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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58/109)

57화

유일한 친구를 하룻밤 사이에 잃어버렸다. 이리아는 애써 밝은 척을 해 보았지만, 울적한 기분을 완전히 숨길 수는 없었다.

그녀는 날이 갈수록 더더욱 우울해졌다. 덱스터는 한동안 이리아가 혹시 계곡물에서 빨래를 하다가 물에 뛰어들지는 않을지, 은가위로 제 몸에 상처를 내지는 않을지 노심초사한 마음으로 그녀를 지켜보아야 했다.

틸다는 이리아에게만 특별한 말이었다. 이리아가 제 조랑말을 잃은 슬픔으로 허우적댈 때, 다른 이들은 멀쩡하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덱스터가 바라본 이리아의 슬픔은 어느 날 밤 모여 있는 군인들이 루퀼렘에 관해 이야기하는 순간, 절정을 찍고 말았다. 우연히 주변을 지나가던 이리아가 대화 내용을 다 듣고 만 것이다.

‘빌어먹을. 앞으로는 부대 내에서 루퀼렘을 금지어로 정해야 하나.’

덱스터는 쓸데없는 말을 하는 군인들의 입에 재갈을 콱 물려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는 쌓이고 쌓인 슬픔으로 더욱 조그마해진 이리아의 뒷모습을 황급히 따라나섰다.

이리아는 여물을 씹고 있는 말들 사이서 단번에 퀸터를 찾아냈다.

그녀가 울먹이며 투레질하는 퀸터에게로 다가갔다.

[티, 틸다가…….]

그리고, 퀸터의 거대한 목덜미를 두 팔로 꼭 껴안았다.

[틸다가 너무 보고 싶어…….]

이리아는 검은 털가죽 깊이 뺨을 파묻은 채로, 투명한 눈물을 몇 방울 흘려보냈다.

그림자 속에 숨은 덱스터는 그녀가 우는 모습까지도 전부 지켜보았다. 그는 아주 긴 고민 끝에, 다음 날 이리아를 위해서 퀸터를 두고 조사에 나가기로 결심했다.

덱스터는 아침이 되자마자 콘라드의 말을 빌려 탔다. 제 주인이 갑자기 다른 말을 타니, 퀸터는 한참을 어리둥절 고개를 흔들었다.

덱스터는 퀸터에게 이리아를 잘 달래 주라는 말을 전한 후, 군인들과 함께 조사에 나섰다. 퀸터를 통해 이리아가 기분이 나아진다면, 그는 앞으로도 계속 남의 말을 탈 의향이 있었다.

조사가 끝나자마자, 덱스터는 조금이라도 밝아졌을 이리아를 기대하며 부대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의 기대를 확인할 수도 없이, 이리아는 부대 그 어디에도 없었다.

혹시 정말로 계곡에서 빨래를 하다가 물에 들어가 버린 건 아닌지.

입이 바싹 마를 정도로 초조해진 덱스터는 사라진 이리아를 찾아 온 사방을 뒤졌다.

“이리…… 아니, 씨시 힐데어는?”

“씨시요? 씨시는 조금 전에 나갔는데…….”

빌어먹을. 여기에도 없다.

간호사들의 막사에도 없다는 걸 확인한 덱스터는 급기야 하늘에 매를 날려 보내기 위해 콘라드를 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 있는 이리아를 찾아낼 수 있었다.

주홍빛의 노을 안에서, 이리아가 퀸터를 타고 새까만 지평선을 따라가고 있었다.

대체 어디까지 가려는 생각인지, 탁한 그림자가 진 그녀의 얼굴 위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마치 죽은 제 조랑말을 쫓아 사후 세계로 갈 듯한 기세에, 덱스터는 순간 미치도록 두려워졌다.

‘안 돼, 이리아.’

심장이 우뚝 멎어 버린 느낌이다. 그는 다급히 달려가 퀸터의 고삐를 휘어잡았다.

주인을 알아본 퀸터는 왜 이제야 왔냐며 화풀이하듯 콧김을 내뿜었다. 그러나 덱스터는 그런 퀸터를 달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이리아를 바라보았다.

저 머나먼 노을을 구경하고 있던 이리아의 고개가 느릿하게 돌아갔다. 슬픔이 한가득 담긴 두 녹빛 눈망울은 눈물이 맺혀 애처롭게 반짝이고 있었다.

이리아는 거친 숨을 내쉬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심상치 않은 모습에 덱스터가 괜찮냐고 물으려던 순간, 갑자기 퀸터가 앞다리를 높이 들어 올렸다.

히이잉! 그의 울음소리가 장황하게 울리고, 동시에 이리아의 작은 몸뚱이는 미끄러져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앗……!”

덱스터는 재빠르게 공중에서 이리아의 허리를 낚아챘다. 그녀가 품속으로 들어오며 향긋한 과일 향기, 그리고 인간의 온기가 강렬하게 훅 끼쳐 왔다.

깜짝 놀란 이리아는 물기가 서린 눈동자를 크게 치켜뜨고선 덱스터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생각보다 더욱 가까이에 있자, 덱스터는 이제 다른 의미로 심장이 멈춘 기분이었다.

‘이리아…….’

맞닿은 옷자락 안쪽에서부터 콩콩 뛰는 맥박과 보드라운 여체가 느껴졌다.

긴장한 이리아가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움직이자, 덱스터의 단단한 몸 아래서 그녀의 가슴이 뭉그러졌다.

이리아의 허리를 붙잡은 손아귀에 서서히 힘이 들어갔다. 덱스터는 금방 자신의 얼굴과 하체에 피가 쏠렸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다.

눈물로 젖은 두 눈망울도, 향긋한 과일 향기도, 손 안쪽으로 느껴지는 보드라운 피부까지도. 이리아 아델리어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부분이 위험하다.

어느덧 덱스터의 온 시야에는 이리아의 얼굴, 그리고 그녀의 촉촉한 입술뿐이었다. 순간 품 안의 이리아 아델리어를 게걸스럽게 삼켜 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폭풍처럼 일자, 덱스터는 스스로를 믿을 수가 없어졌다.

이러다간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널 것만 같다.

정신이 번쩍 든 그가 황급히 이리아의 허리를 놓았다.

“아야!”

예상치 못한 순간에 엉덩방아를 찧게 된 이리아의 잇새서 새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녀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하고선 덱스터를 쳐다보았지만, 그는 빠른 걸음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덱스터는 피가 쏠려 단단해진 아래를 진정시키기 위해 숲에서 비센티움 군가를 세 번이나 불렀다. 옷자락 아래서 느껴지던 이리아의 온기가 떠오를 때마다 볼이 화끈거렸다.

분명 틸다를 잃은 이리아 아델리어는 우울했고, 덱스터는 그런 그녀의 기운을 조금이라도 북돋기 위해서 퀸터를 남겨 두었었다.

덱스터는 바지 아래를 진정시키자마자 혹시 자신이 이리아와 퀸터의 산책을 방해해 버린 건 아닌지 걱정하기 시작했다. 만일 그녀가 더더욱 우울해졌으면?

그러나 덱스터의 걱정이 무색하게, 부대로 돌아온 이리아는 전보다 더 쌩쌩했다.

덱스터는 저 멀리서 요한 엘로이스와 시시덕거리는 이리아를 발견하자마자 가슴이 식는 기분이었다. 조금 전까지 그녀를 걱정했던 저 자신이 천하의 머저리처럼 느껴졌다.

불쾌해진 그가 요한과 이리아에게 들으라는 듯 크게 소리쳤다.

“얼굴에서 여유가 넘치는군. 다들 할 일이 없나 보지?”

군인들은 금세 상황을 파악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이런 부분에서는 다들 눈치가 백 단이었다.

덱스터는 그 와중에도 도망치는 요한을 향해 까르르 웃는 이리아 때문에 기가 찼다. 그가 양 눈썹을 일그러뜨리고선 거친 비소를 내뱉었다.

“……하!”

저렇게 어리고 여려 보이는 요한 엘로이스가 뭐가 좋다고!

곱게 달아오른 이리아의 양 볼이 너무 얄밉고 원망스럽다. 자신은 필사적으로 피해 다니면서, 요한에게는 딱 붙어 있는 이리아 아델리어가 밉다.

완전히 감정이 상해 버린 덱스터는 이후 며칠 동안 온갖 핑계를 대며 요한 엘로이스를 괴롭혔다. 이리아를 괴롭힐 수 없으니, 요한이라도 건드려야 솟아오르는 이 질투가 조금이라도 진정될 것만 같았다.

물론, 덱스터는 그가 하는 짓이 열 살배기 꼬맹이들이 하는 행동과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유치하고 좀스럽다.

하지만 원래 사랑은, 한 남자를 어린아이로 만드는 법이다.

***

콘라드 메이필드는 부대의 모든 이를 통틀어 가장 성격이 유한 데다가, 눈치도 빨랐다. 그는 덱스터의 유치한 화풀이가 길어질수록 지쳐 가는 군인들의 상태를 귀신같이 알아챘다.

얼굴을 때리는 모래바람에 퀸터가 거칠게 고개를 흔들었다. 콘라드는 퀸터의 검은 갈기 사이에 박인 모래들을 털어 주며 입을 열었다.

“대체 뭐 때문에 화가 난 거냐?”

건틀렛을 벗고 있던 덱스터가 그를 돌아보았다. 콘라드가 빨리 대답하라는 투로 눈썹을 삐딱하게 들어 올렸다.

덱스터는 침묵을 유지하며 잠시 그를 응시하다가, 대충 둘러댔다.

“화 안 났어.”

“아이고-, 저 거짓말에 소질이 없는 새끼.”

콘라드가 과장하여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는 퀸터에게 뭐라고 속삭인 후, 덱스터의 어깨 위에 거만하게 손을 올렸다.

이어, 그가 손끝으로 볼을 콕콕 찌르며 일렀다.

“대체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만 풀지 그래? 네 눈치 보느라 군인들의 등이 모두 새우처럼 변해 가고 있단다?”

장난스레 말했지만, 전하는 내용은 진심이었다.

덱스터가 알겠다는 뜻으로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자신이 최근 군인들을 과도하게 갈구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군인들이 무슨 죄인지. 덱스터는 다가온 퀸터의 이마를 쓰다듬어주며 반성했다.

과거에는 제 감정에 치우쳐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한 이들을 한심하게 생각했었는데, 지금 자신이 그러고 있다.

한창 덱스터가 반성의 시간을 보낼 때, 콘라드가 잇새에 담배를 물며 말했다.

“너 요즘에 하는 짓을 보면 꼭 내 조카 같다, 야. 걔도 어느 날에는 기분이 하늘로 솟아 있다가, 또 어느 날에는 기분이 푹 가라앉아 있단 말이지.”

손바닥에 얼굴을 푹 묻고 있던 덱스터가 살며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콘라드는 어깨를 으쓱이며 뒤늦게 덧붙였다.

“아, 참고로 내 조카는 올해로 세 살임.”

허. 한심하다는 듯 실소를 내뱉은 덱스터는 퀸터의 고삐를 끌고 최대한 빠르게 콘라드의 곁을 벗어났다.

조금 전 조사에서 마물의 주둥아리에 팔을 쑤셔 넣은 탓에, 건틀렛을 벗은 덱스터의 두 손은 검붉은 핏물로 흥건했다. 그는 비릿한 냄새를 맡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계곡물에 손을 씻어 내렸다.

굳어 버린 피는 쉽사리 벗겨지지 않았다. 덱스터가 욕설을 중얼거리며 손바닥을 마주 비빌 때, 누군가가 뒤에서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누가 찾아온 건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고운 손끝이 그의 뺨을 꾹 눌렀다.

손의 주인은 이리아 아델리어였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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