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11.
“……인정할 수 없어.”
주변 군인들이 일제히 덱스터를 돌아보았다. 옆에서 담배를 말고 있던 콘라드가 그 특유의 능글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인정할 건 인정하셔야죠, 이 양반아. 우리 겨울 내로 절대 못 돌아간다니까?”
“……그런 뜻이 아니야.”
“그럼 뭔 뜻인데?”
덱스터가 한숨을 삼키며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벌써 몇 번째인지, 이리아 아델리어만 생각하면 얼굴에 제멋대로 열이 올랐다.
콘라드가 어리둥절해하는 군인들에게 ‘5년 만에 온 금단 현상인가 봐.’라고 말하며 낄낄거렸다. 덱스터는 그런 가볍게 그를 무시하고선 막사를 나섰다.
겨울은 진즉에 끝났지만, 여전히 아침 공기는 쌀쌀했다. 다른 이들 같았다면 추워서라도 잠을 깼을 텐데, 이리아 아델리어는 간호사들의 막사 앞에 주저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아침이라 그런지 붉은 곱슬머리는 온통 산발이었다. 멀리서 이리아를 지켜보고 있던 덱스터는 그녀가 자그마한 털북숭이 강아지 같다고 생각했다. 더불어, 참 귀엽다고도.
덱스터의 소망과 반대로, 이리아 아델리어는 인기가 많았다. 유부남, 그리고 이미 밖에 애인을 가진 이들을 제외한 모든 군인이 이리아 아델리어를 마음 한구석에 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쓸데없이 너무 예뻐.’
덱스터는 젊은 군인들이 괜히 그녀에게 시비를 걸 때마다 배알이 꼴려 죽을 것만 같았다.
생애 처음 해 보는 질투가 참 독하게도 찾아왔다.
“어이구. 일어난 지가 언젠데 다시 자는 거냐, 씨시?”
“아…… 안 잤어요. 그냥 앉아 있던 거예요.”
“그러다가 저번처럼 또 줄리에타한테 혼나지.”
무장한 군인들이 이리아의 정수리를 헝클어뜨리며 지나갔다. 감히 누구의 머리에 손을 대는 건지, 덱스터는 그들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리라고 다짐했다.
제 마음을 깨달은 덱스터의 하루는 이리아 아델리어를 중심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는 조사에 나가기 전 아침마다 꾸벅꾸벅 조는 이리아 아델리어를 구경하고, 조사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저녁을 먹는 이리아 아델리어를 구경했다.
사실, 콘라드의 말대로 이리아의 체구는 너무나도 조그마했다. 간호사들 사이에 앉아도 확연히 작은 게 드러나니, 사람들이 루퀼렘인이라고 의심을 하지 않는 게 이상했다.
저 멀리 간호사들 틈에 앉아 소심하게 빵을 뜯어 먹던 이리아는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는지, 말간 녹빛 눈동자를 빛냈다.
겨우 스무 살이 된 이리아는 그녀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간호사들의 대화에 쉽사리 끼지 못했다. 그녀는 거의 대화를 듣는 편이었는데, 대화의 주제가 어려워 이해가 불가능할 때면 혼자서 이상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
바로 지금처럼.
‘……쟤는 대체 또 뭘 하는 거야……?’
포도주를 모닥불에 버리는 사람은 태어나서 처음 본다.
얼마 전에는 부엉이에게 손을 흔들고, 그저께는 커피콩을 물에 불리더니, 이제는 포도주를 모닥불에 쏟고 있다. 이리아의 얼굴이 기대감에 부풀어 있으니, 덱스터는 더더욱 그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졌다.
모닥불에 포도주를 쏟으면 마법이라도 일어나는 건가. 무엇을 기대하기에 저런 얼굴을 하는 거야?
“어이, 건망증 환자.”
입에 담배를 문 콘라드가 거만하게 덱스터의 어깨 위에 팔꿈치를 올렸다. 그가 눈살을 찡그리며 이리저리 고개를 흔들었다.
“대체 뭘 보길래 머저리처럼 넋을 잃고 있는 거냐?”
“아무것도 안 봐.”
덱스터가 억지로 콘라드의 뺨을 다른 방향으로 쭉 밀며 대답했다.
치사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덱스터는 내심 콘라드 메이필드가 더 이상 이리아 아델리어에게 관심을 가지지 말았으면 했다.
이리아가 취향이 아니라던 그의 말은 믿는다. 하지만, 취향과 상관없이 사랑에 빠지는 건 순식간이지 않은가. 덱스터 자신도 그랬으니까.
혹시 콘라드에게 들킬까, 일부러 딴청을 피우고 있던 덱스터의 귓가에 줄리에타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렸다.
줄리에타는 이리아가 다 쏟아 버린 포도주를 보고 큰 탄식을 내뱉었다.
“씨시! 포도주를 다 버리면 어떡해요! 이 아까운 걸!”
“그, 아, 안에 든 게 물인 줄 알았어요…….”
누가 봐도 거짓말이다. 분명 포도주인 걸 알고선 일부러 쏟은 건데.
귀족가의 자제임에도 불구하고, 줄리에타 엘로이스는 물건을 매우 아끼는 것으로 유명했다. 오죽하면 국고를 쉽사리 열지 않았던 카즈웰 1세보다도 더 구두쇠 같다는 말이 돌까.
줄리에타는 어깨를 한껏 움츠린 이리아에게 긴 잔소리를 했다. 혹시 눈물이 많은 이리아 아델리어가 또 울먹거리고 있을까 걱정된 덱스터는 남몰래 뒤를 힐끔거렸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 달리, 이리아는 쌩쌩했다.
이미 루퀼렘 성안에서 루 아휜의 잔소리를 평생 견뎌 온 그녀는 줄리에타의 말에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도리어, 줄리에타가 잠시 고개를 돌린 틈을 타 은근슬쩍 남은 포도주를 깡그리 불 속에 쏟기까지 했다.
포도주를 버리면서도 댕그래진 눈망울로 줄리에타의 눈치를 살피는 꼴이 막 사고를 친 강아지 같았다. 덱스터는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옅은 실소를 흘렸다.
미치겠다. 저런 모습까지도 너무 사랑스럽다.
어느새 콘라드는 첫 담배를 다 태우고, 두 번째 담배를 꺼내 물고 있었다. 그는 웃음을 머금은 덱스터를 보고선 옆에서 불을 붙여 주는 요한에게 속삭였다.
“미친. 저 새끼 진짜로 5년 만에 금단 현상이 왔나 봐…….”
“금단 현상이라니요. 그냥 피곤하신 거겠죠.”
“아냐. 쟤는 겨우 피곤하다는 이유로 나사 빠진 것처럼 피식거리지 않는단 말이야. 금단 현상이 분명해.”
“정상적인 사람은 담배를 끊은 지 5년 만에 금단 현상이 오지 않아요, 부단장님.”
“그 정도는 나도 알아, 요한 엘로이스. 그런데 저 새끼는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잖아.”
이후에도 이런저런 허튼소리를 속삭이던 콘라드는 결국 한 대 맞고 난 후에야 입을 닫았다.
덱스터는 빈 포도주병을 품속에 안은 채 뒤뚱거리는 이리아를 몰래 눈으로 따라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다가, 예상치 못한 순간 고개를 돌린 이리아 때문에 허공에서 시선이 딱 마주쳤다.
“아……!”
이리아는 덱스터의 검은 눈동자를 알아차리자마자 불에 덴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그녀는 한동안 풍성하게 오른 곱슬머리를 어색하게 만지작거리더니, 간호사들에게로 다시금 쪼르르 달려가 버렸다.
좋았던 기분이 순식간에 바닥을 쳤다.
덱스터는 콘라드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덱스터는 이리아가 자신을 무서워한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렸다. 그를 피해 다니는 녹빛 눈동자에는 언제나 두려움이 가득했으니, 모르는 게 더 이상했다.
처음에는 비센티움의 군단장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덱스터는 지금껏 군단장으로서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을 살해했다. 그리고 루퀼렘의 대마법사인 이리아 아델리어는 살생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그러니 숨 쉬듯이 살인을 저질러 온 자신을 이리아가 무서워한다고 해도, 덱스터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리아는 덱스터를 제외한 다른 군인들과는 아무 이상 없이 지냈다. 따지고 보면 항상 선두에서 싸웠던 콘라드 메이필드가 그보다 더 많은 살인을 저질렀을 텐데, 이리아는 콘라드는 멀쩡하게 대했다.
군단장이기 때문도 아니야. 그럼 대체 무엇 때문에 나를 무서워하는 거지?
덱스터는 도망치는 이리아의 뒷모습을 볼 때마다 수없이 제 과거를 곱씹어야 했다. 자신이 이리아에게 어떤 잘못을 저질렀기에 그녀가 항상 달아나기만 하는지 이유를 알아내기 위함이었지만, 이유는 끝까지 알지 못했다.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리아는 그가 10여 년도 더 지난 과거에 내뱉었던 ‘단 두 문장’ 때문에 덱스터 하워드를 필사적으로 피해 다녔던 것이니까.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이리아 아델리어가 자신을 무서워하진 말았으면 했다.
덱스터의 기분은 하루에도 수십 번 하늘을 찍었다가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저 멀리 보이는 이리아가 배시시 웃으면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그녀가 우울하거나, 도망치거나, 다른 군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기분이 나빴다.
덱스터의 기분은 특히나, 이리아가 콘라드와 함께 있을 때 지하까지 곤두박질쳤다.
둘이 가까워지지 않으면 좋겠다는 소망과 다르게, 콘라드와 이리아는 죽이 잘 맞았다. 이리아는 콘라드를 참 흥미로운 남자로 생각하는 듯했다.
“또 다치셨어요?”
“응. 이번에는 발목. 말 타는데 한눈팔다가 떨어졌어.”
“낙마했는데도 크게 안 다치셔서 다행이네요.”
“그래도 나름 군인인데, 그 정도로 크게 다치면 안 되지.”
등 뒤에서 둘의 목소리가 나직이 울려 퍼졌다.
덱스터는 나무에 묶인 사냥개들에게 닭고기를 찢어 주며, 몰래 대화를 훔쳐 들었다.
“씨시, 너는 전쟁이 끝나면 뭐 할 거야?”
“글쎄요. 전 딱히 생각해 본 적 없는데……. 부단장님은요?”
“나? 나는 귀농 계획 중.”
“귀…… 귀농이요? 부단장님이!?”
“가끔은 허무맹랑한 계획이 사는 데 큰 도움이 될 때가 있어, 씨시. 어차피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거든.”
“그런가요?”
“고럼, 당연하지.”
다른 사람의 인생 계획은 딱히 궁금하지 않다. 그러나 그 사람이 이리아 아델리어라면, 이야기는 다르다.
루퀼렘 군주를 버리고 나온 이리아 아델리어는 미래에 무엇을 하고 있을까. 궁금한 덱스터는 느릿한 손짓으로 물병을 따며 이리아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곧이어 튀어나온 그녀의 대답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럼 저는 결혼이나 할래요!”
일순간, 덱스터는 머금고 있던 물을 모조리 뱉어내고 말았다. 예상치 못한 물세례에 옆에 있던 한 군인이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덱스터는 그에게 짧게 사과의 말을 건넨 후, 콜록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