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59/109)

58화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이리아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고선 덱스터의 등 뒤에 서 있었다. 그녀는 어두운 밤눈 때문에 짙은 그림자에 가려진 덱스터를 다른 이로 착각한 듯했다.

제 앞에 앉아 있는 남성이 덱스터라는 사실을 꿈에도 알지 못하는 이리아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의 볼을 더 꾹 눌렀다.

“조금 전에는 자러 간다고 했으면서…… 이 거짓말쟁이!”

내 앞에 서 있는 이리아 아델리어가 현실이 맞는 건지.

지금의 상황이 몹시 황당한 덱스터는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올리고선 이리아를 응시했다.

들려오는 대답이 없자, 이리아는 장난을 친다고 생각했는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자그마한 손으로 덱스터의 옷깃을 잡아 이리저리 흔들었다.

“네가 없어서 심심해 죽는 줄 알았어. 할 일 없으면 나랑 놀자?”

“……군부대에 있으면서도 심심해?”

“응! 저기에 다들 모여서 이상한 카드 게임을 하고 있는데, 나는 그걸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고……. 딱히 할 일이 없어.”

그러니까 네가 나랑 놀아 주라, 응? 이리아가 코를 찡그리며 덧붙였다.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덱스터는 애교가 흠뻑 들어간 이리아의 목소리에, 행복한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그가 알겠다고 대답하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리아는 점차 길어지는 눈앞의 인영을 보며 당황한 낌새를 숨기지 않았다.

이리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녀가 덱스터의 가슴팍에 제 정수리를 들이대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 그런데 네 키가 이렇게나 컸던가……?”

자신이 날 다른 사람으로 착각했다는 걸 깨달으면 분명 질겁할 거다.

덱스터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선, 이리아의 작은 어깨를 살포시 밀었다.

“할 일 없으면 가서 자. 아침마다 졸지 말고, 일찍 잠드는 습관을 길러 봐.”

어어? 생각보다 낮은 남성의 목소리를 뒤늦게 깨달은 이리아는 더더욱 당황하여 주변을 두리번댔다.

덱스터가 흔들리는 눈망울로 그를 올려다본 이리아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그는 뽀얀 뺨을 손등으로 살며시 쓸며, 여느 때보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가서 얼른 자.”

이리아는 얼떨결에 알겠다고 끄덕였다. 그녀는 막사로 가는 와중에도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았지만, 끝까지 덱스터를 알아채지 못했다.

덱스터는 이리아의 인기척이 완벽하게 사라진 후에 곧장 콘라드 메이필드를 찾아갔다. 콘라드는 어김없이 땅바닥에 주저앉아 담배를 말고 있었다.

“어이, 콘라드.”

“까…… 깜짝이야! 인기척 좀 내고 다녀, 이 양반아!”

“내일 씨시 힐데어랑 포커 한판 해.”

“……뭐?”

이리아는 분명 나를 요한 엘로이스로 착각했다. 간호사들 사이서 카드 게임을 하지 못하면 내일도 심심하다며 그를 찾을 텐데, 그럴 바에는 콘라드가 묶어 두는 게 났다.

콘라드는 담배를 말다 말고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덱스터를 빤히 응시했다.

덱스터는 마음만 같아서는 그에게라도 모든 걸 설명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설명할 수가 없다. 27년 만에 찾아온 첫사랑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남자는 아마 전 대륙을 통틀어서도 없을 것이다.

덱스터는 조금 전, 그를 찾아온 이리아가 신기루 같았다. 뺨에는 여전히 그녀의 감촉이 남아 있었고, 새빨간 머리카락이 스쳐 간 가슴팍은 울렁였다.

이리아는 지금껏 그에게 단 한 번도 웃어 보인 적 없었기에, 미소를 머금었던 얼굴이 환상처럼만 느껴졌다.

이리아 아델리어는 내가 정확히 누구였는지도 모르는데, 홀로 그 순간을 곱씹는 모습이 참 등신 같다.

‘한심한 새끼…….’

덱스터는 순간, 스스로가 너무나도 초라해져서 버틸 수가 없었다. 한참 어린 요한 엘로이스에게 질투를 하는 것도 자존심이 상하고, 콘라드에게 뜬금없는 부탁을 내던지는 것도 짜증스러웠다.

그가 여전히 의아스러운 눈빛의 콘라드를 향해 고개를 내저었다.

“됐어. 내가 한 말은 잊어버려.”

이어 자신을 부르는 콘라드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덱스터는 휙 등을 돌려 버렸다.

세상 모든 음유시인은 첫사랑을 아름다운 감정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덱스터 하워드에게만큼은, 첫사랑이 개미지옥이었다.

***

이리아 아델리어는 날이 갈수록 너무나도 미워졌다.

그녀에게 다가갈 수라도 있었다면 참 좋았을 터다. 만일 그녀에게 다가갈 수라도 있었다면, 덱스터는 적어도 첫사랑을 이토록 고통스럽게는 느끼지 않았을 터다.

그러나 이리아는 덱스터를 볼 때마다 도망가기 바빴고, 그가 말이라도 걸 때면 화들짝 놀라 눈치를 살폈다. 대화는 고사하고 짝사랑하는 상대에게 가까이 갈 수조차 없으니, 덱스터는 미쳐 버릴 노릇이었다.

다행히 콘라드는 덱스터가 일전에 내뱉었던 이상한 소리를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 사실, 그는 덱스터가 어떤 말을 했었는지도 잘 기억하지 못했다.

콘라드가 들고 있는 소총을 장전하며 장난스레 말했다.

“야, 우리 너무 많이 붙어 다니지 않냐? 이러다가 미래엔 너랑 결혼할 듯.”

“그런 끔찍한 소리 마.”

“나는 결혼 교향곡은 싫어하걸랑? 우리 결혼식 때는 무조건 최신 가요로 해.”

“헛소리. 내일 세상이 멸망해도 네놈이랑은 결혼할 일 없어.”

“호호. 저는 당신이 알아서 잘 정하리라고 믿어요, 여보.”

콘라드는 결국, 덱스터에게 한 대 얻어맞고 나서야 입을 닥쳤다.

첫사랑에 허덕여도 일은 해야 했다. 뜨끈한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부대 밖으로 나온 덱스터는 해가 빨리 저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는 점점 더 어두워지는 하늘을 가라앉은 눈으로 응시했다.

틸다가 죽은 그날 밤 이후로, 마물들은 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대담해졌다. 그것들은 인간과 죽음에 대한 겁이 없었다. 인간이 검을 들면 이빨을 세우고, 총을 들면 손톱을 휘둘렀다.

이리아를 포함한 간호사들은 하루가 다르게 많아지는 부상자 때문에 종종 밤을 새우기도 했다. 루퀼렘에서 의술을 배웠던 이리아는 군인들의 상처를 다루는 일을 꺼리지 않았지만, 잔인하게 찢어진 부상들에는 약간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저녁까지 조사에 나서는 군인들도 지쳐 갔다. 매일 저녁 조사가 끝나면 덱스터와 콘라드의 체력만이 남아돌았기에, 둘은 부대 밖에 남아 따로 추가 조사를 하는 편이었다.

콘라드가 마물이 오기로 새겨 넣은 듯한 잇자국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더 똑똑한 짐승들이란 말이지.”

표시를 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말에 덱스터도 동감했다.

마물들은 인간의 심리를 너무나도 잘 꿰고 있었다. 그들은 흔적이 생길 수 없는 장소에도 억지로 발자국을 찍어 수사에 혼동을 주거나, 울음소리로 군인들을 유도하여 대열을 흐트러뜨리는 등의 만행을 서슴없이 저질렀다.

마치 한때 인간과 같이 살았던 짐승 같구나. 전혀 말이 안 되는 생각을 하며, 덱스터는 피 묻은 단검으로 옆 나무에 표식을 남겼다.

“이만 돌아가지, 콘라드. 이쯤 하면 충분해.”

“안 충분해, 인마. 나는 하루빨리 이 지긋지긋한 군 생활을 끝내고 내 집에 가고 싶단 말이다.”

“어차피 이번 가을 내로는 안 돼. 돌아가자.”

콘라드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가 꽃을 뜯어먹고 있는 퀸터의 고삐를 당기는 순간,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야, 잠시만.”

콘라드가 천천히 소리가 나는 방향을 가리켰다. 덱스터는 그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 검은 숲을 응시했다.

콘라드의 말대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러나 너무 희미하고 작아서, 정확히 그 소리의 출처가 무엇인지는 도통 파악할 수가 없었다.

분명 산짐승의 울음소리일 터다. 덱스터가 콘라드에게 신경 쓰지 말라며 손짓을 하는 찰나에, 익숙한 굉음이 온 숲을 뒤흔들었다.

총소리였다.

탕! 총성이 울리기 무섭게, 숲의 새들이 일제히 푸드덕 날아올랐다. 새들은 훤한 보름달을 향해 머나먼 곳으로 도망쳤다.

이토록 늦은 저녁, 숲에 사람이 있으면 안 되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상황이 펼쳐졌다는 점을 깨달은 두 군인은 반사적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덱스터가 황급히 퀸터의 안장에 묶어 둔 검을 꺼내 들었다. 오랜만에 든 검은 다행히 날카롭게 갈려 있었다.

“내가 가지.”

그는 투레질하는 퀸터에게 따라오지 말라고 손짓한 후, 총성이 들린 장소로 달려갔다.

덱스터는 뒤늦게 콘라드가 언급했던 이상한 소리가 바로 울음소리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비명과 딸꾹질이 섞여 있는 울음소리는 분명 여인의 것이었다.

들려오는 울음소리는 덱스터의 귀에 무척이나 익숙했다. 그는 우는 여인의 정체를 알 것만 같았지만, 애써 부정하며 두 다리를 움직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덱스터의 예상은 맞았다.

흙과 피로 엉망이 된 빨간 머리카락을 보자마자, 그의 시야는 탁 꺼져 버렸다.

“젠장, 대체 왜 이곳에 네가……!”

울음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이리아 아델리어였다.

덱스터는 여느 때처럼 빠르고 간결하게 이리아 위에 올라타 있던 마물을 죽였다. 그는 뛰어난 사냥 실력을 소유한 만큼, 지금껏 수도 없이 숨 떨리는 상황들을 겪어 왔다.

하지만 과거 그 어떤 상황들도 지금, 이 순간보다 더 위험하지는 않았다.

이리아를 본 순간 새까매졌던 시야는 무척이나 천천히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동시에, 가슴속에 엄청난 열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덱스터는 검은 숲 한가운데서 마물의 몸 아래 깔려 울부짖던 이리아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던 그는 파르르 떠는 이리아에게 짐승처럼 거칠게 소리쳤다.

뭐라고 소리를 쳤는지 정확한 내용은 기억할 수가 없었다. 문장을 제대로 정리할 틈도 없이, 머릿속에 생각나는 단어들을 두서없이 내뱉었던 것 같다.

그러잖아도 애잖았던 이리아의 떨림은 그가 소리를 내지르자마자 더욱 심해졌다.

“그, 죄, 죄…….”

파들파들 떠는 이리아는 쉴 틈 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녀는 올라오는 울음보를 못 이겨 거칠게 콜록거리다가, 덱스터에게 소심한 사과를 전했다.

“죄송해요…….”

이리아의 물기 어린 사과에, 덱스터의 분노는 언제 올랐냐는 듯 빠르게 진정되었다. 마치 용암 속에 풍덩 빠진 얼음덩이처럼, 분노가 순식간에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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