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10.
비센티움은 전쟁을 통해 왕국들을 강제로 통합해 버린 제국인 만큼, 국가 내 민족 간의 갈등이 잦았고 외부에 적도 많았다. 그렇기에 제국으로 승격한 지 200년도 더 지난 유서 깊은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러 싸움을 치르는 중이었다.
최근 비센티움은 북쪽에 있는 루퀼렘보다도 남쪽 경계면에 붙어 있는 작은 공국, 리우웰을 더 눈엣가시로 여겼다. 리우웰 공국은 비센티움의 속국이었지만, 군주가 바뀐 이후로 독립을 꾀해 계속해서 비센티움을 자극하고 있었다.
비센티움의 황제, 카즈웰 3세는 원래 리우웰 내부에 비센티움 군대를 주둔시켜 리우웰의 기세를 눌러둘 계획이었다. 하지만 군대의 출정 명령을 내리기 바로 일주일 전, 제국 동쪽에서 마물들이 침범해 마을 하나를 통째로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리는, 엄청난 사고가 일어나고 만다.
카즈웰 3세는 어쩔 수 없이 계획을 바꿔 무장시켰던 군대를 비센티움 동쪽 경계면으로 보낸다. 그리고 그 군대를 이끈 자는, 겨우 나이 스물다섯에 공작 지위와 함께 군단장의 지위를 받은 덱스터 하워드였다.
7년이란 시간은 길지만, 돌이켜 보면 짧다.
이리아 아델리어를 처음 만났을 때 스물이었던 덱스터는, 그로부터 어느덧 7년이 지나 스물일곱이 되어 있었다.
그는 귀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황실에 빼앗겼던 어머니의 저택을 엄청난 거금을 주고 다시 사들인 바람에 재정적 상황이 좋지 못했다. 휴식기 없이 계속해서 전쟁에 출두해야 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리우웰로 향하려던 덱스터는 목표지를 바꾼다는 카즈웰 3세의 일방적 통보를 받자마자, 험한 욕설을 뇌까렸다.
마물을 상대로 하는 전쟁과 사람을 상대로 하는 전쟁은 다르다. 사람과의 전쟁은 선전포고를 통해 침략 사실을 알린 후, 특정한 공간에서 참호전(塹壕戰)이나 공방전(攻防戰)을 펼치는 게 대부분이다.
하지만 마물에게는 선전포고를 할 수 없을뿐더러, 그들이 출현하는 장소와 시간도 모두 제각각이다. 그렇기에 마물을 상대로 할 때는, 특별하게 구상된 마물 대 토벌전(討伐戰)을 벌여야 한다.
마물을 상대로 하는 토벌전은 군부대를 중심에 두고, 군부대 주변에서 나타난 마물의 흔적을 조사해 처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조사하는 방법도 복잡하고, 마물의 수가 한둘이 아닌 탓에, 마물 대 토벌전은 보통 1년 이상이 걸린다.
덱스터는 십 대 초반부터 군대에 몸을 의탁했던 만큼 마물 대 토벌전을 꽤 많이 겪어 봤지만, 여전히 까다로워했다. 마물 대 토벌전을 겪을 바에는, 차라리 전면전으로 다른 왕국과 전쟁을 하는 게 나았다.
하지만 출정에 덱스터의 의견은 없었다. 그는 제국의 군단장이었고, 황제가 가라는 대로 가야 하는 그의 사냥개였다.
그렇게 덱스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비센티움 동쪽 경계면에서 마물을 사냥하게 되었다.
이날도 그는 어김없이 마물의 아가리 안쪽으로 검을 쑤셔 넣고 있었다. 검을 뽑기 무섭게, 마물 특유의 독하고 비릿한 피 냄새가 튀기며 코를 찔러 왔다.
하지만 마물의 피 냄새보다도 더 신경 쓰이는 건, 바로 옆에서 풍겨오는 담배 냄새였다.
“……작작 피우지 그래?”
“작작이라니! 이게 오늘 처음으로 피우는 거다, 이 양반아!”
콘라드는 덱스터의 매서운 눈빛을 깔끔히 무시하고선 이어 한 모금을 더 빨아들였다. 덱스터는 긴 한숨을 내쉬었지만, 다시 핀잔을 주지는 않았다.
그의 손은 어느덧 무의식적으로 옷 안주머니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 속에는 이젠 피우지도 않는 장초 한 대와 라이터가 나란히 자리했다.
7년 전, 루퀼렘 성에서 이리아 아델리어를 만난 이후로, 덱스터는 금연을 시작했다. 물론, 열다섯 때부터 피워 왔던 담배이기에 금연이 쉽지는 않았다. 그는 여러 선임의 조언을 토대로 금연을 쉽게 할 방법들을 수없이 시도했으나, 모두 특별한 효과는 없었었다.
결국, 덱스터는 담배보다 더 자극적인 것들을 찾아 입에 물기 시작했다. 그건 처음에는 당도 높은 초콜릿이었다가 나중에는 커피 원두가 되고, 마지막에는 박하잎이 되었다.
덱스터는 이제 담배 대신 박하에 중독되어 버렸지만, 아무렴 담배보다는 박하가 더 낫다는 생각이었다.
이리아 아델리어 때문에 금연을 했다고 묻는다면, 정확한 답을 줄 수는 없었다. 덱스터 또한 그가 왜 예정에도 없던 금연을 하게 되었는지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언젠가 이리아 아델리어를 다시 만난다면, 이제 담배 따윈 피우지 않는다고 당당하게 자랑 한 번쯤 해 보고는 싶었다.
‘물론, 다시 만난 일 따위는 없겠지만…….’
덱스터는 남몰래 희미한 조소를 흘렸다. 그가 7년 전에 이리아 아델리어를 만난 건, 순전히 엄청난 우연이었다.
루퀼렘의 군주인 이리아 아델리어는 앞으로도 그 아름다운 성안에서 대접을 받으며 살 테고, 비센티움의 군단장인 덱스터는 앞으로도 계속 군대를 전전하며 외로운 삶을 살 터였다. 그녀와 그는 완전히 다른 세상의 두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덱스터는 7년 전, 그 하얬던 루퀼렘 꼬맹이와의 대화를 특별한 추억으로 간직하기로 했다.
우연이 불러온, 그저 조금 특별한 추억 정도로.
덱스터가 혹시 아직 숨이 붙어 있는 놈이 있나 마물 사체들을 둘러보는 동안, 콘라드는 다 태운 담배꽁초를 사체 위로 튕겼다. 그가 남은 연기를 내뿜으며 다른 군인에게 물었다.
“오늘따라 수가 조금 많네? 새끼들이 단체로 회식이라도 했나 보다, 야.”
“아마 날이 좋지 않아서 더 많이 나타난 것 같습니다. 특이하게, 먹구름이 낀 날은 놈들의 수가 더 많더군요.”
“그래……?”
콘라드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침부터 껴 있던 먹구름이 여전히 그대로였다.
비도 쏟아 내지 않고 온종일 제 형상을 유지하는 먹구름은, 콘라드의 눈에 무척이나 소름 끼쳤다. 그가 장난스레 어깨를 부르르 떨며 중얼거리듯 이야기했다.
“이렇게 먹구름만 끼고 비가 내리지 않는 건, 어떤 특별한 일이 일어날 징조라던데……. 아, 참고로 나한테 ‘다 개소리야’라고 하지 마라, 덱스터 하워드. 우리 엄마가 말해 준 거니까.”
애초에 그런 말 할 생각도 없었다. 덱스터는 그를 가리키고 있는 콘라드의 손가락을 신경질적으로 쳐냈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건이 벌어지는 군대에서는 특별한 일조차도 반갑지 않다.
덱스터는 부디 콘라드의 말이 사실이 아니고, 하루가 평범하게 흘러가기를 고대하며 일행들에게 손짓했다. 이만 돌아가자는 뜻이었다.
덱스터는 부대로 돌아가자마자 새로운 소식 하나를 들었다.
“알폰소의 간호사들이 오전에 도착했습니다, 단장님.”
공문을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일 처리가 빠른 부분이 참 마음에 들었다. 그는 채 벗지 않은 왼쪽 손의 건틀렛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그렇군. 총 몇 명이 온다고 했었지?”
“다섯입니다.”
“다섯…….”
덱스터가 그를 향해 서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피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덱스터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예로부터 첩자가 많던 군부대에서 선임의 시선을 피하는 건, 무언가 오해할 만한 사항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단 한 명.
단 한 명만이, 그의 시선이 닿기도 전에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었다.
저건 대체 뭐 하는 짓인가. 들고 있던 건틀렛을 던지는 덱스터의 행동에서부터 조금의 짜증이 묻어 나왔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빨간 머리의 간호사가 자신을 제대로 바라볼 때까지 그녀를 계속해서 응시했다.
하지만 이윽고 간호사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 덱스터의 심장은 땅끝까지 뚝 떨어지고 말았다.
‘……이리아 아델리어……?’
너무 충격을 받았기 때문일까, 원체 표정 하나 없던 그의 얼굴은 일그러지기조차 하지 않았다.
그 예쁘장한 얼굴을 잊었을 리가 없다. 나이가 들며 성숙해진 데다가 머리카락 색과 눈 색은 달랐지만, 요한 엘로이스의 옆에 붙어 있는 간호사는 분명 이리아 아델리어였다.
대체 왜, 대체 왜 이리아 아델리어가 이곳에 있는 건가.
덱스터의 머릿속이 순간 새하얘졌다. 이곳은 비록 인간이 아닌 마물을 상대하나 비센티움의 전쟁터였고, 이리아 아델리어는 루퀼렘의 군주였다. 그녀는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설마…….’
설마 7년 전에 내가 말했던 대로 스무 살이 되자마자 가출을 한 건가?
아니라고 믿고 싶었지만, 왜인지 그의 말 때문에 이리아 아델리어가 성을 나와 버렸다는 짐작을 거둘 수가 없었다.
그건 스무 살 시절의 그가 특별한 뜻 없이 내뱉은 문장이었다. 정말로 덱스터의 말을 듣고 이리아 아델리어가 마음에도 없던 가출은 결심한 거면, 그는 대체 어떤 짓을 저지른 건가.
한때 새하얘졌던 머릿속은, 이제 미친 듯이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이리아는 보지 못했지만, 사실 덱스터는 그녀에게서 눈을 돌리는 순간 두 손으로 제 이마를 짚고 말았다.
군인들과 회의를 하는 내내, 덱스터는 한순간도 집중하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은 오로지 이리아 아델리어에 관한 생각뿐이었다.
어렸을 적 루 아휜에게 소리쳤던 내용을 보면, 자유를 찾아 완전히 성을 나와 버린 듯하긴 하다. 겨우 열세 살의 나이에 울면서 자유를 외쳤던 이리아 아델리어가 제 발로 성으로 돌아갈 일 따윈 없다. 성을 나오며 루퀼렘의 군주 자리도 내버렸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이리아 아델리어를 이곳에 계속 둬도 되는 걸까? 머리카락 색도 바꾼 걸 보면, 완전히 비센티움에 정착할 생각인 거 같던데, 계속 간호사 일을 할 셈인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그의 머릿속에 나열되는 모든 문장은 의문문이었지만, 답이 도출된 질문은 단 하나도 없었다.
덱스터가 계속해서 넋을 놓는 바람에, 회의는 밤늦게까지 진행되었다. 나무에 기대 담배를 태우고 있던 콘라드는 피곤이 덕지덕지 묻은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쯔쯔 혀를 찼다.
“잠깐 사이에 몰골이 더 대단해지셨구만?”
“피곤하게 하지 말고 각자 가던 길 가지, 콘라드.”
“야, 네놈이 회의에 들어가자마자 군인들 난리 났었어. 넌 모르지?”
“난리가 났었다고……? 무슨 이유로?”
덱스터가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콘라드를 돌아보았다.
그는 어떤 심각한 사건이 군인들 사이서 일어난 줄 알았건만, 돌아온 대답은 하찮기만 했다.
“새로 온 간호사 중에 빨간 머리 신삥이 한 명 있는데, 엄청나게 예쁘거든.”
덱스터가 긴 한숨을 쉬며 등을 돌렸다. 그러잖아도 골치가 아픈데, 이리아 아델리어의 이야기는 별로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그의 반응을 오해한 콘라드가 성큼 따라붙으며 소리쳤다.
“진짜로 예쁘다니까? 네 상상 이상이야!”
“관심 없어.”
덱스터가 어깨에 올라온 콘라드의 손을 조금 거칠게 뿌리쳤다. 콘라드는 입맛을 다시며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또다시 냅다 소리쳤다.
“나중에 갑자기 좋아한다고 하기만 해 봐! 그땐 절대로 네놈 안 도와줘!”
하. 덱스터는 자기도 모르게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게, 이리아 아델리어를 좋아할 리가 없었다.
덱스터의 생각 속 이리아 아델리어는, 비록 스무 살이 되었다 하여도 7년 전에 만났던 그 꼬맹이의 모습에 더 가까웠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그는 꼬맹이의 모습으로 이리아 아델리어를 상상했는데, 그런 그녀가 갑자기 여자로 느껴질 리 없었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