아가 퀸터에게 새빨간 사과를 먹이는 모습만 보지 않았다면, 아마 덱스터의 기분은 꽤 괜찮았을 터다.

‘……대체 왜 퀸터에게 저걸…….’

순간, 덱스터는 그의 두 눈을 의심해야 했다. 그는 이리아가 들고 있는 게 사과이고, 그 사과를 게걸스레 먹고 있는 말이 퀸터라는 사실을 몇 번이고 확인했다.

덱스터의 가슴 안쪽에서부터 피부가 찢기는 듯한 고통이 일었다.

겨우 저 사과 하나를 주기 위해서 온종일 이리아의 뒤를 살폈었다. 겨우 저 사과 하나 때문에 그림자 아래 숨어 스스로를 수없이 자책하다가, 어쩔 수 없이 막사에 두고 나온 것이었다.

그러니 이리아 아델리어는 적어도, 자신이 준 사과를 저런 식으로 처리하면 안 되었다.

‘설마, 7년 전 루퀼렘 성에 두고 왔던 사과도 짐승에게 먹였던 건지…….’

덱스터를 둘러싼 세상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7년 전, 루퀼렘 성에서 나누었던 가장 순수한 추억까지도 더럽혀진 기분이 들며, 그 안의 순수했던 꼬마가 이제는 악마처럼 느껴졌다.

“퀸터에게 이상한 것 먹이지 마라!”

덱스터가 호통을 치기 무섭게, 이리아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는 언제나 그랬듯 티 하나 없이 맑았다.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다는 그녀의 눈빛에, 덱스터는 끓어오르는 울분을 더욱 참을 수가 없어졌다.

그래서 맨정신인 이리아가 처음으로 먼저 그를 잡았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덱스터는 손길을 뿌리쳐 버렸다.

“저, 저기……!”

“건들지 마.”

이리아 아델리어가 밉다.

그녀가, 미치도록 싫다.

덱스터는 도망치듯 이리아로부터 벗어났다. 그는 건틀렛에 맞은 이리아의 손등이 부어오르리라는 사실을 분명 알고 있었으나, 일부러 돌아보지 않았다.

악마 같은 그녀에게 미안한 감정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고요한 계곡 옆에서, 덱스터는 애써 치밀어오르는 울분을 가라앉혔다.

어디선가 나타난 콘라드는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멋쩍게 웃으며 물러났다.

“미안, 친구야. 눈치껏 꺼져 줄게.”

덱스터는 고개를 끄덕일 기력마저도 없었다.

긴 기다림 끝에 드디어 추억이 더럽혀지고, 사랑보다 분노가 앞서는 순간이 왔다. 덱스터는 세 계절이 지난 후에야 첫사랑을 온전히 접을 자신이 생겼다.

‘……놓을 수 있어.’

이리아 아델리어를 놓을 수 있다.

하. 덱스터가 막혔던 숨을 한꺼번에 내뱉었다.

그는 지금껏 강하게 잡고 있던 주먹을 풀고선, 후련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쉬웠던 것을 대체 나는 왜…….’

더는 사랑 따위에 괴로워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다. 두 귓가가 울릴 정도로 요동치던 가슴도 차츰 진정되는 느낌이었다.

그래. 이 순간까지만 해도, 덱스터 하워드는 그가 더 이상 사랑 따위에 괴로워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별 아래의 이리아를 보기 전까지는, 분명 그랬다.

***

컹컹. 사냥개들이 짖는 소리가 온 밤하늘을 장황하게 울렸다.

덱스터는 그 어느 때보다 후련한 마음으로 군인들을 통솔했다. 그는 오랜만에 자유의 시간을 가진 개들이 다시 목줄을 묶어야 할 때도, 조금 더 뛰어놀게 두었다.

‘……이리아 아델리어가 야간 보초를 서는 날이 다시 돌아왔었던가.’

멀리 있는 이리아는 요한 엘로이스와 시시덕거리며 한 사냥개의 목덜미를 쓰다듬어주고 있었다.

덱스터는 딱 붙어 있는 두 남녀의 모습을 보고도 꽤 괜찮았다. 그는 그런 자신의 상태에 내심 놀라고선, 다른 군인들과 함께 부대를 돌았다.

지평선을 따라 거닐던 그가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 이리아는 새까만 밤하늘을 응시하며 바보같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별이다…….”

홀로 남은 이리아 위에 부드러운 밤그림자가 졌다. 혼탁한 그림자 속에서도, 이리아의 새빨간 곱슬머리와 녹빛 눈동자는 선명하기만 했다.

휘잉. 밤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머리카락을 휘날렸다.

분명 이리아 아델리어를 놓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새빨간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는 이리아를 보는 순간, 덱스터의 심장은 멋대로 다시 쿵쿵 뛰기 시작했다.

‘젠장, 안 돼.’

그가 다급히 발걸음을 옮기려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참 이상하게도 땅에서 도통 발을 뗄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이유인지, 몸을 움직이는 것이 불가능했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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