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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화 (62/109)

61화

저 멀리서부터 간호사들과 함께, 이리아 아델리어가 절뚝이며 걸어왔다. 언제나 단색의 옷만을 찾던 그녀는 술판을 벌인다는 소식에 개나리색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원피스는 다른 사람한테 빌려 입은 듯 언뜻 봐도 사이즈가 상당히 컸다. 자신의 한쪽 어깨가 만천하에 드러났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리아는 간호사들과 시시덕거리기 바빴다.

한쪽 다리를 절어도, 제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어도 예쁘기만 하다.

‘……제기랄.’

자기도 모르는 새에 이리아를 멍하니 바라보던 덱스터는 이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휙 돌아앉았다.

애석하게도, 오랜만에 밝은 옷을 입은 이리아는 덱스터의 눈에만 예쁜 게 아니었다. 주변에 앉은 젊은 군인들이 이리아를 두고 웅성거리기 시작하자, 그의 얼굴은 더더욱 일그러졌다.

첫사랑을 잘라 내겠다고 분명 다짐했는데 저 말에 반응하는 자신도 싫고, 이리아를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인간들도 다 짜증스럽다.

럼주만 주야장천 마시던 덱스터는 마침내 독한 보드카를 찾기 시작했다. 그가 옆에서 보드카를 따고 있던 군인을 향해 팔을 뻗었다.

“그거 이리 내.”

“마…… 많이 취하신 것 같은데요, 하워드 공.”

“안 취했어! 이 새끼 술고래야! 럼 네 병으로는 까딱도 안 해!”

진즉 취기가 오른 콘라드가 킬킬대며 소리쳤다. 덱스터는 자꾸만 옆구리를 툭툭 건드는 그를 밀어내고선, 보드카 병을 비워 냈다.

등 뒤에서 ‘씨시, 천천히 마셔요!’라며 질겁하는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러나 덱스터는 일부러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콘라드는 술을 마시다 말고 갑자기 주머니에서 말이 담배를 꺼냈다. 그는 몇 번이고 풀린 담배 끄트머리를 다시 말려고 했지만, 취한 탓에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그가 막 보드카를 비운 덱스터에게 담배를 건네며 말했다.

“건망증 환자야, 이것 좀 한번 말아 봐라.”

“담배 마는 법 잊어버린 지 오래야.”

“심각하게 묻는 건데, 너 진짜로 건망증 아니냐……?”

차라리 건망증이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리아 아델리어에 관한 기억을 깡그리 잊어버렸으면.

덱스터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선 새로운 술을 찾기 시작하자, 콘라드가 혀를 찼다. 반드시 한 개비를 피워야겠다고 중얼거린 그는 다시 혼자서 끙끙대며 담배를 말았다.

‘익숙한 향기…….’

침묵을 유지하며 술만 찾던 덱스터의 입매가 갑자기 구겨졌다.

뒤늦게 깨달은 것이지만, 가까운 곳에서부터 이리아 특유의 과일 향이 풍겨 오고 있었다.

분명 이리아 아델리어는 저 멀리에 있는데 대체 왜 그녀의 향기가 이곳에서 나는지.

덱스터는 그의 코가 드디어 가슴 아픈 짝사랑으로 맛이 가 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덱스터의 후각은 정확했다.

“여, 우리 빨간 머리 장군님이 왔네!”

일부러 무시하고 있었건만. 콘라드의 외침을 듣자마자, 고개는 제멋대로 돌아가고 말았다.

샛노란 원피스를 차려입은 이리아가 바로 뒤에 서 있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그녀는 언뜻 봐도 거나하게 취한 듯했다. 그녀는 똑같이 새빨갛게 취기가 오른 콘라드의 얼굴을 보고 한참을 키득거리다가, 그의 어깨를 잡고선 말했다.

“야, 두, 두…… 두 병만 줘 바.”

“두 병씩이나? 너 그지냐? 두 병은 안 돼!”

“아, 빠…… 빨리 줘 바!”

분명 안 된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이리아는 이유 없이 달라며 떼를 쓰기 시작했다. 완전히 만취한 모습에, 어느 군인이 ‘줄 때까지 절대로 안 갈 것 같은데.’라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리아는 동전을 두고 술을 가져갈 사람을 정하자는 콘라드의 대안에 수긍했다.

이리아는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며 콘라드와 덱스터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앉았다. 예상치도 못한 순간에 이리아와 허벅지를 맞대게 되자, 덱스터의 온몸은 단단하게 굳어 버렸다.

안 돼. 반응하면 안 된다. 다 끊어 내기로 했잖아, 덱스터 하워드.

콘라드부터 시작하여 군인들이 차례차례 동전을 던지는 내내, 덱스터는 손톱이 피부를 파고들 만큼이나 주먹을 세게 쥐고 있었다.

그는 동전을 던지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손을 폈을 때, 부자연스럽게 난 손톱자국을 보이지 않기 위해 상당히 애를 썼다.

사실, 덱스터는 과거 선임들에게 꼼수를 배워 무조건 원하는 방향이 나오도록 동전을 던질 수 있었다. 하지만 옆에 앉아 있는 여인이 너무나도 얄미웠던 그는 굳이 그녀를 위해서 노력하고 싶지 않았다.

덱스터는 감촉만으로도 손등 위에 안착한 동전이 뒷면을 보인다는 걸 알아차렸다. 3대 3. 동전의 앞면과 뒷면이 같게 나온 상황이었으니, 그가 손바닥을 들어 올리면 콘라드의 승리였다.

그러나 덱스터가 손바닥을 올리는 바로 그 순간. 이리아가 외쳤다.

“아…… 앞면 나왔으면 조, 좋겠다!”

기대감이 흠뻑 배어 있는 목소리였다. 이대로 콘라드의 승리로 끝이 난다면, 이리아가 너무나도 크게 실망할 것만 같았다.

또. 덱스터의 마음은 또 이렇게 약해지고 만다.

‘……등신 새끼.’

쨍그랑. 동전이 떨어지며 굴러다니던 술병과 부딪혔다.

덱스터는 한숨을 삼키며 동전을 일부러 떨어뜨렸다. 그는 그 후, 두 번째로 동전을 던지며 이리아를 위해서 앞면이 나오도록 만들었다.

‘어차피 언제나 그랬듯, 고맙다는 말 한마디도 못 들을 텐데.’

덱스터는 제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뜨리며 군인들에게 술을 건네받는 이리아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의도적으로 승리를 거머쥐게 했다는 사실도 모르고서는, 이리아는 참 기분 좋은 표정이었다.

당연히 이리아와 달리, 눈썰미 좋은 콘라드는 단번에 그가 꼼수를 썼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야! 이 새끼 조작했어!”

“자……잠깐. 진정해 봐, 콘라드.”

“미친 새끼야! 조작할 게 따로 있지! 너 때문에 다 뺏겼잖아!”

“제발 조용히 좀 해. 사람들이 다 쳐다보잖아.”

“내가 퍽이나 조용히 하겠다! 아아악-!!”

덱스터는 냅다 고함을 지르기 시작한 그를 닥치게 하기 위해 두리번대며 술을 찾았다.

그가 가장 가까이 앉아 있는 군인에게 다급히 물었다.

“보드카 더 없나?”

“아. 있었는데, 방금 가져갔습니다.”

“……가져갔다고?”

가져갔다니. 아주 잠깐, 덱스터는 군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바보처럼 몇 차례 눈을 깜빡이다가, 뒤늦게 이리아가 간 곳을 돌아보았다.

이…… 이 망할 군인들이 이리아에게 보드카를 줬다!

이리아 아델리어는 보드카가 건장한 성인 남성도 잘 마시지 못할 만큼 독한 술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저 멀리 보이는 그녀는 어느새 끙끙대며 병을 따는 중이었다.

그 자신도 힘들게 마시는 술이다. 첫사랑을 잘라 내고 말고를 떠나, 덱스터는 이리아가 보드카를 병째로 들이켜는 꼴을 절대로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덱스터는 여전히 고함을 지르는 콘라드를 무시하고선, 그녀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몸 상하니까 적당히 마셔.”

“아……!”

덱스터는 이리아가 들고 있던 술병을 낚아채고 나서, 일부러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 잠시 마음이 약해져 이리아에게 억지로 승리를 안겨 주기는 했지만, 첫사랑을 끊어 내겠다는 다짐은 여전했다.

이리아 아델리어 때문에 겨우 오르고 있던 술기운조차도 싹 사라져 버렸다.

술을 더 다시 마신다고 해서 기분이 나아질 것 같지 않던 덱스터는 그냥 일찍 잠들어 버리기로 했다. 그는 독한 술 냄새를 씻어 내기 위해서 계곡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런 그의 뒤를, 예상치 못한 손님이 따라왔다.

“왜 따라왔어?”

“그, 그 술 내…… 내 건데 가져가니까…….”

“어차피 넌 마시지도 못해.”

손을 씻어 내던 덱스터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리아 아델리어는 새빨간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계곡 옆에 서 있었다. 멀리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취기가 올랐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우면서, 애틋했다.

이리아는 잠시 제자리에서 덱스터의 검고 깊은 눈동자를 지그시 응시했다.

그리고 이내,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

덱스터 하워드는 이리아 아델리어와 함께했던 그 어떤 순간보다도, 이 순간을 가장 정확하게 기억했다.

술에 취한 이리아가 비틀비틀 다가와 허리를 껴안았을 때, 덱스터의 심장은 거세게 박동했다. 그리고 이후 그녀가 빼앗긴 술을 돌려달라며 칭얼거렸을 땐, 우뚝 멎어 버렸다.

사실, 덱스터는 마구 애교를 부리는 품 안의 이리아를 몇 번이고 밀어내려고 시도했다. 첫사랑을 모두 잘라 내겠다고 다짐한 만큼, 여느 때보다 더더욱 이리아에게 곁을 내어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머리가 몇 번이나 다짐을 거듭했음에도 불구하고, 몸은 그녀를 원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두 손은 이미 이리아를 밀어내기는커녕, 고운 분홍빛으로 물든 그녀의 뺨을 감싸고 있었다.

지금껏 이리아 아델리어는 몇 번이고 악의가 없이 덱스터를 고문하고, 단계적으로 시험했다.

이리아는 처음에는 덱스터의 손을 잡았었다. 이후에는 그의 뺨을 쓰다듬었고, 품속에 아이처럼 파고들었다. 옷소매를 움켜쥐고 가지 말라며 칭얼거리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녀는 마지막으로, 덱스터의 입술에 제 입술을 찍어 눌렀다.

이리아의 입술이 닿아 온 그 순간, 덱스터는 속에서 무언가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가 수없이 되뇌던 다짐은 눈 깜빡할 사이에 먼지가 되어 깔끔하게 사라져 버렸다.

스스로가 미련하다는 걸 알고 있다. 이리아 아델리어가 아침이 되면 자신이 저지른 일들을 기억하지 못하리라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덱스터는 이리아의 입술을 거부할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을 상상하면 죽을 만큼 괴로웠지만, 유혹을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다시 한번 키스했다.

그는 이만 인정해야만 했다.

이리아 아델리어를 사랑하는 건, 이 심장을 도려내지 않고서야 절대로 멈출 수가 없다는 사실을.

그렇게 덱스터 하워드는 끝내, 첫사랑을 끊어 내지 못했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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