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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53/109)

52화

덱스터는 새근새근 숨을 내쉬는 이리아의 얼굴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거칠게 고개를 내저었다.

이리아 아델리어에 관해서는 이제 관심을 두지 않기로 했다. 대마법사였던 그녀의 지난 세월은 모른 척하기로 했어.

덱스터는 이리아 아델리어의 얼굴을 어루만질 때마다 그의 배 속에서 새가 날아다니는 느낌이 나는 것도, 자신이 그녀에게 과한 관심을 쏟는 것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일순간, 스스로가 바보가 된 듯한 느낌에 덱스터는 정색하며 이리아의 얼굴에서부터 손을 거두었다.

대체 왜 이리아 아델리어는 그 많고 많은 장소를 두고 이 전쟁터로 왔단 말인가. 그리고 7년 전에는 대체 왜 나한테 말을 건 거야?

‘차라리 저 여인이 대마법사라는 사실을 몰랐으면 훨씬 좋았을 것을…….’

혼란스러운 덱스터는 괜스레 이리아를 원망하며 막사를 나섰다. 7년 전, 루퀼렘 성안에서 먼저 친한 척을 했던 그녀가 전쟁터에서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사실까지도 짜증스럽기 시작했다.

덱스터는 조금 거칠어진 발걸음으로 성큼성큼 제 막사로 돌아왔다.

그러나 막사의 천을 걷기 무섭게, 그는 다시금 밖으로 튀어나오고 말았다.

이리아 아델리어의 체향이 온 사방에 그득했다. 뒤늦게 깨달은 거지만, 침대보도 그녀의 눈물로 흠뻑 젖었을 게 분명했다.

‘젠장, 이리아 아델리어…….’

마음만 같아서는 당장 잠든 이리아를 깨워 그와 함께 밤을 새우게 만들고 싶었다. 자신은 며칠간이나 잠을 못 자게 만들어 두고서는, 혼자서만 까무룩 기절해 버린 이리아가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이미 잠들어 버린 이리아를 깨울 수는 없는 노릇일뿐더러, 덱스터는 그녀의 막사에 다시 들어갈 수조차 없었다.

그렇게 덱스터의 막사 안에 그득히 찬 이리아의 체향이 온전히 사라졌을 무렵, 하늘은 이미 주홍빛으로 밝아진 후였다.

끝내 밖에서 꼬박 밤을 새우고 만 덱스터는 이제 다시는 이리아 아델리어에게 관심도, 눈길도 주지 않겠다고 또 한 번 굳게 결심해야 했다.

***

사실 이리아가 퉁퉁 부은 얼굴로 군인들의 놀림을 받을 때, 덱스터는 거대한 몸뚱이를 겨우 가누고 있었다. 그는 피곤해 죽을 것만 같다는 말을 27년 만에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콘라드가 어김없이 담배에 불을 붙이며, 팔꿈치로 덱스터의 어깨를 쳤다.

“야, 우리 옆으로 간호사들 지나간다.”

“알아.”

“나 입에 담배 물고 있는데.”

“……그래서 어쩌라고?”

뭐지, 이 새끼……? 간호사들이 주변에 있을 때는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한 게 어젯밤인데, 설마 그걸 잊어버린 건가?

담배에 불을 붙이다 만 콘라드가 미친놈을 보는 눈으로 덱스터를 바라보았다. 괜히 입 안이 밍밍해진 그는 라이터를 다시 주머니 안으로 푹 쑤셔 넣었다.

덱스터는 그에게 인사를 하며 지나가는 간호사들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했다. 하지만 얼굴을 봤건 말건 상관없이, 그는 간호사들 사이에 이리아 아델리어가 없다는 사실을 금세 알아냈다.

그녀의 체향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 싱그럽고도 지독한 과일 향이 없었다.

덱스터는 피곤함에 찌들어 푹 들어간 눈가를 거칠게 문지르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지않아 그의 등 뒤에서 콘라드의 외침이 들려왔다.

“아이쿠, 우리 건망증 환자는 또 어디를 가시는 건지?”

“세수하러 간다.”

“야, 씻는 법도 까먹은 거 아니냐? 내가 씻겨 줘?”

콘라드 특유의 호탕한 웃음소리는 이후 한참 이어졌다.

저 인생이 편한 놈. 대꾸하기조차 귀찮아진 덱스터는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계곡으로 향했다. 혹시 저번처럼 이리아 아델리어가 제 조랑말과 함께 있을까 뒤늦게 걱정했지만, 괜한 생각이었다.

계곡은 인기척 하나 없이 완벽하게 고요했다. 아주 잠깐, 아쉬울 정도로.

몸 상태가 최악인 날에 조사를 쉬어 다행이었다. 덱스터는 잠시라도 눈을 붙여야겠다고 생각하며 차가운 물로 얼굴을 씻어 내렸다.

이렇게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이리아를 본다면 그녀는 기억도 못 하는 과거를 언급하며 말실수를 할 것만 같았다. 그렇기에 덱스터는 일부러 이리아 아델리어를 찾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이리아가 먼저 그에게 다가왔다.

덱스터가 앞머리에 방울진 물방울들을 털어 내고 있을 때, 갑자기 푹신하고 가벼운 무언가가 다가와 그와 콩 부딪혔다.

고개를 숙인 덱스터의 시야에 가장 처음으로 들어온 건 새하얀 이불이었다.

“아, 진짜 짜증 나! 목 없어요?! 아래도 좀 살피라니까!”

이불 안쪽에서부터 터져 나온 이리아 아델리어의 새된 고함이 온 부대를 쩌렁쩌렁 울렸다.

그 작은 몸에서 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엄청난 목청이었다.

잠이 확 깨 버린 덱스터는 이불 뒤에서 이리아의 얼굴이 튀어나올 때까지 단단히 굳어 있었다.

이리아의 낯빛은 무척이나 천천히 변했다. 그녀는 맨 처음에는 분을 못 참아 씩씩대다가, 덱스터와 시선을 마주치기 무섭게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히끅. 희미한 딸꾹질 소리가 바람결을 타고 귓등으로 파고들었다. 이리아도 더 당황했으면 당황했지, 덱스터 그 자신보다 덜 당황하지는 않은 거다.

콘라드 메이필드와 달리, 덱스터는 이런 상황을 유연하게 넘어갈 재치 따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이리아의 보드라운 눈가가 열이 올라 붉어질 때까지 제자리서 머리끝의 물기를 훔쳐 냈다.

“미안하군. 안 보였어.”

“아…… 아녜요…….”

개미보다도 작은 목소리의 끝은 서슴없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덱스터는 거칠게 딸꾹질을 하기 시작한 이리아를 빠른 걸음으로 스쳐 지나갔다. 군인들의 수군거림이 들려왔지만, 부대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간호사를 겨우 이런 소동으로 혼내지는 않을 터다.

덱스터의 입술 끝이 삐딱하게 올라섰다. 그의 잇새선 뒤늦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내 머리카락을 거칠게 헝클고, 루 아휜에게 소리를 질렀던 그 성격이 어디로 가지는 않았구나.

기운 없이 엉엉 울던 모습보단 차라리 저렇게 분통을 터뜨리는 모습이 나았다. 덱스터는 어느덧 전보다 한껏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무기고를 찾아갔다.

어젯밤 오랜만에 꺼낸 리볼버에 총탄이 덜 들어가 있었다. 그에게는 두 발만 있어도 충분했지만,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여덟 발을 전부 채워 두는 게 마음이 편했다.

검의 날을 갈고 있던 군인들은 덱스터의 인기척을 느끼자마자 곧바로 자세를 바로 했다.

“하워드 공.”

“방해해서 미안하군. 난 상관 말고, 할 일들 해.”

언제나 그랬듯, 두서없이 쌓여 있는 무기들에선 마물의 피 냄새가 진동했다. 눈살이 절로 찡그려질 만큼 지독한 냄새였다.

덱스터는 곧장 탄환을 찾아 리볼버의 총구에 쑤셔 넣었다.

그가 한창 방아쇠를 손보고 있을 때, 피비린내를 뚫고 익숙한 소독약 냄새가 풍겨 왔다.

무기고에 잘 들어오지 않는 간호사들은 종종 찾는 무기가 어디 있는지 헤매곤 했다. 그러나 줄리에타 엘로이스는 달랐다. 그녀는 허둥거리지도 않고 단숨에 원하는 볼트액션 소총을 찾아냈다.

줄리에타와는 아니지만, 덱스터는 그녀의 아버지와 꽤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한때 루퀼렘 국경선에서 근무했던 그는 국방 경비대 사령관인 줄리에타의 아버지를 상관으로 모셨던 경험이 있었다.

루퀼렘어도 국경선에서 근무했을 시절에 어깨너머로 배웠다. 덱스터는 새삼 옛 기억들을 떠올리며 소총 탄환들을 찾아 줄리에타에게 건넸다.

“소총보다는 리볼버를 들고 다니기가 훨씬 간편할 텐데.”

“아…… 이건 제가 가지고 다닐 게 아닙니다.”

뒤늦게 그를 알아챈 줄리에타가 허리를 숙여 보이며 대답했다. 그녀는 텅 빈 소총 안쪽에 덱스터가 건넨 총탄들을 집어넣으며 덧붙였다.

“씨시 힐데어라는 한 간호사가 총 쏘는 법을 몰라서, 이참에 알려 주려고 합니다.”

“뭐어-? 씨시가 총 쏘는 법을 모른다고!?”

갑자기 어디선가 귀에 익은 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콘라드 메이필드의 수려한 얼굴이 보이자마자 총을 든 남녀의 미간은 동시에 구겨졌다. 그러나 그들이 인상을 찌푸리든 말든, 콘라드는 어깨를 으쓱이며 싱글벙글 웃기만 했다.

그는 얼마 전 마물을 상대하며 부러진 칼날을 교체하러 온 듯했다. 콘라드가 단검의 검집을 분리하며 말했다.

“총을 쏘는 법을 모른다니. 우리 장군님은 참 알면 알수록 루퀼렘인 같단 말이야.”

“다른 이들이 들으면 오해할 만한 소리 마라, 콘라드.”

“아냐. 자세히 보면 외모도 약간 루퀼렘인이랑 닮았다니까?”

“가족 중에 그쪽 계통이 있을 수도 있어.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도 이민족의 것이잖아.”

“씨시는 몸집도 되게 작아. 아무리 여자라 해도 비센티움 인종이 섞였으면서, 그만큼 몸이 조그마할 수가 있나?”

“선천적으로 마른 체형인가 보지. 작다고 다 루퀼렘인은 아니잖아.”

“……덱스터 하워드. 너 쓸데없이 씨시를 잘 변호해 준다?”

역시, 이 새끼도 예쁜 여자한테는 약한 거야. 콘라드가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덱스터는 눈초리 끝으로 줄리에타가 들고 있는 볼트액션 소총을 살폈다. 못 들 정도는 아니지만, 이리아 아델리어가 들기에는 조금 무거울 것 같기도 하다.

‘역시나 총은 못 쏘는구나, 이리아 아델리어.’

루퀼렘의 군주인 이리아 아델리어가 총을 쏘지 못한다는 사실은 태양은 동쪽에서 뜬다는 상식만큼이나 당연했다. 그녀는 아마 태어나서 총칼을 잡아 본 적조차도 없을 터다.

덱스터는 내심 이리아에게 사격술을 가르치겠다는 줄리에타의 생각이 기특했다. 지난 며칠 동안 의도치 않게 이리아 아델리어를 관찰한 결과, 그녀는 어떠한 사정으로 마법을 쓰지 못하는 듯했다.

마법을 쓸 수 있다면 쓸데없이 사격 따위 배우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마법을 쓸 수 없다면, 제 몸을 지키기 위해서 사격 정도는 알고 있는 게 이리아 아델리어에게도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아버지와 어머니 둘 모두가 군대와 인연이 있는 만큼, 줄리에타는 사격술에 해박했다. 그녀는 총을 처음 잡아 보는 이리아에게 딱 맞는 선생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가르치는 역할은 다른 이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줄리에타!”

한 간호사가 급하게 달려와 줄리에타를 불렀다. 환자의 상처가 터진 모양이었다.

사격술은 다음에 가르쳐 주어야겠구나. 갑자기 바빠진 줄리에타가 한숨을 쉬며 소총을 내려 두는 순간, 콘라드가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 총 이리 줘. 씨시에게는 한가한 내가 친절하게 하나하나 가르쳐 줄게.”

“당신에게는 못 넘깁니다, 콘라드 메이필드. 순진한 애를 꾀어서 이번에는 또 무슨 짓을 하려고…….”

“미안하지만 씨시는 내 취향 아니야, 줄리에타. 순수하게 가르쳐만 줄 생각이라고. 그리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씨시보다는 너를 더 매력적으로 느끼……!”

퍽. 소총이 날아와 콘라드의 안면을 강타했다.

거대한 소총이 얼굴을 때렸는데 안 아플 리 없다. 콘라드는 곧바로 제 콧대를 붙잡고 끙끙거리기 시작했다.

소총을 던진 당사자, 줄리에타는 그런 그를 향해 혀를 내두르고선 유유히 떠나갔다.

그림자가 진 줄리에타의 등 뒤로, 그녀의 낮은 중얼거림이 울려 퍼졌다.

“천박해.”

줄리에타의 말을 들은 콘라드는 콧대를 부여잡고선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덱스터는 저런 모습이 매력적이라는 콘라드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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