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화 (52/109)

51화

“그, 그거 뭐예요?”

“뭐가? 담배?”

“아, 아뇨. 부…… 부단장님이 지금 손에 들고 있는 거 뭐예요?”

“……이거? 너 라이터 처음 봐?”

“라이터요……?”

“너, 엄청난 깡촌 출신이었구나, 씨시? 라이터를 처음 보다니!”

콘라드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사방을 메웠다. 이리아 아델리어는 넋이 빠진 얼굴을 하고선 콘라드가 쥔 라이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한참을 킥킥대던 콘라드는 이내 뭐라고 속삭이며 이리아의 손에 라이터를 쥐여 주었다. ‘군대’와 ‘주머니’라는 단어가 언뜻 들렸지만, 목소리가 너무 작아 내용을 완벽하게 파악하긴 불가능했다.

덱스터는 넋이 나간 이리아 아델리어로부터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그는 부대 한가운데로 터덜터덜 걸어가는 이리아의 뒤를 계속해서 눈으로 좇다가, 요한의 모습이 보이자마자 고개를 돌렸다.

이유 모를 짜증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랐다. 덱스터는 나지막이 욕설을 뇌까리고선, 담배 연기를 내뿜고 있는 콘라드의 어깨를 조금 세게 주먹으로 쳤다.

악! 콘라드가 새된 소리를 내지르며 그를 돌아보았다.

“미쳤냐? 때리려면 이유를 말하고 때려, 새끼야!”

“앞으로 간호사들이 주변에 있을 때 흡연은 자제하도록 해.”

“내가 어디서 언제 담배를 피우든 상관도 안 쓰던 놈이 갑자기 왜 이래?!”

“오늘부터 상관하기로 했어.”

덱스터는 ‘쓸데없이 변덕스러운 새끼’라며 고래고래 고함을 내뱉기 시작한 콘라드를 가볍게 지나쳤다. 등 뒤에서 들리는 그의 고함은 아주 긴 시간 끝나지 않았다.

막사로 돌아가는 내내, 덱스터는 이리아 아델리어에게 눈길을 주지 않으려 무던히 노력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노력이 무색하게, 어느덧 온몸의 감각은 그녀를 향해 예민하게 곤두서 있었다.

저 멀리서 이리아 아델리어와 함께 요한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덱스터는 더욱 짜증스러워졌다. 그는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한 가슴 안쪽의 불길을 며칠 새 쌓인 피로 때문이라고 치부하며, 신경질적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막사에 들어간 덱스터는 다친 팔의 통증도 무시하고선 옷을 벗어 던지기 시작했다.

원체 깔끔한 성격을 가진 그는 장갑 한 짝까지도 제자리에 둬야 마음이 편했지만, 이 순간만은 아니었다.

옷을 정리하는 것마저도 귀찮다. 덱스터는 새하얀 포엣 셔츠와 바지를 대충 껴입은 후, 입 안에 박하 잎을 마구 욱여넣었다.

간이침대 위에 털썩 몸을 뉜 그는 시야가 완전히 어두컴컴해지도록 팔로 눈가를 가렸다.

눈앞이 어두워지기 무섭게, 텅 비었던 머릿속은 하나둘씩 이리아 아델리어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이는 덱스터의 의지가 아니었다.

그의 머리는 틈만 나면, 제멋대로 이리아의 아름다운 외모를 떠올려 냈다.

‘이리아 아델리어…….’

조금 전, 콘라드의 라이터를 향해 멍한 표정을 짓던 이리아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아무리 한숨을 쉬고 몸을 뒤척여 보아도, 이리아 아델리어는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최근 며칠 동안은 이리아 아델리어의 처분 때문에 제대로 된 숙면을 하지 못했었다. 이제 그녀의 처분도 정해졌으니 마땅히 잠을 자야 하는데, 이번에는 그 미치도록 예쁘장한 얼굴이 방해한다.

덱스터는 아주 긴 시간을 뒤척이다가 끝내 몸을 일으키고 말았다.

그가 까치집이 진 머리를 더욱 헝클어뜨리며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아마 밤 산책을 하면 이보다는 쉽게 잠들 수 있으리라.

덱스터는 부대도 둘러볼 겸, 잠시 걷기 위해 터덜터덜 막사를 나섰다.

봄에 다다랐지만, 밤바람은 여전히 차가웠다. 덱스터는 그에게 허리를 숙여 보이는 병사들의 인사를 대충 받아 주고선, 사냥개들의 울음소리를 따라 밤하늘 아래를 거닐었다.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던 그의 두 발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제자리에 우뚝 멈추었다.

검은 눈썹이 자리한 미간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얼굴을 스쳐 가는 산들바람 사이에, 익숙한 체향이 스며들어 있었다.

‘……이리아 아델리어……?’

덱스터는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있는 이리아 아델리어의 얼굴을 보자마자 숨을 쉬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일렁이는 라이터의 불빛 속 그녀는, 명화 속에서나 보던 천사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젠장. 오늘이 이리아 아델리어가 보초 근무를 서던 날이었던가. 최근 그녀 때문에 정신이 없다 보니, 간호사들의 야간 보초 일정도 새까맣게 까먹고 있었다.

잠을 자기 위해 산책을 나왔는데, 도리어 꼬박 밤을 새우게 생겼다.

덱스터는 어느덧 바싹 마르기 시작한 입 안을 느끼며 이리아를 바라보았다.

이리아 아델리어의 녹빛 눈동자는 라이터의 빛을 받아 탁한 노란색을 띠고 있었다. 원래 눈동자 색에 비할 바는 못 되었지만, 탁한 노란빛도 그녀의 얼굴 위에서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이리아의 눈 속을 넋을 잃은 채로 들여다보던 덱스터는 뒤늦게 그녀의 눈꺼풀 아래에 그렁그렁 맺혀 있는 물방울을 알아챘다.

‘부대 근무가 많이 힘겨운 건가…….’

덱스터도 전쟁터에 처음 온 간호사들이 종종 눈물로 밤을 지새운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리아의 머릿속을 알 리 없는 그는, 이리아 또한 다른 간호사들처럼 일이 버거워 울먹거리고 있다고 오해했다.

덱스터는 콘라드 메이필드처럼 살가운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그는 아주 오랜 시간 전쟁터에서 나돌았지만, 지금껏 단 한 번도 울먹이는 간호사를 달래 준 적이 없었다.

이리아 아델리어도 덱스터에게는 이제 일개 간호사였다. 그녀가 울먹이든 말든, 덱스터는 그대로 등을 돌려 제 갈 길을 가야 옳았다.

그러나 왜인지, 곧 떨어지고 하는 저 커다란 눈물방울들을 도저히 모른 체할 수가 없다.

그렇게 덱스터는 결국, 한숨을 삼키며 입을 열고 말았다.

“근무 제대로 안 서나?”

깜짝 놀란 이리아가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녀는 꽤 긴 시간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두 눈망울로 덱스터를 올려다보았다. 덱스터는 이리아가 라이터를 끌 때까지, 눈꺼풀도 껌뻑이지 않고선 그녀를 뚫어지게 마주 응시했다.

이내 어두워진 사방 속에서, 물기가 섞인 이리아의 소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 죄송합니다…….”

밤눈이 어두운 이리아와 달리, 덱스터는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리아는 조그마한 어깨를 잔뜩 웅크리고선, 열을 받은 라이터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 있었다.

덱스터는 훌쩍이는 이리아의 모습을 잠시 더 바라보다가, 조용히 제 막사로 돌아갔다. 그는 막사로 돌아오면서도 뒤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몇 번이고 힘껏 억눌렀다.

숙면을 위해 나갔던 밤 산책이, 이리아 아델리어 때문에 도리어 엉망이 돼 버리고 말았다.

덱스터는 이미 까치집이 진 머리카락을 더더욱 세차게 헝클어뜨리고선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다시 떠오르기 시작한 이리아의 모습을 애써 무시하며 잠을 청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가깝게 다가오는 한 인기척을 느끼자마자, 덱스터는 재차 눈꺼풀을 들어 올려야 했다.

그의 손은 어느덧 베개 아래의 리볼버를 장전하고 있었다.

‘……또 시작인가.’

진심으로 피곤해 미치겠군. 덱스터가 좌우로 고개를 천천히 내저었다.

많지는 않았으나, 간혹 군대에까지 무리해서 암살자를 보내는 귀족들이 몇 있었다. 그들을 대부분 권력층에서 밀려난 이들이었는데, 덱스터에게 암살자를 보냄으로써 카즈웰 4세에게 잘 보이려는 목적이었다.

누가 보낸 건지. 인기척도 숨기지 않고 당당하게 들어오는 꼴이 참 같잖다.

그러나 덱스터가 코웃음을 흘리며 총구를 조준하는 찰나. 암살자라고 생각했던 이가 갑자기 침대에 제 얼굴을 폭 박는 게 아닌가.

“흐…… 으, 흐윽…….”

여인의 흐느낌이 어둠 속에서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순간, 당황한 덱스터는 리볼버를 들어 올린 채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흐느끼는 여인이 이리아 아델리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리아는 참 서럽게도 울었다. 차라리 엉엉 소리높여 울면 더 나았을 것을,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도록 숨죽여 끅끅대는 모습이 너무나도 애잔했다.

덱스터는 감히 총구를 내릴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선, 엉성한 자세 그대로 이리아가 울음을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 그는 이리아 아델리어가 잘못된 막사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고 나가기를 바랬다.

그러나, 숨죽여 흐느끼던 이리아는 울음을 멈추자마자 물 먹은 인형처럼 축 처졌다.

또 한 번 당황한 덱스터가 소리가 나지 않도록 천천히 총구를 내렸다.

‘……설마 잠든 건가?’

이리아는 언제 울었냐는 듯 미동도 없었다.

덱스터가 살며시 그녀의 새빨간 머리카락을 잡아 흔들었다. 여전히, 미동은 없었다.

완전히 기절해 버린 그녀는 어깨를 톡톡 두드리는 손길에도 깨지 않았다.

울다가 이렇게 잠들어 버리다니, 여전히 참 특이하구나.

덱스터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리아를 조심스레 안아 들었다. 내일 아침에 피차 어색한 상황을 맞닥뜨리고 싶진 않을뿐더러, 부대에 이상한 소문이라도 돌면 그의 입장이 참 곤란했다.

이리아의 작은 몸뚱어리는 힘을 줄 필요도 없이 덜렁 들어 옮길 수 있었다.

덱스터가 가벼운 몸무게를 새삼 실감하고 있을 때, 그녀가 다시금 흐느끼기 시작했다.

[있잖아, 루……. 다 부질없었어. 지난 20년이 다…… 다 부질없었단 말이야. 나, 난 대체 뭘 했던 거야? 지난 20년 동안…… 난 뭘 한 거야?]

처음엔 잠에서 깬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저 꿈결에 내뱉은 말이었다.

덱스터는 이리아가 자신을 성기사단장 루 아휜으로 착각했다는 사실을 알았으나, 침묵을 유지했다.

이리아 아델리어가 왜 울고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일이 힘들기 때문은 아닌 게 확실했다.

이리아는 두 눈꺼풀을 꾹 감은 상태 그대로 애처롭게 훌쩍이다가,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덱스터가 한없이 작고 여린 그녀의 몸뚱어리를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혔다.

이리아의 막사는 그녀의 싱그러운 체향으로 그득했다. 덱스터는 이 세상에 박하보다 훨씬 더 지독한 향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실감하며, 둥근 볼 아래로 또르르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쳐 냈다.

자잘한 솜털이 느껴지는 이리아의 뺨은 옛날, 루퀼렘 성에서 만졌던 그녀의 발바닥보다도 뽀얗고 보드라웠다. 생채기 가득한 덱스터의 피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덱스터는 괜히 눈물과 머리카락을 핑계 삼아 이리아의 얼굴을 조금 더 어루만졌다. 터무니없이 자그마한 그녀의 얼굴이 두 손바닥에 닿을 때마다, 배 속에서 새가 날아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일이 힘들어 운 게 아니라면, 너는 왜 눈물을 흘린 걸까. 지난 20년 동안 뭘 했냐는 물음은 대체 어떤 의미인 거지, 이리아 아델리어?’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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