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12.
다시 한번 언급하는 사실이지만, 콘라드 메이필드는 눈치가 빨랐다.
덱스터는 귀띔조차 하지 않았는데, 콘라드는 언젠가부터 그가 이리아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그는 개인적으로도 이리아 아델리어를 마음에 들어 했지만, 덱스터가 짝사랑하기 때문에 더욱 그녀의 곁을 서성거리는 편이었다.
“숙취로 찌든 ‘그분’께서 사과를 드시고 싶으시단다.”
화살촉을 갈고 있던 덱스터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콘라드 메이필드는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얄밉게 미소 지었다.
“난 분명 전했다?”
이후, 콘라드는 손을 흔들며 여유롭게 떠나갔다.
‘그분’의 이름은 안 들어도 안다. 덱스터는 한숨을 푹 내쉬고서는 갈던 화살을 제자리에 두었다.
새롭게 옮긴 부대 주변에는 평원이 상당히 많았다. 대부분 숲을 태워 인공적으로 만든 평원이었다.
과거 마물이 나타나기 이전, 비센티움의 동쪽은 농사나 목축을 위한 개척지였다. 하지만 마물이 계속 나타나자, 사람들은 땅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 개척지였던 동쪽 평원들에는 돌봄을 받지 못한 과일나무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평원을 자주 지나다니는 덱스터가 조사 중에 잠시 시간을 내어 사과 하나를 따 오는 건 일도 아니었다, “등신 새끼…….”
덱스터는 제 손에 들린 새빨간 사과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콘라드 메이필드의 한마디에 사과를 따는 그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해 미칠 노릇이었다.
사실, 덱스터는 사과를 이리아에게 직접 전해 줄 생각이었다. 그 스스로가 첫사랑을 절대로 정리하지 못한다는 점을 깨달은 이후, 조금이라도 이리아에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하지만 이리아를 포함한 온 간호사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너무 바빴다. 덱스터는 ‘지금 말을 걸면 다 죽여 버린다’라는 눈빛을 하고선 일을 하는 이리아를 차마 건들 수 없었다.
그는 충성스러운 개처럼 이리아에게 여유가 생기기만을 가만히 기다렸다. 그리고 그녀가 잠시 찌뿌둥한 몸을 풀기 위해 막사를 나온 순간, 뒤를 졸졸 따라갔다.
이걸 대체 언제 주어야 하나.
덱스터는 바싹 말라 가는 입 속을 느끼며, 손안의 사과를 만지작거렸다. 당장 이리아에게 다가가고 싶으면서도, 막상 다가가면 그녀가 도망가 버릴까 봐 겁이 났다.
그렇게 덱스터가 그림자 아래 숨어 분위기를 읽고 있을 때, 이리아는 마구간 앞에서 이리저리 기지개를 켰다.
어김없이 그녀의 주변을 서성거리며 꽃을 물어뜯고 있던 퀸터는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갑자기 꼬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이리아가 무슨 일인지 묻자 그는 새까만 콧잔등으로 땅 위의 새를 가리켰다.
새는 이리아의 주먹 크기도 되지 않을 만큼 조그마했다. 부모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새끼가 실수로 둥지 밖에 떨어진 듯했다.
“안 돼, 퀸터. 그러지 마.”
이리아가 아기 새를 건들기 시작한 퀸터를 황급히 밀어냈다. 그녀는 손수건으로 새를 감싸 들고선, 솜털이 보슬보슬 오른 정수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이리아가 조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불쌍해라…….]
덱스터는 숨을 죽인 채 그 모습을 전부 바라보았다.
이리아 아델리어를 볼 때마다 궁금하다. 세상 모든 루퀼렘인들이 저런 온화한 심정을 가지고 있는 걸까, 아니면 이리아만 특별히 생명에 대한 정이 많은 걸까.
아주 긴 시간 따뜻한 가슴팍에 새를 품고 있던 이리아는, 퀸터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한 후 막사로 돌아가 버렸다.
그녀의 새빨간 뒤통수는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결국, 종일 분위기만 살피다가 못 줬다.
덱스터는 여전히 주머니 속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그가 긴장하여 식은땀이 난 손바닥에 제 얼굴을 푹 파묻었다.
‘미친놈. 머저리. 등신 새끼…….’
덱스터는 짙은 나무의 그림자 아래서 한참을 자책하다가, 힘없이 걸어 나왔다. 단숨에 그를 알아본 퀸터가 꽃을 뜯어먹는 것을 멈추고 홱 목을 돌렸다.
덱스터가 새까만 눈동자를 빛내는 퀸터에게 물었다.
“너도 내가 등신 같냐?”
퀸터가 꼬리를 들썩이며 푸르르 콧김을 내뿜었다.
저 콧김이 그렇다는 대답으로 느껴지는 건 분명 덱스터의 착각이리라.
어차피 이리아는 지금쯤 다시 바삐 일을 시작했겠지. 그녀에게 가 봤자 말 한마디조차 못 붙일 걸 이미 알고 있는 덱스터는 포기하고 퀸터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손바닥에 감기는 갈기 상태는 몹시나 좋았다. 이리아가 매일같이 와서 빗질을 해 준 덕분이었다.
‘너는 이리아 아델리어에게 차고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구나…….’
하아. 덱스터가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퀸터가 미치도록 부러우면서도, 말에게 부러움을 느끼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과일의 신선함이 떨어지는 순간은 금방이었다. 이후에도 주머니 속에서 한참 사과를 굴리던 덱스터는 끝내, 홀로 이리아의 막사에 두고 나와 버렸다.
7년 전, 루퀼렘 성 난간에 사과를 두고 왔던 그 순간과 참 비슷하다.
겉모습은 변했으나 입맛은 그대로였던 이리아는 덱스터가 7년이란 간격을 사이에 두고 놓고 간 두 개의 사과를 모두 맛있게 먹었다.
7년 전의 이리아 아델리어는 루퀼렘 성 난간에 사과를 두고 간 이가 덱스터라는 사실을 곧바로 알아차렸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7년 후의 이리아 아델리어는, 사과의 발신인을 찾아 한참을 헤맸다.
덱스터는 이리아가 사과에 관해 질문하면서 온 부대를 헤치고 다닌다는 소식을 금세 전해 들었다. 그는 내심 질문의 순서가 자신에게까지 다다르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리고 기다려도 질문은 오지 않았다.
***
덱스터는 지금껏 총 두 개의 계절 내내 이리아를 짝사랑했다. 봄에는 그녀를 만나 마음을 깨달았고, 여름에는 마음을 버리기 위해 애를 썼다.
단풍이 지는 가을이 시작되었을 때, 덱스터의 사랑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점까지 다다라 있었다. 그는 한창 독한 첫사랑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기에,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부대가 해체되면, 이리아 아델리어와는 헤어져야 한다.
지도의 표식을 지우던 덱스터의 손이 멈칫했다. 그의 두 눈동자는 어느덧 거칠게 떨리고 있었다.
이리아의 몸뚱어리보다도 더 큰 비센티움 동쪽의 지도는 전과 비교할 수 없이 깨끗했다. 덱스터는 마물을 발견한 장소에 표식을 남긴 후, 소탕을 완료하면 남겼던 표식을 지우는 편이었다.
그러니 깔끔한 지도는 마물의 토벌이 거의 완료되었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것은 곧, 부대의 해체가 코앞으로 다가왔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했다.
“야, 안 지우고 뭐 해?”
넋을 놓아 버린 덱스터를 답답해하던 콘라드가 지도를 확 빼앗아 갔다. 그는 덱스터의 속도 모르고서는 표식을 흔적도 남지 않을 만큼 깔끔하게 지워 냈다.
덱스터는 잠시 사과에 관한 속상함도 잊어버렸다. 부대에 돌아온 그는 한껏 가라앉은 눈빛으로 이리저리 서성거렸다.
마음이 심란한 와중에도, 예민한 청력은 이리아의 목소리를 제멋대로 잡아냈다.
“사과 옆에 작은 쪽지 같은 것도 없었나요?”
“네. 없었어요. 부대 사람들한테도 다 물어봤는데, 아무도 놓고 가지 않았대요.”
“다 물어봤다고요? 오늘 제게 미친놈…… 아니, 부단장님이 말하기로는 씨시가 하워드 공께는 아직 안 여쭤봤다고 하던데요?”
“하, 하워드 공께 여쭤보기는 조금…….”
이리아가 멋쩍게 웃으며 뒷덜미를 문질렀다. 그녀는 옆에 앉은 줄리에타를 잠시 힐끗거리고선,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쉽게 말을 걸 수가 없어요. 제겐 너무나도 멀게 느껴지는 분이세요.”
덱스터는 반사적으로 이리아를 돌아보았다.
이리아가 자신을 무서워한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그녀의 작은 등이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뜨거운 감정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대체 무슨 이유로 멀게 느껴진다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비센티움인이기 때문에? 생명을 사랑하지 않는 대제국의 군단장이어서? 아니면, 내가 여전히 자신과 다르게 ‘싸가지 없고 오만한’ 말투를 가졌기 때문인가?
덱스터는 이제 차라리 7년 전 루퀼렘 난간에서 만났던 ‘외국인 아저씨’가 자신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싶었다. 그리고, 따지고 싶었다.
‘7년 전에는 네가 먼저 말을 걸며 다가왔잖아, 이리아 아델리어. 제멋대로 다가와 이 머릿속에 추억을 잔뜩 새겨 두고서, 지금은 내가 멀게 느껴진다니…….’
어느덧 두 주먹을 쥔 덱스터는 아랫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지금 와서 그의 과거를 밝히기엔, 이미 너무 늦어 버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리아 아델리어는 자신의 정체를 들킬까 봐 더더욱 두려워했다.
자유라는 것은 맛볼수록 달콤했다. 이리아는 힘겹게 얻어 낸 자유를 다시 뺏길까 봐 언제나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만일 인제 와서 덱스터가 그녀에게 7년 전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면, 그는 이리아에게 ‘비센티움에서 자신의 정체를 아는 첫 번째 사람’이 되어 버린다. 그럼 이리아는 분명, 덱스터가 언제 모든 비밀을 폭로할까 초조해하다가 도망가 버리고 말 거다.
스무 살이 된 첫날 루퀼렘 성에서부터 도망쳐 나온 것처럼, 이리아 아델리어는 덱스터를 피해 영영 저 머나먼 곳으로 가 버릴 거다.
그러잖아도 부대가 해체되면 다시는 못 볼 사람이다. 덱스터는 말 한마디로 그녀를 빨리 잃고 싶지 않았다.
‘피곤해…….’
이리아 아델리어의 주변에 있을 때마다 피곤이 해일처럼 몰려들었다.
덱스터는 유독 깊이 가라앉은 눈 아래를 거칠게 문지르며 자리를 떴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