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4/109)

53화

콘라드 메이필드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소총을 건네받자마자 곧바로 이리아를 찾아갈 것만 같은 모양새였다. 그러나 하늘 위에서 평화를 깨는 세찬 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자마자, 계획은 엉망이 되고 말았다.

매의 울음소리.

부대 가까이서 마물의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의미였다.

덱스터와 콘라드는 반사적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색이 다른 두 남자의 눈동자에는 피곤이 한가득 스며들어 있었다.

“최근 들어 이 주변에서 마물이 나타나는 빈도수가 확연히 늘었어.”

“부대가 피해를 보기 전에 하루빨리 여왕벌을 없앨 필요가 있겠군.”

“젠장, 귀찮아 죽겠네. 오늘은 아무 일도 안 일어나나 했더니만, 어김없이 이렇게 일을 터뜨려 주시는구나!”

새하얀 조랑말 옆에서 꽃을 우적우적 씹고 있던 퀸터는 덱스터가 다가오자마자 신경질적으로 투레질했다. 휴식 시간을 깨는 방해꾼의 등장이었다.

덱스터는 짜증을 부리는 퀸터를 어르고 달래 겨우 부대 밖으로 끌고 갈 수 있었다. 덱스터 또한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기에 최대한 빨리 복귀하고 싶었지만, 상황은 예상보다 더욱 복잡했다.

마물을 연구했던 옛 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마물은 집단지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들도 인간처럼 협력하여 포식자들에게 대적한다.

마물은 집단지성을 가진 데다가 서로 간단한 의사소통이 가능하기에, 군부대의 위치를 파악한 후 부대를 서서히 압박하는 습성이 있었다.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부대 가까이에 찍히는 발자국들이 바로 그 증명이었다.

자꾸만 꽃을 씹으며 투레질하던 퀸터 때문에 흔적을 원하는 만큼 자세히 조사하지는 못했다. 덱스터는 부대로 돌아오자마자 비센티움 동쪽을 그린 거대한 지도 위에 마물의 발자국들을 표시했다.

이후에도 마물들은 드문드문 흔적을 남겨 덱스터와 콘라드 메이필드를 괴롭혔다. 급기야 발자국이나 잇자국들이 뜬금없는 장소에서까지 발견되기 시작하자, 덱스터는 더욱 골이 아파졌다.

흔히들 마물은 4살짜리 아이의 지능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하는 짓거리를 보면 그보다 더 똑똑한 것 같다. 이상한 장소에 흔적을 남겨 조사에 혼동을 주는 행동까지 참 같잖고 짜증스러웠다.

덱스터 하워드와 콘라드 메이필드는 단장과 부단장이었음에도, 조사의 거의 모든 순간을 함께했다. 콘라드가 피곤한 군인들을 구슬려 추가 작업을 시키는 데 선수였기 때문이었다.

덱스터가 바쁘니, 콘라드 또한 더불어 바빠졌다. 그는 줄리에타로부터 소총을 건네받은 지 일주일이 지난 후에야 겨우 시간을 낼 수 있었다.

“아아. 우리 장군님이 어디에 계실까나?”

어김없이 담배를 잇새에 문 채로, 콘라드는 부대를 돌며 이리아를 찾았다.

그가 매캐한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옆에 따라붙은 덱스터에게 물었다.

“……그런데 너는 왜 따라와?”

“그 빨간 머리 간호사에게 네가 이상한 추파라도 던질까 봐 미치도록 걱정되는군.”

“씨시는 내 취향 아니라고 했잖냐, 망할 건망증 환자야.”

그래도 안심을 할 수가 없다. 붙임성이 탁월한 데다가 쓸데없이 얼굴이 수려한 콘라드 메이필드는 지난날, 군부대에서 꼬신 여인만 해도 한 보따리 수준이었으니까.

평생 성안에서 살아와 순진한 이리아 아델리어는 아마 그가 조금만 유혹해도 완전히 넘어가 버리겠지.

새롭게 인생을 시작하는 루퀼렘의 군주가 콘라드 메이필드처럼 이상한 남자에게 코가 꿰이는 광경은 별로 보고 싶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 이리아 아델리어의 새빨간 곱슬머리는 멀리서도 확연히 눈에 띄었다. 들꽃을 구경하는 그녀는 어수선한 군부대와 어울리지 않게 참으로 평화로우면서도 아름다웠다.

“여, 큰일을 하실 분!”

콘라드의 외침을 들은 이리아는 멀리서 다가오는 그를 향해 환히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의 옆 덱스터와 시선이 마주치기 무섭게, 스르르 미소를 거두었다.

그러잖아도 단단히 굳어 있던 이리아의 얼굴은 콘라드에게서 볼트액션 소총을 받자마자 더더욱 굳어 버렸다.

그녀가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며 소심하게 말했다.

“아, 안 돼요. 저는 사…… 살면서 칼과 총은 잡지 않기로 했어요.”

“그래도 배워.”

이리아가 퍼뜩 고개를 들어 덱스터를 바라보았다.

커다란 두 눈망울은 놀랍도록 애잔했다. 사실 덱스터는 이 순간, 마음이 약해져 싫으면 배우지 않아도 좋다고 할 뻔했다.

콘라드 메이필드를 괜히 따라왔나 보다. 그가 혹시라도 루퀼렘의 군주를 꾈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따라나선 것이었는데, 이리아 아델리어를 볼 때마다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던 밤이 생각나며 기분이 제멋대로 이상해졌다.

내 몸이 대체 왜 이러는지 모르겠구나. 덱스터가 한숨을 삼키며 뒤늦게 덧붙였다.

“잊었나? 이곳은 군부대야. 언젠가 총을 쏴야 할 순간이 올 수도 있어.”

이리아는 뭐라 반박하고 싶은 듯했지만, 끝까지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녀는 총 두 발을 쐈다. 한 번은 콘라드와 함께, 그리고 또 한 번은 혼자서 방아쇠를 당겼다.

10년이 넘는 세월 내내 총과 칼을 두 손에 달고 살았던 덱스터에게는 겨우 ‘두 발’이었다. 총 두 발을 쏘는 건 그에게는 숨을 쉬는 것만큼이나 간단한 일이었으나, 이리아에게는 아니었다.

이리아 아델리어는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힘겨워했다. 루퀼렘의 군주로서 살생을 반대하고 무기를 잡아 본 적 없으니 그럴 수 있겠다고 하지마는, 덱스터는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힘겨워하는 그녀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눈물을 닦아 주었던 그날 밤, 덱스터는 이리아 아델리어에게 관심을 주지 않겠다고 단단히 결심했다. 그러나 마음과 다르게, 몸은 계속해서 이리아의 모든 흔적을 쫓았다.

“그럼 오늘은 씨시가 한 번 사냥에 가 볼까? 어때?”

모닥불을 뒤적이고 있던 덱스터의 손길이 허공에서 우뚝 멈추었다.

그의 고개가 천천히 이리아가 있는 쪽으로 돌아갔다.

등을 보이고 앉아 있었기에, 덱스터는 이리아의 얼굴까지는 보지 못했다. 하지만 축 늘어진 어깨와 바르르 떨리는 손으로, 그녀가 공황에 빠지기 일보 직전이라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허공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던 건 살생이 아니기에 가능했을 터다. 그러나 사냥은 살생이다.

이리아 아델리어는 저 숲에 들어가 절대로 동물을 잡지 못할 것이다.

사실, 이리아 아델리어가 ‘루퀼렘인스럽다.’라는 말은 콘라드 메이필드 외에도 꽤 많은 군인이 내뱉었었다. 그러잖아도 은근하게 의심을 받는 상황에서, 사냥까지 실패한다면 분명 쓸데없는 여론이 만들어질 거다.

‘아, 미치겠군…….’

이리아 아델리어를 ‘씨시 힐데어’로 대하기로 마음먹었는데.

그녀에게 관심을 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자꾸만 나서게 되는구나.

“어디 가십니까, 하워드 공?”

“잠시 걷고 싶군.”

“산책하러 나가시는데 왜 소총을 함께…….”

“갑자기 마물이 나타날 수도 있잖나.”

덱스터 하워드는 마물이 나타나면 주먹으로 팼으면 팼지, 총은 잘 쏘지 않는 남자였다.

군인들이 그를 의아스럽게 쳐다보았지만, 덱스터는 뻔뻔하게 이리아를 따라 숲으로 들어갔다.

이리아를 쫓기는 쉬웠다. 땅거미가 진 숲 위로, 그녀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으니까.

거침없던 덱스터의 걸음은 이리아를 발견하자마자 서서히 느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새까만 눈썹 끄트머리가 잘게 일그러졌다.

‘아…….’

저 멀리, 검은 숲 한가운데 오도카니 선 이리아 아델리어는 서럽게 울고 있었다.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는 이리아의 울음소리는 산토끼들이 나타나자마자 더욱 커졌다. 그녀는 거세게 떨리는 손으로 총구를 몇 번이고 조준했지만, 단 한 번도 쏘지 못했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이리아의 새빨간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축축하게 젖은 얼굴에 자꾸만 머리카락이 붙자, 이리아는 갓 태어난 짐승처럼 엉성한 손길로 뺨을 쓸어내렸다.

저 먼발치서 이리아 아델리어가 흐느끼는 장면이 느릿하게 재생되었다.

그녀가 눈물을 한 방울씩 떨어뜨릴 때마다, 머리카락이 붙은 뺨을 닦아 낼 때마다 덱스터는 제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히는 기분이었다. 흙바닥에 진 이리아의 그림자마저도 애잔하게 느껴졌다.

이런 기분이 드는 것도, 이리아 아델리어가 애잔하게 보이는 것도 다 7년 전의 그 빌어먹을 루퀼렘 성에서의 추억 때문이다.

덱스터는 울렁이는 가슴팍을 애써 무시하며 나무 뒤에 제 모습을 숨겼다.

덱스터는 곧장 가장 가까이서 뛰는 토끼의 옆구리에 가늠쇠를 맞추었다. 탕. 익숙한 굉음이 숲의 까마귀들을 다 도망가게 했을 즈음, 토끼는 싸늘한 사체가 되어 있었다.

덱스터는 토끼를 잡아 준 이후에도 아주 긴 시간 자리를 뜨지 못했다.

그는 훌쩍이는 이리아의 작은 등이 시야에서 온전히 사라질 때까지 모습을 숨기고 있어야만 했다.

다행히, 덱스터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지 않았다. 군부대의 사람들은 이리아가 토끼를 직접 사냥했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씨시 힐데어가 ‘루퀼렘인스럽다’는 말도 머지않아 쏙 들어갔다.

군인들의 분위기를 읽는 데 약한 이리아는 알지 못했지만, 사실 군부대에서는 한동안 그녀의 ‘사냥 실력’에 관해 왈가왈부했다. 덱스터가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정확한 급소에 총탄을 박아 넣었기에, 그가 잡은 토끼를 그대로 들고 간 이리아는 의도치 않게 명사수가 되어 있었다.

군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이리아가 사냥에 꽤 소질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콘라드 메이필드만은 예외였다.

그가 어디선가 뜯어 온 강아지풀로 덱스터의 볼을 간지럽히며 속삭였다.

“난 다 봤단다, 덱스터 하워드. 네가 씨시 대신 토끼 잡아 준 거.”

덱스터가 퀸터의 갈기를 빗다 말고 신경질적으로 강아지풀을 걷어 냈다. 매서운 눈빛이 느껴졌지만, 이미 익숙한 콘라드는 새초롬하게 눈꺼풀을 깜빡이며 덱스터를 바라보았다.

콘라드의 과장된 표정은 누가 봐도 ‘관심 있지?’라는 뜻을 담고 있었다.

덱스터가 고개를 휙 돌리며 단호하게 내뱉었다.

“그런 거 아니니까 꺼져.”

“뭐가 그런 게 아니야? 원래 이 정도로 친절하지 않으시잖아요, 단장님. 역시 네 눈에도 씨시가 참 예쁘긴 한 거지?”

“그런 거 아니라니까.”

“굳이 뺄 필요 없단다, 친구야. 저번에 도와주지 않는다는 말은 농담이었어. 난 네가 씨시랑 잘해 보려고 하면, 기꺼이 밀어줄 의향이 있다구?”

“네게 꺼지라고 두 번째로 말하고 있어.”

“야, 인생 평생 혼자 살 거 아니잖냐. 너도 여자를 사귀고, 그 그지 같은 성질머리 좀 고쳐 봐!”

마음만 같아서는 콘라드의 머리카락을 모조리 뽑아 퀸터가 먹는 여물에 섞어 버리고 싶다.

무언가 놀리는 듯한 그의 말투에 짜증이 오른 덱스터는 고개를 돌리는 것도 모자라 콘라드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려 버렸다.

재미난 사실을 알아챘다는 듯, 콘라드는 이후에도 한참 강아지풀로 그의 목덜미를 간지럽히며 놀려 댔다. 자식 이름은 최대한 멋있게 지어야 한다며 유행하는 이름들을 줄줄이 읊어 주던 그는, 덱스터가 주먹을 쥐고 나서야 황급히 도망쳤다.

콘라드는 이전에도 그가 여자와 조금 길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이면 마구 놀려 대기 바빴다. 그렇기에 저 모습이 익숙하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이리아 아델리어를 엮으니 이유 모르게 더 짜증스러웠다.

다음에도 저런 이상한 말들을 한다면, 정말로 머리카락을 다 뽑아 버릴 테다. 덱스터는 퀸터의 검은 갈기를 빗겨 주며 조용히 성을 냈다.

그의 화가 가라앉기까지는 참으로 긴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그렇게 덱스터가 짜증스러운 마음을 겨우 가다듬었을 즈음, 누군가가 또 팔을 툭툭 두드리는 게 아닌가.

덱스터는 콘라드가 다시 찾아왔다고 생각해 거칠게 팔을 휘둘렀다.

“내가 분명 꺼지라고 했지!”

그러나, 찾아온 이는 콘라드가 아니었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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