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60/109)

59화

그래, 이리아 아델리어도 숲속에서 마물을 만나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을 거다. 그녀도 많이 무서웠겠지.

만일 눈앞에 주저앉아 있는 이가 이리아 아델리어가 아니었다면 덱스터는 함부로 부대를 나선 잘못으로 징계를 내렸을 터다. 그러나 아무리 군단장이라 해도, 그는 차마 닭똥만 한 눈물을 뚝뚝 흘리는 첫사랑에게 벌을 줄 수가 없었다.

덱스터는 일단 이리아가 살아 있다는 점만으로도 안심하기로 했다. 하지만 겨우 숨을 돌리려는 그에게, 시야가 두 번째로 새까매지는 순간이 찾아오고 말았다.

이리아는 알지 못했지만, 사실 덱스터는 마물의 앞니에 짓이겨진 그녀의 다리를 보자마자 반쯤 공황에 빠졌었다. 그는 이리아가 상처에 들어간 보드카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때, 함께 고통스러워했었다.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힘겹게 숨을 할딱이는 이리아는 덱스터에게 고문과도 같았다. 그는 흐느끼는 이리아를 등에 업고 걸으며 같은 생각을 수백 번 되뇌었다.

차라리 내가 대신 다쳤으면.

그녀 대신, 내가 아팠으면.

이리아와 덱스터의 몸은 완전히 달랐다. 오랜 시간 전쟁터에서 구른 덱스터의 몸은 굳은살이 가득했고 흉터투성이였지만, 이리아는 아니었다.

루퀼렘 성에서 일평생 보호를 받아 온 이리아의 몸은 뽀얗고 보드라웠으며, 흉터도 당연히 없었다.

덱스터는 이리아의 몸에 흉터 하나 없던 점을 몹시나 좋아했다. 흉터가 없는 몸은 이리아가 일평생 차고 넘치는 보호를 받았다는 증명이었다.

그렇기에 덱스터는 이리아의 왼쪽 다리에 처음으로 흉이 새겨졌을 때, 심장이 저릴 정도로 슬펐다.

이리아만큼은 부상의 고통을 일평생 몰랐으면 했는데.

‘이리아…….’

덱스터가 둥근 이마 위 식은땀을 손등으로 훔쳐 냈다. 이리아는 그의 서늘한 손등이 피부를 쓸고 지나가자, 잠결에도 눈살을 찌푸렸다.

다리의 상처 때문에 이리아의 온몸은 불덩이였다. 그녀가 약 기운으로 빠르게 잠들어 참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밤새 끙끙 앓았을 테지.

밤이 늦어 간호사와 군인들이 전부 나간 막사는 어둡고 고요했다. 덱스터는 흔들리는 호롱불 하나에 의지하여 이리아를 보살폈다.

이리아는 깊게 잠든 상태에서도 간이침대가 불편한지, 이리저리 뒤척였다. 덱스터가 계속해서 자세를 바로잡아 주었지만, 별다른 도움은 되지 못했다.

이렇게 두었다가는 이리아가 잠에서 깰 수도 있다.

덱스터는 잠에서 깬 그녀가 다리의 통증으로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은 절대로 보고 싶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결국, 이리아를 옮기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그가 이리아의 머리 아래를 받치는 순간. 자그마한 손이 튀어나와 옷자락을 콱 움켜쥐었다.

[루. 나랑 야, 약속했잖아…….]

갑자기 터져 나온 루퀼렘어에, 덱스터의 온몸은 순식간에 굳어 버렸다.

혹시 내가 실수로 이리아를 깨워 버린 건지. 덱스터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눈동자로 이리아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이리아는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잠결에 내뱉은 말이었던 거다.

안심한 덱스터의 잇새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가 옷자락을 잡은 손을 풀려는 때, 이리아가 또 한 번 입을 열었다.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에는 물기가 잔뜩 스며들어 있었다.

[밖으로…… 저 바깥세상에 데려다주겠다고 나랑 약속했잖아…….]

옷을 움켜쥔 손아귀의 힘이 점점 더 강해지자, 덱스터의 어깨가 잘게 요동쳤다.

인제 보니 이리아는 침대가 불편해 뒤척인 게 아닌 듯했다.

그녀는 꿈을 꾸고 있었다.

루퀼렘 성에 갇혀 살았던 자신의 과거를, 꿈을 통해 다시 한번 경험하는 중이었다.

눈썹을 한껏 일그러뜨린 이리아는 급기야 울먹이기 시작했다. 곧 눈물을 흘리려는 그녀에게, 덱스터가 급히 뺨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너는 이미 자유야, 이리아.]

거짓말처럼, 이리아의 흐느낌은 순식간에 멈추었다.

‘평소에도 이런 꿈을 자주 꾸는 건지, 아니면 오늘 너무 힘든 시간을 보낸 탓에 꾸는 건지…….’

덱스터가 다시금 이리아의 조그마한 뒤통수를 베개 위에 올려 두었다. 그리고 혹시 그녀의 손톱이 다칠까 봐, 옷을 움켜쥐었던 손아귀까지도 조심스레 풀어 주었다.

그런데 그의 노력이 무색하게, 이리아는 손 안쪽의 허전한 느낌을 참지 못했다.

그녀는 잡히는 대로 덱스터의 커다란 엄지손가락을 허공에서 덥석 낚아챘다.

덱스터는 이후 흐트러진 이불을 손수 덮어 주고,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들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이리아는 다시 새근새근 평화로운 숨결을 내뱉었지만, 덱스터의 엄지는 끝까지 놓지 않았다.

덱스터는 새하얗고 작은 이리아의 손가락들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부드럽게 마주 감쌌다.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따스한 피부의 온기는 순식간에 그의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고요한 분위기 사이로, 이리아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울려 퍼졌다.

덱스터는 어느덧 꺼진 호롱불을 다시 켤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제자리에 하염없이 앉아 있었다. 이리아와 단둘이 있는 이 순간이 너무나도 소중해서, 1초라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리아 아델리어는 아마 잠에서 깨는 순간, 언제 나의 손을 잡았냐는 듯 또다시 저 먼 곳으로 도망쳐 버릴 거다. 언제나처럼 다가갈 기회조차도, 말을 걸 기회조차도 주지 않을 테지.

‘너는 아마 이러한 순간이 존재했다는 사실조차 모를 거야, 이리아 아델리어.’

나쁜 사람.

날 다른 사람으로 착각했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바보.

눈을 감고 있을 때만 다가가게 해 주는 치사한 여자.

맞잡은 이리아의 온기를 느낄수록 덱스터는 서러워 죽을 것만 같았다. 지금처럼 눈을 감았을 때가 아니면, 언제나 뒷모습만을 보이는 그녀가 너무나도 미웠다.

환상적인 새벽이 끝나고 동이 트기 시작했을 즈음, 덱스터는 이리아의 곁을 떠났다.

잠에서 깬 이리아가 그를 보았을 때 보일 표정은 안 봐도 뻔했다. 덱스터는 호의적인 감정이 없는 녹빛 눈동자를 마주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참 애석하게도, 하늘은 절대로 두 남녀의 사랑을 돕지 않았다.

이리아는 덱스터에게 어제저녁, 구해 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대신, 단검에 입을 맞추어 대마법사의 축복을 새겨 넣었다.

당시 이리아는 검집의 앞과 뒤를 구분하지 못해 내키는 대로 씌워놓았었다. 운이 좋으면서 안타까운 사실 하나는 바로 이리아가 씌운 방향이 옳았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단검을 올바른 방향으로 집어넣었기에, 덱스터는 끝까지 이리아가 제 나름의 감사 인사를 전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만일 이리아가 단검을 반대로 집어넣었더라면, 그는 그것을 핑계로 이리아에게 말을 걸 수 있었을 것이다. 아마 조금 긴 대화를 나눌 수도 있었을 터다.

어젯밤에는 자신이 먼저 손을 꼭 끌어안았으면서, 덱스터는 그에게 감사 인사 한마디조차 전하지 않은 이리아가 싫었다.

또 한없이 초라해지던 그는, 다리를 절뚝거리면서도 요한과 시시덕대는 이리아를 보자마자 끝내 결심하고 말았다.

덱스터는 아무도 없는 계곡으로 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언제나 넣어 다니는 담배 한 개비와 라이터였다.

‘이것도 이제 지치는군…….’

그는 까맣게 가라앉은 눈으로 담배와 라이터를 응시했다.

인제 그만하고 싶다. 가망 없는 짝사랑이란 버틸 수 없이 괴롭다는 사실을, 덱스터는 27년 만에 뼈저리게 깨달았다.

이리아 때문에 하늘로 솟고 지하까지 가라앉는 감정도, 그녀를 보며 가슴을 움켜잡는 자신도 이제는 진절머리 났다. 이리아가 사랑스러운 만큼 증오스러웠고, 예쁜 만큼 미웠다.

7년 전 루퀼렘 성의 난간에서 이리아를 만나면 안 되었었다. 그 일주일 내내,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안 되었었다.

이리아 아델리어를 처음부터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더라면. 7년 만에 다시 만난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더라면. 그랬다면, 이런 아픈 짝사랑도 하지 않았을 텐데.

덱스터는 할 수만 있다면, 이리아와 관련된 지난 과거의 기억들을 모조리 쥐어뜯어 활활 태워 버리고 싶었다. 이리아 아델리어를 지울 수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도 팔 것이다.

‘……이제 됐어.’

이딴 사랑, 관둘 거다. 앞으로 다시는 이리아 아델리어를 눈에도 담지 않을 거고, 관심도 주지 않을 거다. 이 감정이 완벽하게 사라질 때까지 그녀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무시해 버릴 거다.

덱스터는 지난 5년의 금연 생활이 무색하게, 긴 장초를 잇새에 물었다.

그리고, 라이터를 켰다.

그러나 담배 끝에 불이 붙으려는 찰나, 덱스터는 저 멀리서 들려오는 대화들 사이로 이리아의 소식을 전해 듣고 말았다.

그건 이리아가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는 소식이었다.

첫사랑을 그만둘 거라고 덱스터는 스스로에게 세뇌하듯 수차례 다짐을 거듭했었다. 하지만 그를 제외한 온 세상은 이미 알고 있었다.

사랑은, 단 한 순간에 싹둑 끊어 낼 수 없다는 사실을.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덱스터의 두 다리는 이미 이리아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

이리아는 다리를 다쳤던 전날보다도 더 앓았다. 생애 처음으로 감기에 걸린 그녀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뜨겁고 축축했다.

덱스터가 땀을 주룩주룩 흘리는 이리아를 응시하며, 한껏 낮아진 목소리로 질문했다.

“설마 감염이 된 건 아니겠지?”

막사 한구석에서 주사기들을 정리하던 줄리에타가 그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덱스터가 그답지 않게 간호사에게 참 관심이 많다고 생각하며 답했다.

“공께서 소독을 일찍 해 주신 덕에 감염은 아니에요. 간밤에 무리해서 독한 감기에 걸린 듯합니다.”

“감기라 하기에는 너무 힘들어하잖아. 해열제는 몇 알이나 먹은 거지?”

“해열제를 먹기 전에 기절해서, 대신 주사를 놓았습니다. 한 시간 후에도 열이 안 떨어지면 한 번 더 놓을 예정이에요.”

줄리에타는 간단하게 이리아의 열을 다시 잰 후에, 막사를 나섰다. 그녀는 며칠 전 마물에게 당해 다리가 찢어져 치료를 받았던 군인들의 실밥을 풀러 가야 했다.

잠꼬대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실신해 버린 이리아를 바라보기는 생각보다 더욱 힘든 일이었다.

홀로 남은 덱스터는 이마에 달라붙은 새빨간 머리카락들을 하나하나 정리해 주었다. 첫사랑을 끊어 낼 시도조차 할 수 없이 무작정 달려온 그의 눈동자 속에는 걱정이 한가득 스며들어 있었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