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이곳이 만일 루퀼렘 성이었다면, 너는 이렇게 아프지도 않았을 테지.’
자유라는 게, 보호와 권력을 깡그리 포기하고 도망칠 정도로 값진 것이었던가.
7년 전과 마찬가지로, 덱스터는 여전히 자유를 꿈꾸는 이리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픈 모습을 보니 더더욱 이해할 수 없어졌다.
이불은 이리아가 흘린 땀에 젖어 금세 축축해졌다. 이리아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게 낫겠다고 판단한 덱스터는 망설임 없이 그녀를 안아 올렸다.
언젠가 들어왔었던 이리아의 막사는 여전히 그녀의 향기로 듬뿍 차 있었다. 덱스터는 정리하지 않은 옷가지들로 엉망인 침대를 대충 치운 후에, 조심스레 이리아를 눕혔다.
분명 줄리에타가 주사를 놓았다고 했는데, 열은 쉽사리 내리지 않았다. 물수건으로 몇 번이고 땀을 닦아 주고 손부채질도 해 보았지만 둘 다 소용은 없었다.
줄리에타 엘로이스를 다시 불러야 하는 건지. 덱스터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이리아의 팔을 닦아 내고 있을 때, 자그마한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덱스터의 손이 허공에서 우뚝 멈추었다.
대체 언제부터인지, 이리아는 눈을 뜨고 있었다.
‘……이리아……?’
반쯤 초점이 사라진 녹빛 눈망울은 호롱불 그림자 속의 덱스터를 빤히 응시했다. 순식간에 그녀에게 홀려 버린 덱스터는 발갛게 달아오른 이리아의 얼굴을 넋을 잃은 채 마주 바라보았다.
이리아가 희미하게 키득거리며 팔을 들어 올렸다. 그녀는 여린 손끝으로 멍하게 풀린 덱스터의 뺨을 쓸었다.
[나 지금 꿈을 꾸고 있나 봐…….]
덱스터의 심장은, 이리아의 손끝이 얼굴에 닿아 오자마자 우뚝 멈춰 버렸다.
루퀼렘 사람들은 대마법사 이리아 아델리어를 여신과 가장 가까운 존재라고 일컬었다. 루퀼렘인들의 머릿속 그녀는 전설 속 다섯 뿔의 여신만큼이나 아름답고, 강하며 거스를 수 없는 존재였다.
덱스터는 그런 루퀼렘 사람들의 생각을 여태껏 비웃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는 차마, 이리아 아델리어가 여신에 가장 가까운 존재라는 루퀼렘인들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이리아 아델리어는 인간이 아닌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그녀가 이렇게 하루에도 몇 번씩 이렇게 내 심장을 쥐락펴락할 수 있을 리가 없어.
이리아는 완전히 넋을 놓아 버린 한 남자를 향해 더욱 크게 키득거렸다.
샛노란 호롱불의 파도 안에서 그녀는 한참 덱스터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곧이어, 따뜻하고 보드라운 여체가 덱스터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덱스터는 눈꺼풀을 깜빡일 수도, 숨을 쉴 수도 없었다. 그는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몸을 맡기는 이리아 때문에 감정이 벅차올라 이대로 죽어 버릴 것만 같았다.
시선 아래로 그녀의 둥그스름한 이마와 새빨간 속눈썹이 보였다. 한참을 엉성하게 두 팔을 올리고 있던 덱스터는, 이리아가 눈을 감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그녀를 부드럽게 그러안았다.
이리아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그녀는 마치 어린 짐승처럼, 덱스터의 가슴 위로 뺨을 문지르며 속삭였다.
[네 품이 정말 그리웠어…….]
이리아의 말을 듣는 순간, 덱스터의 숨통이 턱 막혀 왔다.
‘……아마도 지금 이리아 아델리어는 나를 루 아휜으로……’
이리아 아델리어는 일전에도 몇 번이고 나를 루 아휜으로 착각했다.
덱스터는 정신을 반쯤 잃은 이리아가 자신의 존재를 모른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품속의 이리아를 도무지 밀어낼 수가 없었다.
덱스터는 땀으로 흥건히 젖었음에도 여전히 보드라운 이리아의 얼굴과 목덜미를 애타게 쓸어내렸다. 그의 손길이 간지러웠던 이리아가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웃음을 터뜨리자, 덱스터의 배 속은 제멋대로 아릿해졌다.
차라리 이 순간 그대로, 영영 시간이 멈춰 버렸으면 좋겠다.
덱스터가 한참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을 빌고 있을 때, 이리아는 급기야 서로의 뺨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녀가 뺨을 문지를수록 덱스터의 손길은 대담해져, 가녀린 여체의 어깨와 팔뚝을 감쌌다.
이리아 아델리어는 몰랐다. 잠결에 내보였던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가, 덱스터를 얼마나 미치게 했었는지.
이리아는 아주 긴 시간 덱스터와 뺨을 맞대고 있다가 느릿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의 아기 같은 행동이 멈춘 순간, 덱스터는 현실을 깨달아 곧장 손을 거두어야 했다.
뺨을 뗀 이리아가 애교가 흠뻑 담긴 목소리로 속삭였다.
[있잖아, 너한테서 엄청 익숙한 향이 나.]
[그만 다시 자, 이리아. 너 지금 제정신 아니야.]
덱스터가 거칠게 기침을 토해 내기 시작한 이리아를 다시금 침대 위에 눕혔다.
이리아는 기침을 하면서도 힘겹게 말했다.
[가지 마. 나…… 난 아플 때 외로운 거 싫어. 날 호, 혼자 두지 말아 줘.]
[안 갈게. 네가 잠들 때까지 이곳에 있을 거야.]
하지만 이리아는 마치 덱스터의 대답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그의 옷소매를 잡았다.
어느샌가 눈을 감은 이리아의 관자놀이를 타고, 눈물 한 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겨우 하나였던 물줄기는 천천히 그 수를 늘려 갔다. 뜨거운 숨을 토해 내는 잇새선 흐느낌이 함께 새어 나왔다.
무엇이 그리 서러운지, 이리아는 깊은 잠에 빠져든 상태에서도 엉엉 울었다. 깜짝 놀란 덱스터가 황급히 그녀의 뺨을 매만졌지만 소용없었다. 이리아는 제 몸이 지쳐 나동그라질 때까지 서럽게 흐느꼈다.
덱스터는 이리아가 울음을 멈춘 후에도 한참 자리를 뜨지 못했다. 그는 한없이 애잔한 첫사랑의 얼굴을 고통스러운 눈빛으로 응시하다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둥그스름한 이마 위에 제 입술을 찍어 눌렀다.
[제발 아프지 마, 이리아.]
입술이 머문 시간은 꽤 길었다.
덱스터는 입맞춤을 끝으로 이리아의 막사를 나섰다. 이리아 특유의 과일 향이 감도는 막사 앞에서, 그는 대충 쑤셔 넣었던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들었다.
‘……결국엔 못 피웠군.’
덱스터는 손바닥 위의 장초를 잠시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며 다시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새벽은 올빼미의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했다.
덱스터가 팔짱을 낀 채로 희미하게 나타난 별들을 구경하고 있을 때, 멀리서부터 줄리에타가 다가왔다.
“하워드 공? 여기서 뭘 하고 계시는 겁니까?”
“……아.”
그녀는 이리아의 막사 앞에서 서성거리는 덱스터가 참 신기하다는 표정이었다.
덱스터는 줄리에타가 막사 안쪽을 슬쩍 확인하자 괜히 속이 찔려 왔다. 아픈 이리아 아델리어가 제 발로 저벅저벅 걸어 침대를 옮길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제발 줄리에타 엘로이스가 다음 날 이리아가 곤란할 말들을 하지 않길 바라며, 은근슬쩍 자리를 피해 버렸다.
덱스터는 이리아가 다음 날 아침이 되면 모든 기억을 잃어버릴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내심, 그녀가 어젯밤을 희미하게나마 알고 있기를 소망했다.
덱스터가 약 정리를 하고 있던 이리아에게 생전 안 하던 질문을 던진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몸은 좀 어때?”
기절할 정도로 아팠다면 하루 정도는 푹 쉬어도 될 텐데, 이리아는 상태가 좋지 않은 몸을 이끌고 일을 하고 있었다.
덱스터의 질문을 듣자마자, 열심히 약을 정리하고 있던 이리아의 손이 잠시 주춤했다.
그녀는 손끝을 꼼지락거리며 조그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 거, 걸을 만해요.”
“그것 말고. 감기는?”
이리아의 고개가 천천히 덱스터를 향해 돌아갔다. 덱스터는 그녀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마주하자마자 제멋대로 오르는 기대감을 차마 진정시킬 수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그…… 제, 제가 감기 걸린 건 어떻게…….”
이번에도 이리아는 잔인했다.
솟아올랐던 기대감이 단번에 땅끝까지 추락하는 기분은, 느껴 보지 않은 이는 평생토록 모를 것이다.
덱스터는 그녀의 반응을 본 순간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괜찮다면 됐어.”
둘의 관계에서 도망친 이는 언제나 이리아 아델리어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덱스터가 먼저 그녀로부터 도망쳤다.
그는 당황한 이리아를 단 한 번 돌아보지도 않은 채로 막사를 나가 버렸다.
힘들고 지겹다. 이리아 아델리어는 결국에는 항상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그녀가 아픈 밤마다 주변을 지키는 내가 등신 같다.
‘심장을 다 도려내 버리고 싶다.’
아무도 없는 계곡 옆에서 주머니 속 담배를 만지작거리던 덱스터는 한숨을 푹 내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어젯밤, 그의 품속을 파고들던 이리아의 모습과 조금 전 당황했던 이리아의 모습은 너무나도 달랐다. 그녀의 온기와 체향, 보여 주지 않던 웃음과 애교를 마지막으로 수차례 곱씹은 끝에, 덱스터는 또 한 번 다짐했다.
‘날 무서워하는 여자를 짝사랑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나…….’
첫사랑을 진실로, 잘라 내겠다고.
계곡 밖에서부터 군인들이 술병들을 옮기는 소란이 들려왔다. 부대를 옮기기 전날, 전통적으로 벌이는 술판의 준비였다.
덱스터는 성큼성큼 걸어가 가장 눈에 띄는 술병 하나를 골라냈다. 술의 종류도 확인하지 않고 무작정 뚜껑을 따기 시작한 그에게, 옆에 있던 콘라드가 핀잔하듯 말했다.
“야, 야.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마시기 시작하면 어떡해?”
“지금이든 나중이든, 어차피 배 속에 들어가는 건 똑같잖나.”
“그래도 의례라는 게 있잖아, 이 미친 새꺄…….”
의례이든 뭐든. 덱스터는 당장 술이 고팠다.
진정한 술판이 벌어지기 전에, 덱스터는 혼자서 럼주를 세 병 이상 끝내 버렸다. 도수가 낮은 럼주 따위에 취기가 오르지는 않았지만 전보다는 기분이 나아진 듯했다.
그러나 나아진 기분은 딱 잠시뿐이었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