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화 (55/109)

54화

쿵. 둔탁한 소리가 덱스터의 귓가를 메웠다.

분명 소리가 들렸는데도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덱스터는 처음에 당황했다가 뒤늦게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새빨간 곱슬머리를 가진 여인이 그의 발치에 주저앉아 끙끙대고 있었다.

‘……이리아 아델리어?’

자신이 이리아를 밀쳐 버렸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덱스터의 낯빛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덱스터는 답지 않게 아주 긴 시간 허둥거렸다. 머리를 이리저리 헝클어뜨리고 얼굴을 쓸어내리는 그는 누가 봐도 당황한 모양새였다.

저 작은 몸에서 나기 힘든 엄청난 소리가 났었다. 설마 어디 다치기라도 한 건 아니겠지? 몸이 조그마하니 뼈도 약할 텐데, 만일 골반에 금이라도 갔으면?

‘이리아 아델리어를 일으켜 주어야 하나? 하지만 넘어뜨린 장본인인 내가 감히 저 몸을 만져도 되는 건가? 아니, 그전에 일단 다쳤는지부터 확인해야 하나?’

아주 짧은 찰나에 덱스터는 할 필요도 없는 수만 가지의 걱정을 했다. 그렇기에 그는 이리아 아델리어가 직접 엉덩이를 툭툭 털며 일어나자마자, 내심 엄청나게 안도했다.

덱스터는 일부러 그가 낼 수 있는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사과의 말을 전했다.

“미안해. 너인 줄 몰랐어.”

“아…… 아녜요…….”

파르르 떨리는 문장 끝을 듣자마자, 덱스터는 며칠 전의 비슷한 기억을 떠올려 냈다.

그러나 그때는 적어도 이리아 아델리어가 이렇게 세게 넘어지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재차 사과의 말을 전해야 하나 고민하던 덱스터의 귓가에 이리아의 소심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어, 어깨 실을 빼내야 하는데…… 그…… 바, 바쁘시면 나중에 다시 올게요.”

이리아는 고개를 푹 수그린 채로, 새빨간 정수리만을 보였다. 머리카락 아래로 언뜻 보이는 둥근 이마 끝에서는 머리카락만큼이나 새빨갛고 긴 속눈썹이 펄럭이고 있었다.

일순간, 덱스터는 앞으로 내려온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어깨를 다쳤던 그날처럼, 가까이서 이리아 아델리어와 눈을 마주하고 싶다.

얼굴이 보이지 않음에도, 덱스터는 그의 맨피부를 만지는 이리아 아델리어로부터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그는 머리카락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녹빛 눈동자를 살피며 난생처음으로 흉터투성이인 몸이 부끄러워졌다.

이리아 아델리어는 생채기조차도 나 본 적 없겠지. 뽀얗고 고운 두 손에는 아마 굳은살 하나도 없을 터다.

호기롭게 옷을 벗기는 했지만, 덱스터는 이리아가 상처 가득한 자신의 몸을 흉하게 생각할까 봐 내심 겁이 났다.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아온 그녀의 눈앞에 전쟁터에서의 험난한 삶을 활짝 드러낸 기분이었다.

피부의 실을 빼는 건 쉬운 작업이었기에 금세 끝이 났다.

“다…… 다 됐어요.”

이리아가 희미하게 떨리는 손으로 은 가위를 거두었다. 새빨간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커다란 눈망울들은 남몰래 덱스터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덱스터는 그녀에게 고맙다고 인사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이리아는 후다닥 달음박질칠 때까지, 머리칼 사이로만 소심하게 그를 마주했다.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얼굴 한 번은 제대로 보여 주고 가면 좋았을 것을.’

덱스터는 옷을 껴입는 내내, 멀어지는 이리아의 등에서부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여전히 그는 왜 자신이 이리아 아델리어의 얼굴을 보고 싶어 하는지, 왜 그녀의 모습에서부터 시선을 거둘 수가 없는지, 스스로의 심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이게 다 이리아가 쓸데없이 예쁘기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며 나동그라진 갑옷들을 챙겼다.

***

어깨의 실을 푼 이후, 이리아는 우연히라도 덱스터를 마주치지 않으려 무진장 노력했다.

덱스터는 이리아가 자신을 필사적으로 피해 다닌다는 사실을 금세 깨달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그녀의 새빨간 곱슬머리는 아주 먼 거리에서도 확연히 눈에 띄었으니까.

이리아 아델리어는 대체 왜 나를 피해 다니는 걸까.

철없던 10대 시절, 자신이 내뱉었던 말을 기억하지 못한 덱스터는 이런저런 추측을 하며 수배지를 살폈다.

많은 수는 아니었지만, 루퀼렘에서 비센티움으로 도망쳐 나온 마법사는 과거에도 몇 있었다. 도망친 마법사는 대부분 범죄자나 간신이었기에, 루퀼렘 왕실은 서슴지 않고 온 대륙에 수배지를 뿌리곤 했다.

그러나 아무리 루퀼렘이 수배지를 잔뜩 뿌린다 해도, 이렇게 전쟁터에까지 날아드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대마법사를 잃은 루퀼렘 왕실의 초조함이 전쟁터에 날아든 수배지들을 통해 생생하게 전해졌다.

비센티움인들은 루퀼렘에게 반감을 품고 있는 만큼, 수배지 속 인물에 참 관심이 많았다. 그들은 루퀼렘 왕실이 찾는 마법사가 극악한 범죄자일 게 분명하다며 열띤 토론을 했다.

그리고 덱스터는, 부대에서 나도는 군인들의 목소리들을 들으며 생각했다.

‘이렇게 보니 멍청이들이 따로 없군…….’

마음만 같아서는 저 멀리 있는 빨간 머리의 여인이 바로 그 수배지 속 마법사라고 온 사방에 알리고 싶었다. 군인들의 말을 들으며 어떤 생각을 할지, 이리아 아델리어의 머릿속이 그 어느 때보다 더 궁금해졌다.

하지만 막상 이리아는 그들의 토론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오로지 쓰러진 에즈메릴다 혼 루미에르 여왕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리아가 야간 보초를 서던 날, 덱스터도 함께하게 되었다. 그는 어둑어둑해진 지평선을 걸으며 간호사들에게 인사를 하는 이리아를 구경했다.

이리아 아델리어는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노을 위를 날아가는 새들을 응시하는 중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커다란 두 눈망울에는 반쯤 초점이 없었다.

덱스터가 한창 이리아의 작은 머릿속을 추리하고 있을 때, 한 군인이 다가와 그에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부대 동쪽은 깨끗합니다, 하워드 공.”

“그래. 살피느라 수고했어.”

어젯밤까지만 해도 부대 주변은 점점 더 가까워지는 마물의 발자국들로 엉망이었건만, 지금은 또 깨끗하단다.

덱스터는 이리아 아델리어의 머릿속만큼이나 알 수 없는 마물들을 향해 고개를 내저었다.

덱스터 하워드는 오랜 시간 군인 생활을 했음에도 수면 습관은 엉망인 남자였다. 그렇기에 그는 종종 밤늦게까지 사냥개들과 함께 부대를 거닐고는 했는데,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다.

내내 그루터기에 앉아 있던 이리아 아델리어는 올빼미의 울음소리가 잦아들자마자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자그마한 나무 양동이를 들고선 홀로 계곡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 밤에 혼자서 어딜 가는 거지?’

아무리 마물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해도, 무장도 하지 않은 여인이 부대 주변을 돌아다니는 건 위험했다.

덱스터는 대충 간식을 던져 사냥개들의 관심을 돌린 후에, 이리아를 따라나섰다.

대체 어디까지 올라가는지 궁금해질 정도로, 이리아는 흐르는 계곡물을 거슬러 계속해서 언덕을 탔다. 숨 돌릴 틈도 없이 열심히 움직이던 그녀는 부대의 불빛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즈음에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무엇을 하려는 거야, 이리아 아델리어……?’

덱스터는 커다란 나무 뒤에 숨어 이리아의 모습을 전부 지켜보았다.

이리아는 물이 찰랑거리는 양동이를 바닥에 내려 두고선 그 뒤에 앉았다. 양동이에서 빛이 나기 시작하자, 덱스터는 단번에 그녀가 마법을 준비 중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리고 곧이어, 덱스터의 눈앞에는 환상적인 장면이 펼쳐졌다.

새빨간 곱슬머리가 서서히 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 순혈 비센티움만큼이나 생기가 감돌았던 피부는 루퀼렘인의 것처럼 창백해지고, 녹색의 눈동자는 점점 더 선명한 황금빛이 되었다.

덱스터는 눈꺼풀 한 번 깜빡이지 못한 채, 넋을 놓고선 이리아를 몰래 지켜보았다.

창백한 피부, 새하얀 머리카락과 황금빛의 눈동자는 7년 전의 그 꼬맹이의 것과 같다. 하지만 어린 시절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원래 모습을 되찾은 스무 살의 이리아 아델리어는 미치도록 아름다웠다.

루퀼렘 성 천장에 그려져 있던 그 여인이 눈앞에서 숨을 쉬고 있다.

이 넓은 세상에 오로지 이리아 아델리어만이 존재하는 듯했다. 그녀를 지켜보는 내내, 덱스터의 온몸은 차가운 얼음물과 뜨거운 용암에 번갈아 담가지기를 반복했다. 그의 입 안은 바싹 말라 가는 반면, 두 손바닥은 땀으로 흥건해졌다.

물에 빠진 것도 아닌데, 숨통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덱스터는 그의 발밑에서 작은 나뭇가지가 부러질 때까지, 앙다문 잇새로 힘겹게 공기를 뱉어 냈다.

‘……아.’

딱. 나뭇가지가 부러지자마자, 반쯤 나갔던 정신이 번쩍 돌아왔다.

인기척을 느낀 이리아가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덱스터는 황급히 입가를 틀어막고선 어둠 속에 제 모습을 단단히 숨겼다.

설마 들킨 건가. 루퀼렘인인 이리아 아델리어의 밤눈이 어둡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덱스터는 안심을 할 수가 없었다. 전쟁터에서보다도 더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멀리서 이리아의 핀잔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데서 놀아. 너 때문에 깜짝 놀랐잖아.]

이리아는 풀숲에서 튀어나온 토끼가 인기척을 냈다고 착각한 듯했다.

덱스터는 그녀의 둔함에 감사하며 서늘하게 식은 가슴팍을 쓸어내렸다.

빛이 새어 나오는 양동이 물 위로 루 아휜의 모습이 비쳤다. 거리가 너무 멀어 그를 정확히 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덱스터는 루 아휜이 나타나자마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런 그와 달리, 이리아는 한없이 애틋한 표정으로 찰랑대는 루 아휜의 긴 은발을 바라보았다.

[루…….]

물 위로 드러난 루퀼렘 성의 모습에 완전히 넋을 잃은 이리아는 정말로 그림 속 여신이 되어 버리기라도 한 듯,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혹시 또 실수로 인기척을 낼까, 덱스터는 힘줄이 도드라진 손으로 심장 부근을 부여잡았다.

덱스터는 이리아 아델리어의 하얀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휘날릴 때마다, 그녀의 기다란 속눈썹이 깜빡일 때마다 속이 울렁거리는 기분이었다.

심장을 입 밖으로 토해 낼 것만 같다는 게 바로 이런 느낌이나 보다.

쿵쿵.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무겁게 뛰는 심장 박동이 귀를 메웠다. 새가 펄럭이는 듯한 속은 이제 울렁거리다 못해 뒤집힐 지경이었다.

[뭐야, 거짓말이었잖아!]

이리아는 에스메릴다 혼 루미에르 여왕의 상태를 확인하자마자 배시시 미소 지었다.

창백한 두 뺨 위로 생기가 감도는 순간, 끝내 덱스터의 심장은 땅끝까지 뚝 떨어지고 말았다.

[괜히 걱정했네. 하긴, 여왕님이 그렇게 쉽게 쓰러질 분은 아니시지!]

제 할 일을 끝낸 이리아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계곡을 따라 내려갔다.

그러나 덱스터는 이리아가 사라진 이후에도, 한참 자리를 벗어날 수 없었다.

짙은 밤그림자에 몸을 숨긴 그는 느릿하게 두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감쌌다. 땀 때문에 젖은 손바닥 아래로, 화끈거리는 뺨이 느껴졌다.

이제 알겠다. 왜 이리아 아델리어로부터 시선을 뗄 수 없었는지, 왜 루퀼렘 군주의 자리를 버린 그녀에게 관심을 거둘 수 없었는지…….

이리아 아델리어 때문에 밤잠을 설치고, 그녀를 과도하게 걱정했던 자신이 등신처럼 느껴졌다. 덱스터는 이리아 아델리어가 그의 목소리를 떠올리지 못하고, 함께했던 추억을 홀로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 어느 때보다 더욱 비참했다.

새하얗게 변한 머릿속이 고통스러웠다. 힘차게 뛰다 못해 땅끝으로 푹 가라앉아 버린 이 심장을 미치도록 부정하고 싶다.

손바닥 아래, 새빨갛게 달아오른 한 남자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덱스터 하워드, 이 미친 새끼…….’

이리아 아델리어를 사랑한다.

덱스터 하워드는 이미, 이리아를 사랑하고 있었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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