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화 (49/109)

48화

한참 덱스터의 키를 어림잡던 아이가 아직 물기가 다 빠지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저씨, 나 아저씨한테 부탁이 하나 있는데. 들어줄 거야?]

[아니.]

[치……. 그럼 부탁이 뭔지 들어만 주면 안 돼?]

덱스터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는 아무렴 상관없다는 듯, 제멋대로 입을 나불거렸다.

[저기 호수에서 동쪽으로 오백 걸음 정도 가면, 내가 열심히 키운 사과나무가 있거든? 거기 사과 하나만 따다 주라. 나는 손이 안 닿아서 못 땄어.]

덱스터는 이번에도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루퀼렘 꼬마의 부탁 따위 들어주면 뭐가 좋나. 그는 아이의 부탁을 들어줄 의무도, 생각도 없었다.

조그마했던 사과나무가 어떻게 멀대 만큼 자랐는지, 아이는 이후 며칠 동안 자신의 ‘사과나무 일대기’를 줄줄이 늘여놓았다.

그리고 항상, 덱스터는 아이의 재미없는 이야기를 들어준 후에야 비로소 자리를 뜰 수 있었다.

‘피곤해…….’

평소대로 여신과 이리아 아델리어가 서로에게 손을 뻗고 있는 복도 천장 그림을 구경한 그는 침실로 돌아가 빈 담뱃갑부터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 신발도 벗지 않은 채로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할 일 없는 덱스터가 한창 이불의 무늬를 따라 그릴 때, 문이 열리며 호크 로슨이 들어왔다.

“일 끝났어. 내일 오후에 루퀼렘을 뜰 거다.”

덱스터는 곧장 자세를 바로 했다. 호크 로슨은 아무런 흥미도 없어 보이는 덱스터 앞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이의 수다는 유치해서 가끔 웃을 수나 있었지, 호크 로슨의 이야기는 자기 자랑과 허영의 반복이었다. 그는 이번에도 자신이 어떻게 루퀼렘 여왕의 마음을 돌릴 수 있었는가에 대해 말도 안 되는 과장을 섞어 떠벌렸다.

비센티움 사자들은 루퀼렘 대운하에서 실종된 다섯 명의 비센티움 선원들의 사후 처리를 위해 루퀼렘에 방문한 참이었다. 비센티움 황실은 에스메릴다 혼 루미에르 여왕에게 유족에게 줄 위로금과 운하 수사권을 요구했는데, 전자는 받아들여졌으나 후자가 문제였다.

에스메릴다 혼 루미에르 여왕은 두 가지 이유를 들어 운하 수사권 부여를 완강히 거부했다. 첫 번째 이유는 실종된 비센티움 선원들이 루퀼렘의 허락 없이 운하를 밀항하다 실종되었다는 점이었고, 두 번째 이유는 수사를 하기 위해서는 운하의 문을 닫아야 하는데, 운하의 문을 닫는 순간부터 배가 다니지 못해 루퀼렘의 경제적 손실이 크다는 점이었다.

에스메릴다 혼 루미에르 여왕의 마음을 돌리기까지는 족히 6일하고도 반나절이 걸렸다. 비센티움은 ‘비센티움 내 루퀼렘인 차별 금지 법안’ 발의와 더불어 두 국가의 정상회의를 약속한 이후에야 마침내 운하 수사권을 받아낼 수 있었다.

수사권을 받아냈으니 사자들의 목적은 달성했다. 비센티움인들은 더 이상 루퀼렘 성에 머무를 이유가 없었기에, 서둘러 제 나라로 돌아갈 채비를 해야 했다.

덱스터는 줄줄이 이어지는 호크 로슨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의 머릿속엔 오로지 난간 안쪽, 그 루퀼렘 아이에 관한 생각뿐이었다.

내일 오후에 루퀼렘을 뜬다면, 내일이 마지막 만남이겠구나.

아이와는 지금껏 딱 여섯 번을 만났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아이와의 헤어짐이 아주 조금 아쉬워지는 건, 아마 그가 오랜 시간 순수한 대화를 잃은 채로 군대를 전전했기 때문이리라.

***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덱스터는 일주일 동안 익숙해진 루퀼렘 성 뒤편으로 향했다. 평소보다도 더 이른 새벽이었기에 예상대로 아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덱스터는 습관대로 바지춤을 매만졌다가, 주머니가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아, 담배…….’

빈 담뱃갑은 어제 쓰레기통에 버려 버렸다. 그럼 새 담배를 챙겨야 하거늘,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어떻게 가장 중요한 담배를 잊을 수가 있지. 덱스터는 실소를 터뜨리며 자리를 뜨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사과를 따 달라는 아이의 부탁이 생각났다.

그래, 사과 하나 따주는 것 정도야 식은 죽 먹기였다. 덱스터의 키는 한참 전에 6척(*약 180cm)을 훨씬 넘겼고, 저 멀리 언뜻 보이는 사과나무는 묘목으로 착각할 수 있을 만큼 작았다.

덱스터는 제자리서 한참 머리카락을 헤집다가, 나직이 욕설을 중얼거리며 발걸음을 뗐다.

아이의 부탁을 들어주러 가는 그 자신이 참 낯설고 창피하게 느껴졌다.

그는 가장 싱그러워 보이는 사과 하나를 따 외투 주머니에 숨겼다. 다시 난간 아래로 돌아갔을 때, 위쪽에서 귀여운 소란이 들려왔다. 아이가 투정을 부리며 잠에서 깨는 소리였다.

아이는 난간 아래의 새까만 그림자를 발견하자마자 해맑은 아침 인사를 건네왔다. 덱스터는 아이가 언제나 그랬듯이 긴 수다를 늘어놓을 거라 예상했지만, 그건 그만의 큰 착각이었다.

아이가 건넨 말은 아침 인사뿐이었다. 그녀는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하기도 전에 ‘준비’를 해야 한다며, 덱스터는 알지 못하는 루퀼렘인들에게 질질 끌려갔다.

덱스터는 아이에게 작별 인사도 제대로 전하지 못했다. 그는 아주 긴 시간 텅 빈 위층을 응시하다가, 주머니에서 사과를 꺼내 난간 사이에 올려 두었다.

‘발견하면 먹든지, 버리든지 알아서 하겠지.’

마지막으로 성을 힐끗 올려다본 후에, 등을 완전히 돌려 버렸다.

오후에 루퀼렘을 떠야 하는 비센티움인들은 바빴다. 덱스터 또한 지난 며칠 새 침실에 이리저리 던져 놓은 짐들을 정리해야 했다. 겨우 짐 정리에 몇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테지만, 호크 로슨을 포함한 비센티움 꼰대들의 심부름이 남은 여유 시간들을 잡아먹을 게 뻔했다.

자작이라는 직위도 다른 귀족들 사이선 ‘부모 잃은 군인 남자애’라는 명성에 먹혀 버리고 만다. 황실의 핏줄로 태어났으나 황태자에게 찍힌 몸은 귀족들의 이유 없는 비난을 듣는다.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가기 바로 전, 덱스터를 포함한 비센티움 사자들은 마지막 인사를 위해 루퀼렘 성 대합실에 섰다.

예상했던 대로, 오전 내내 콧대 높은 꼰대 나리들의 잔심부름을 했던 덱스터는 시곗바늘이 12를 지나기 전부터 지쳐 버렸다. 이름도 다 외우지 못한 루퀼렘 대신들의 인사가 이어지는 동안, 그는 화가 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써야 했다.

루퀼렘인들은 하나같이 동화에 나오는 난쟁이들처럼 키가 작았다. 하지만 그런 루퀼렘인들 중에서도 유독 키가 큰 자가 한 명 있었으니, 바로 성기사단장 루 아휜이었다.

성기사단장이라는 이름 아래 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 루 아휜은 내내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마지막 날에야 나타났다.

그는 기나긴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대합실로 들어와 딱 한 문장만을 전했다.

“잠시 기다리시죠. 아델리어 님께서 비센티움에 축복을 주기 위해 오고 계십니다.”

덱스터를 포함한 비센티움인들은 루 아휜의 말이 끝나자마자 깜짝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그들이 놀란 첫 번째 이유는 바로 루 아휜이 비센티움어를 해서였고, 두 번째 이유는 대마법사 이리아 아델리어가 오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호크 로슨이 반들반들한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낮게 중얼거렸다.

“이리아 아델리어를 이제야 보는군. 소문대로 추녀는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덱스터는 자기도 모르게 옷차림을 정돈했다. 고작 스물의 덱스터 하워드는 은연중에 루퀼렘 성 천장의 그림 속, 아름다운 여인이 오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합실 문이 열리고, 들어온 ‘진짜’ 이리아 아델리어는 그의 기대와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그녀는 덱스터의 가슴팍에 정수리도 닿지 않을 정도로 키가 작았고, 화관을 쓴 머리는 곧 꺾여 버릴 듯 위태로웠다.

얼굴은 두꺼운 베일로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덱스터는 이리아 아델리어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하기도 전에 기대를 접어 버렸다.

‘딱 보니 미녀는 아니군.’

덱스터는 남몰래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그가 고개를 돌리기 무섭게, 무언가 재미있다는 눈빛으로 생글생글 웃고 있는 호크 로슨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리아 아델리어와 함께 들어온 무녀들이 그녀의 베일을 옆으로 넘겼다. 동시에, 어린아이 특유의 청아한 목소리가 대합실에 나직하게 흘렀다.

[반갑습니다.]

놀랍도록 익숙한 목소리.

덱스터의 두 눈이 천천히 커졌다.

그의 고개가 몹시 느릿하게 이리아 아델리어를 향해 돌아갔다. 목소리만큼이나 익숙한 두 황금빛 눈동자가, 처음으로 제대로 마주한 아이의 얼굴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이리아 아델리어.’

난간 안쪽의 그 아이는, 대마법사 이리아 아델리어였다.

그래, 조금이라도 의심을 품었더라면 곧바로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두 개의 달을 자기가 쏘아 올렸다는 둥, 사람들이 칭찬을 받기 위해 밤새 줄을 서 기다린다는 둥, 아이는 끊임없이 자신이 대마법사 이리아 아델리어라는 점을 흘렸었다.

게다가 루 아휜의 목소리까지. 비센티움어를 해서 금방 알아차리지는 못했지만, 만일 그가 루퀼렘어를 했다면 방 안에서 ‘아가씨’를 운운하던 목소리가 루 아휜의 것이라는 사실을 곧바로 눈치챘을 터였다.

‘아이가 계속해서 언급하던 ‘루루’는 루 아휜을 뜻하는 거였어…….’

뒤늦게 충격에 빠진 덱스터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가장 앞에서 루퀼렘인들을 응대하던 피츠윌리엄 웬트워스 후작은 이리아 아델리어를 보자마자 대놓고 실소를 터뜨렸다. 그가 사뭇 조롱이 섞인 목소리로 내뱉었다.

“이리아 아델리어가 다섯 살 여자아이라는 소문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나 봅니다?”

“감히 누구 앞에서……!”

[루.]

이리아 아델리어가 루 아휜의 팔을 잡았다. 그녀가 작은 미소를 머금고선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마.]

루 아휜의 분노는 곧바로 잦아들었다. 그는 피츠윌리엄 웬트워스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뒤로 물러났다.

다른 이들이 루 아휜을 바라볼 때도, 덱스터의 시선은 이리아 아델리어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하지만 이리아 아델리어는 비센티움인들을 향해 축복의 성명을 읊는 내내, 단 한 번도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이리아 아델리어가 머문 시간은 짧았다. 그녀는 성명을 다 읊자마자 루 아휜, 그리고 수많은 무녀와 함께 대합실을 떠났다.

다른 비센티움인들이 이리아 아델리어의 실체를 온 비센티움에 알릴 계획에 들뜬 사이, 덱스터는 새하얘진 머릿속 탓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는 훗날 ‘퀸터’라는 이름을 가질 군마에 몸을 올릴 때까지도 넋을 놓은 채였다.

끝맺음도 제대로 하지 못한 상태로, 일주일 만에 마무리가 되어 버린 만남.

이것이 이리아 아델리어는 기억하지 못한, 그와 그녀의 첫 만남이었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