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사실, 덱스터도 첫날에는 이리아 아델리어를 마주치지 않으려 무진장 노력했다. 이리아 아델리어가 혹여 그를 알아차릴까 걱정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루퀼렘에서는 덱스터만이 일방적으로 이리아 아델리어의 얼굴을 보았었다. 이리아 아델리어는 덱스터의 얼굴을 모르고 있었고, 비센티움 사람들은 대부분이 검은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으니 외모로 그를 알아차릴 가능성은 적었지만, 문제는 목소리였다.
담배를 끊었다고 해서 목소리가 꾀꼬리의 울음소리처럼 변했을 리가 없다. 7년 전의 그때와 지금의 목소리는 똑같았다.
이리아 아델리어가 혹시라도 사람들 틈에서 자신을 ‘아저씨’라고 부르는 날에는 그의 입장이 몹시나 곤란해질 터였다.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새벽녘이었지만, 덱스터는 갑옷을 완벽하게 껴입은 채였다. 이리아 아델리어에 관한 고민으로 밤을 새워 버린 그는 간호사들이 기상할 아침 6시가 되자마자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퀸터.”
덱스터가 이름을 부르자, 검고 커다란 군마가 투레질하며 나타났다.
덱스터는 언제나처럼 퀸터의 안장과 고삐를 확인한 후에, 그를 계곡 옆으로 이끌었다. 말들은 조사를 나간 이후에는 맑은 물을 마실 수 없기에, 출발 전에 미리 목을 축여야 했다.
계곡 옆에는 두 손님이 먼저 와 있었다.
덱스터는 조그마한 조랑말, 그리고 그녀의 목덜미를 쓰다듬고 있는 빨간 머리의 아가씨를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가 발걸음을 돌리려고 하는 순간, 퀸터가 신경질적으로 고삐를 당기는 게 아닌가.
덱스터는 어쩔 수 없이 이리아 아델리어의 옆에 서고 말았다.
그가 다가서자마자, 이리아 아델리어는 인사를 위해 고개를 돌렸다.
7년 전, 루퀼렘 성안에서 이리아 아델리어를 만났을 때는 서로 얼굴조차 마주하지 않았었다. 루퀼렘을 떠나는 길에 축복을 받을 때도, 어제 7년 만에 그녀를 다시 만났을 때도 서로의 거리는 너무나도 멀었다.
그러니 덱스터가 이리아 아델리어의 얼굴을 제대로 본 것은 어쩌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는 이리아의 새빨간 속눈썹 한 올까지도 눈에 담았다. 그녀는 흉갑을 멘 가슴팍을 보고선 잠시 어리둥절해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렇게 이리아 아델리어의 녹빛 눈동자를 맞닥뜨리는 순간, 덱스터의 심장은 땅끝까지 쿵 떨어지고 말았다.
이리아가 고개를 다시 숙여 버리는 바람에 시선을 마주한 시간은 짧디짧았다. 하지만 그 짧은 찰나에 덱스터는 누군가에게 명치를 세게 처맞은 기분이었다.
설마 루퀼렘 사람들은 마법을 통해 미래도 내다볼 수 있는 건가. 바로 옆에 서 있는 이리아 아델리어의 얼굴은 루퀼렘 성 천장에 그려져 있던 ‘그’ 이리아 아델리어의 얼굴과 똑같았다.
미인을 보는 눈이 높은 콘라드가 호들갑을 떨었던 게 백번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이리아 아델리어의 처분을 아주 잠시 잊을 정도로, 지난 26년간 가졌던 외모 취향을 부정할 정도로 그녀는 매우 예뻤다.
7년 전과 비교하면 확실히 키가 자랐지만, 여전히 루퀼렘 사람답게 이리아 아델리어가 가진 몸의 모든 부분은 아담했다. 마법으로 꾸민 그녀의 살구색 피부는 고왔고, 빨간색 머리칼에서는 향긋한 머릿비누 내음이 풍겨 왔다.
고작 이틀 전의 밤까지만 해도 덱스터는 이리아 아델리어를 7년 전 만났던 그 꼬맹이의 모습으로 상상했었다. 하지만 방금, 그 상상들이 무참히 깨질 뻔했다.
아니야. 이리아 아델리어는 성인이 되었다고 해도, 이제 겨우 스물이 된 꼬맹이다.
루퀼렘의 군주를 두고 대체 무슨 미친 생각을 하는 건지, 덱스터는 손톱이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세게 쥐었다.
이리아는 틸다를 데리고 총총걸음으로 황급히 사라졌다. 퀸터와 함께 우두커니 남은 덱스터는 일부러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뒤늦게 이리아 아델리어의 처분을 떠올린 덱스터가 지끈거리는 이마를 붙잡았다. 토벌 조사를 나간 내내, 그는 도통 집중하지 못해 콘라드의 비웃음을 들어야만 했다.
덱스터는 최근 며칠 동안 이리아 때문에 제대로 잠을 잔 적도 없었고, 끼니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그러니 그가 전투 도중에 검을 놓쳐 어깨에 큰 부상을 당한 일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아, 피곤해라!”
콘라드가 조각난 흉갑을 벗어 던지는 덱스터의 옆에 일부러 소리를 내며 털썩 걸터앉았다.
그가 손목에 붕대를 감으며 낄낄 웃었다.
“와, 이 새끼 보게. 어깨에 지리는 흉터 하나 더 생기겠구만?”
“……짜증 나게 하지 좀 말지? 네 할 일만 하고 가라, 제발.”
“이거 원, 실력 좋은 분이 꿰매 주셔야겠네. 네 몸에 흉터 더 생기면 그것도 꼴불견이잖냐.”
“꼴불견이든 뭐든, 네가 상관할 바는 아닌 것 같은데, 콘라드.”
“이 양반이 무슨 개소리래? 씻을 때 내가 네 몸을 제일 많이 봐, 인마! 네가 내 예쁜 몸을 볼 때, 내가 너의 흉한 몸을 보는 건 조금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니?”
개소리도 정도껏 해야지. 덱스터가 콘라드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콘라드는 한 대 처맞기 전에 황급히 막사를 나갔다. 왼쪽 손목 아래로 차마 완벽하게 묶지 못한 붕대가 길게 늘어졌지만, 덱스터는 일부러 그를 다시 부르지 않았다.
어깨의 상처가 아프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고통보다도 며칠 동안 쌓인 피곤함이 훨씬 더 컸다.
덱스터는 누군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릴 때까지 제자리에 넋을 놓은 채 앉아 있었다.
핏물 위로 느껴지는 따스한 인간의 온기에 그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의 앞에 새빨간 머리카락을 하나로 올려 묶은 간호사가 서 있었다.
이리아 아델리어였다.
순간, 덱스터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이리아 아델리어를 보지 않기 위한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선은 계속해서 그녀의 얼굴로 향했다.
이유를 모르겠지만, 이리아 아델리어의 손은 덱스터도 확연히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크게 떨리고 있었다.
겨우 바늘에 실을 꿴 그녀가 덱스터의 새까만 눈동자를 소심하게 힐끔거리며 말했다.
“이…… 이, 이제 꿰맬게요.”
혹시 지병이라도 가지고 있는 걸까. 아니면, 이른 아침에 무슨 큰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덱스터는 마취제가 들지 않은 탓에 바늘이 쑤셔 넣어질 때마다 아픈 감각도 잊고선 떨리는 이리아의 손끝을 빤히 응시했다.
이리아 아델리어의 앞에서는 최대한 목소리를 드러내면 안 된다. 말을 하면 안 돼.
그러나 말을 하지 않으려던 노력은 너무나도 쉽게 깨져 버렸다. 보다 못한 덱스터가 결국 입을 열고 만 것이다.
“……수전증이 있나?”
“네?!”
화들짝 놀란 이리아 아델리어가 반사적으로 푹 수그리고 있던 턱을 들어 올렸다. 일순간, 덱스터의 온 시야에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들이찼다.
총칼이 나돌던 전쟁통에서도 멀쩡하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이리아 아델리어가 내뱉는 숨결까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거리가 너무나도 가까웠다.
그녀의 숨결 안쪽에서는 잘 여문 과일과 비슷한 향이 났다. 정체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제멋대로 침이 고일 정도의 달콤한 향인 건 분명했다.
이리아 아델리어는 눈꺼풀도 깜빡이지 않은 채로 덱스터를 응시했고, 이는 덱스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바로 앞의 이리아 아델리어로부터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7년 전의 그 꼬맹이와 외모는 똑같았지만, 얼굴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부분에서부터 성숙미가 흘러넘쳤다. 새빨간 속눈썹은 훨씬 길었고, 눈동자는 깊었으며, 코와 입술의 곡선은 더욱 고와졌다.
덱스터는 끝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7년 전의 그 꼬마는 이제 없다는 사실을.
이리아 아델리어는 뒤늦게 정신을 다잡았다. 그녀가 잠시 흐트러졌던 바늘을 곧게 쥐고선, 조그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아뇨. 없어요…….”
……못 알아봤구나.
자기도 모르게 아주 조금, 이리아 아델리어가 7년 전에 만났던 그를 기억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나 보다. 그녀가 목소리를 알아보지 못하자 덱스터는 안심하면서도 동시에 스스로가 너무나도 초라해졌다.
나 혼자서만 특별하게 생각했던 추억이었나 보다. 하긴, 이리아 아델리어는 루퀼렘 성에서 살며 더더욱 특별하고 큰일들이 많았을 테니 날 만난 건 기억할 가치조차도 없던 추억이었을 테지.
덱스터의 두 눈이 탁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이리아가 붕대를 세 번이나 감는 긴 시간 동안, 나름대로 결정을 내렸다.
우리의 추억은 7년 전의 루퀼렘 성 후원에서 끊겼으며, 앞으로 영원히 그 시절을 되돌아볼 일 따윈 없다. 그러니 이리아 아델리어가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만큼, 나도 지금부터는 이리아 아델리어를 기억하지 못하는 거다.
이리아 아델리어에 관한 처분이 끝났다. 덱스터는 이리아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었으니, 정체를 숨긴 그녀에 관해 고민할 필요 따위 없었다.
덱스터가 자리서 몸을 일으키기 무섭게 이리아는 뒤로 주춤 물러났다.
그가 이리아의 새빨간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이름이 뭐지?”
“씨…… 씨시. 씨시 힐데어예요.”
씨시 힐데어. 앞으로 이리아를 부를 때 ‘이리아 아델리어’라는 이름 대신으로 입에 올려야 하는 이름이었다.
“기억해 두지, 씨시 힐데어.”
이리아 아델리어는 성을 나와 스스로의 존재를 없애기로 다짐했다.
그렇다면 나 또한, 그런 그녀의 다짐을 기꺼이 존중해 주리라.
***
덱스터는 이후로 이리아 아델리어의 처분에 관해 고민하지 않았다. 그는 아무것도 모른 척하며 그녀를 군대에 남겨 두기로 했다.
하지만 모르는 척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분명 이리아 아델리어를 깡그리 잊었다고 결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덱스터의 시선은 제멋대로 그녀를 향했다.
설상가상으로, 콘라드가 이리아 아델리어에게 막대한 관심을 보였다. 하루 대부분을 함께하는 콘라드 메이필드가 이리아 아델리어에 관해 쫑알거릴 때마다, 덱스터는 그의 입에다 재갈을 콱 물려 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어? 신삥 씨시!”
아, 빌어먹을. 또 이런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시선은 어느덧 다가오는 이리아 아델리어에게 박혀 있었다. 그녀는 제 몸뚱이만 한 아밍 소드를 들고선 뒤뚱거리는 중이었다.
콘라드는 개념을 어디에다가 팔아먹었는지, 이리아 아델리어 앞에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저 여린 몸이 간접흡연을 하게 둘 수 없었던 덱스터가 한마디 하려는 순간, 이리아의 물음이 들려왔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