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57/109)

56화

‘뭐라고? 결혼?’

결혼이라니. 비센티움에 완전히 정착하는 것도 모자라서 기어이 가정을 만들려고 하는구나, 이리아 아델리어.

솔직히 말하자면 못 할 건 없었다. 저렇게나 예쁘고 인기도 많은데, 마음만 먹으면 아마 결혼을 다섯 번도 더 넘게 할 수 있을 테지.

보통 결혼은 신뢰의 문제이니, 이리아 아델리어와 결혼할 미래의 남편은 당연히 그녀의 정체를 알게 될 터였다. 아마 하얀 머리카락과 황금빛 눈동자를 가진 그녀의 진짜 모습도 볼 것이다.

다른 누군가가 이리아 아델리어의 ‘그’ 모습을 본다고 생각하니 속이 확 뒤집혔다. 덱스터는 그녀의 마음에도 없는 계획 때문에 되지도 않는 질투를 시작한 셈이었다.

짜증이 나 죽을 것만 같다.

그가 한창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가슴팍을 진정시키고 있을 때, 이리아 아델리어의 깜짝 놀란 목소리가 고막을 꿰뚫었다.

“하, 하워드 공이 담배를 태우셨었어요?”

이리아 아델리어의 입에서 ‘내 이름’이 튀어나왔다.

이리아의 한마디에, 덱스터의 짜증은 곧바로 가라앉았다. 그는 사냥개들이 짖지 못하도록 대충 고기를 물려 준 후, 둘의 대화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그 양반은 열다섯일 때부터 피웠어, 씨시. 하루에 한 갑은 무조건 태웠지.”

“정말요? 그렇게 중독이 심했는데 어떻게 끊으셨대요?”

“어떤 꼬마애가 끊으라고 혼냈대. 참 웃기지? 의사가 끊으라고 했을 때는 듣는 척도 안 하던 놈이…….”

“그러고 보니 저도 예전에 창밖에서 담배 피우던 어떤 외국인 아저씨를 혼낸 적 있어요.”

아. 순간, 덱스터의 잇새서 탄식이 새어 나왔다.

‘기억하고 있었구나.’

이리아 아델리어는 7년 전, 루퀼렘 성에서 만난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덱스터 혼자서만 가슴속에 품었던 추억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덱스터의 기분은 언제 짜증이 났냐는 듯 높게 치솟았다. 그는 손아귀 속 고기를 모조리 사냥개들에게 던져 준 후,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두 남녀에게로 다가갔다.

“그 아저씨는 담배 끊으셨대?”

“잘 모르겠어요. 그때 이후로 만난 적 없거든요.”

“그런 인연들이 가끔 있지. 우연히 만난 아저씨인가 보다, 씨시?”

“네, 우연히 만났죠. 생각해 보면 그 아저씨가 하워드 공이랑 비슷한 면들이 조금 있었어요. 머리카락 색도 까맸고, 키도 되게 컸던 것 같고, 말투도 비슷했고…….”

이리아는 고사하고, 그녀와의 대화에 정신이 팔린 콘라드 또한 가까워지는 인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덱스터는 이리아의 새빨간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기분 좋은 목소리로 물었다.

“내 말투랑 어떤 점이 비슷했는데?”

“글쎄요. 오만하고 싸가지가 없었던 게, 하워드 공이랑 똑같…….”

뒤늦게 이상한 점을 눈치챈 이리아와 콘라드의 고개가 동시에 스르르 올라갔다.

일전에 실수로 덱스터와 부딪혔을 때처럼, 이리아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파래졌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우왕좌왕 사과를 한 후에, 재빠르게 도망갔다.

이 모든 상황이 황당한 덱스터는 도망가는 이리아를 잡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싸가지 없고 오만한 말투라니. 정말로 내 말투가 그런가?

콘라드 메이필드도 자신이 ‘그지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했었다. 사람들을 살갑게 대하지 않는다는 사실 정도는 평소에도 알고 있었는데, 말투가 ‘싸가지 없고 오만’하다든가, 성격이 ‘그지’ 같은 점은 딱히 느끼지 못했었다.

이리아 아델리어가 과거의 추억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기뻤다. 하지만 기억 속 그가 ‘싸가지 없고 오만한’ 남자라면, 죽어도 정체를 밝히고 싶지 않았다.

정말로 미치겠다. 한 사람의 첫인상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던데.

당시 어렸던 그녀에게 말 좀 살갑게 할 것을. 덱스터는 생애 처음으로 그의 과거 언행을 후회하며, 다른 사람들은 신경조차 쓰지 않는 제 어투를 심각하게 걱정하기 시작했다.

***

당연한 사실이지만, 덱스터를 제외한 부대의 다른 이들은 그들 사이에 루퀼렘의 대마법사가 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대부분의 비센티움인들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북쪽의 나라에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었다. 부대 사람들도 엄연한 비센티움인들이었기에, 그들은 간혹 일부러 루퀼렘을 언급하며 욕을 했다.

“에즈메릴다 혼 루미에르 여왕의 봉쇄 정책도 저는 마음에 안 들어요. 엘퀸즈 산맥 주변에 결계를 두르겠다니, 꼭 산맥 전체가 루퀼렘 것인 양 군다니까요?”

“에이, 엘퀸즈 산맥 전체가 루퀼렘 것은 아니죠. 산맥 국경선은 먼 과거부터 조금 애매했잖아요.”

“제 말이 바로 그거예요! 루퀼렘과 국경 문제를 이렇게 길게 끌고 갈 바에는, 차라리 황실에서 직접 루퀼렘 왕실에 사자를 보내 깔끔하게 담판을 지었으면 참 좋겠다니까요!”

“그러잖아도 카즈웰 3세께서 최근 루퀼렘을 향한 반대 여론을 끌어모으시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또 전쟁을 시작하시려나…….”

덱스터는 제발, 이리아 아델리어가 저 대화를 듣고 있지 않기를 바랐다.

루퀼렘과 비센티움은 전혀 다른 민족성으로도 갈등을 빚었지만, 지리적 문제로도 많이 싸웠다.

과거 비센티움을 건국한 던햄 공이 주변국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을 당시, 루퀼렘은 엘퀸즈 산맥 안쪽으로 이주했다.

던햄 공은 뜬금없이 비센티움의 북쪽에 국경선을 그은 루퀼렘인들을 몹시나 못마땅해했다. 그러나 이민족들을 통합하고 전쟁 피해를 복구하기 바빴기에, 그는 루퀼렘이 임의로 그어 놓은 국경선을 제대로 타협하지 못했다.

현재 루퀼렘과 맞닿아 있는 비센티움 북쪽의 성벽도 에즈메릴다 혼 루미에르 여왕과의 긴 대화 끝에 겨우 쌓아 올릴 수 있었다. 양국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사료들마저도 국경선 문제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기에, 비센티움은 여전히 루퀼렘과 엘퀸즈 산맥 소유권을 두고 다투는 중이었다.

먼 과거부터 커다란 제국을 추구해 왔던 비센티움인들에게 영토 문제는 무척이나 예민하게 받아들여진다. 덱스터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간호사들의 대화를 애써 무시하며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일찍 자러 들어갔는지, 이리아 아델리어의 모습은 부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덱스터는 그녀가 대화를 듣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숨통이 조금 트이는 기분이었다.

마물들은 날이 갈수록 똑똑해졌다. 그들은 최근 며칠 사이 다발적으로 여러 구간에 흔적을 남겨 조사에 혼동을 준 후, 군인들이 방심하던 사이에 부대로 진입했다.

덱스터와 군인들은 언젠가 마물이 큰일을 벌이리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이리아가 일찍 자러 들어간 이 밤일 줄은 예상조차 못 했다.

어두운 하늘에 사냥개들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잠에서 깬 군인들은 다급하게 흔적을 조사해 도망친 마물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덱스터는 일전에도 수차례의 마물 대 토벌전을 거쳤지만, 마물이 부대 중심부까지 침범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는 자주 사용하지 않는 돌격소총 속에 탄을 집어넣으며 달려오는 군인에게 물었다.

“부상자는?”

“라울 경께서 팔을 다쳤지만 심각한 상처는 아닙니다. 그리고 말 한 마리가 공격당해 죽었는데…….”

“그렇군. 심각한 상처가 아니라면 됐어.”

마물이 부대 안쪽까지 침범한 상황에서, 말 한 마리를 잃은 것쯤은 미미한 피해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죽은 말의 정체를 모르던 덱스터는 피해가 크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소총을 장전했다.

깊은 밤, 갑작스럽게 펼쳐진 상황은 잘 훈련된 군인들도 당황하게 하기 충분했다. 잘 이어지던 마물의 잇자국이 중간부에서 뚝 끊기자, 군인들은 우왕좌왕 어찌할 줄을 몰랐다.

마물은 이빨 수에 비해 턱이 현저히 작아 주둥아리를 제대로 닫을 수가 없다. 걸어 다닐 때 침을 흘리거나, 나무에 이를 가는 습성을 가진 것도 작은 턱 때문이다.

보통은 나무들을 따라 새겨져 있는 잇자국을 추적하면, 마물이 대강 어디쯤 있는지 알아낼 수가 있었다. 하지만 부대 안쪽까지 들어온 놈은 똑똑했다. 군인들이 나무를 살핀다는 사실을 알고, 숲 한복판에서부터 이를 아예 갈지 않은 것이다.

덱스터가 반쯤 공황에 빠진 군인들 사이를 지나가며 소리쳤다.

“잇자국을 일부러 중간에서 끊었어. 그리 멀리 못 갔을 테니, 다들 족적부터 조사해!”

그는 희끄무레한 달빛 아래 비친 마물의 발자국을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창 사냥개들이 컹컹 짖으며 냄새를 따라갈 때, 어디선가 여인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집중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희미한 소리였지만, 덱스터는 단번에 울고 있는 여인이 누군지 알아차렸다.

‘……이리아?’

이리아 아델리어가 울며불며 뭐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덱스터는 개를 더 풀라는 명령을 남기고, 다급하게 이리아를 찾아 어둠 속을 가로질렀다. 그는 생각보다 금방 이리아를 찾을 수 있었는데, 낙엽 위에 쓰러진 조랑말 한 마리를 보자마자 제자리에 우뚝 서고 말았다.

일순간 시야가 새하얘지며, 앳된 이리아의 목소리가 아득한 곳에서부터 울려 퍼졌다.

[틸다는 내 친구야. 내가 세상으로 나올 때 수십 마리의 동물들이 함께 태어났는데, 틸다도 그때 태어났어. 나랑 생일이 같은 친구라구!]

말은 딱 한 마리 죽었다.

그런데 죽은 딱 한 마리의 말이 왜 하필 틸다인 걸까.

이리아와 틸다는 주인과 조랑말 이상의 관계였다. 덱스터는 비센티움에 온 이리아가 외로움을 느낄 때마다 틸다를 찾아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털어놓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틸다는 덱스터를 제외하고, 이리아의 진짜 출신을 아는 유일한 존재였다.

이미 온 얼굴이 눈물범벅이 된 이리아는 틸다를 고기로 남기겠다는 군인의 팔을 부여잡고 있었다. 팔을 놓아주지 않는 이리아가 짜증스러웠는지, 군인의 주먹이 그녀의 머리 위로 올라가는 순간. 덱스터의 눈은 회까닥 돌아 버렸다.

그가 성큼성큼 다가가 엄청난 손힘으로 어깨를 움켜쥐었다. 뼈가 짓이기는 듯한 고통에, 군인의 얼굴은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하…… 하워드 공.”

“귀 병신이야? 마물 족적부터 조사하라고 한 말 못 들었나?”

이리아는 덱스터를 보자마자 힘겹게 숨을 헐떡였다. 그녀는 더러운 흙바닥을 다급히 엉금엉금 기어와 바짓가랑이를 움켜쥐었다.

다리를 잡은 두 손에서부터 온몸의 떨림이 전해졌다. 이리아는 두 눈에서부터 눈물을 쉴 틈 없이 흘리며 횡설수설 애원했다.

“틸다는 안 돼요. 제, 제, 제발 틸다는…… 틸다는 손대지 말라고 해…… 해 주세요. 그…… 그렇게 할 수 이…… 있잖아요. 틸다는 절대로, 절대로 아…… 안 된단 말이에요……!”

안 된다는 걸 잘 안다.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식자재를 원하는 만큼 구할 수 없는 군대에서는 죽은 짐승을 무조건 고기로 남겨 두는 편이었다. 만일 틸다의 사체를 그대로 둔다면, 조만간 고깃덩이가 되어 군인들의 배 속으로 들어갈 게 뻔했다.

예의를 차려 땅에 묻어 주는 것이 최고의 방법일 테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럴 수 없다.

애원하는 이리아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덱스터의 심장은 몇 번이고 난도질당했다. 그가 황급히 허리춤에서 술병과 라이터를 꺼내 틸다의 위로 던졌다.

“빨리 태워 버려.”

다행히, 이리아는 군말 없이 틸다를 태웠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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