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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48/109)

47화

덱스터는 그의 말대로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는 재주 따위 없었다. 하지만 아이는 이상하리만치 큰 맞장구를 치면서 이야기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아이는 덱스터가 가려는 낌새를 보이자마자 ‘아저씨, 내일 또 올 거지?’라는 질문을 기계처럼 반복했다. 덱스터는 끈질긴 아이의 공세에 혀를 내두르며 대충 둘러댔다.

왕국의 두 군주가 사는 장소인 만큼, 루퀼렘 성에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명화들이 많았다. 루퀼렘은 캔버스를 사용하는 비센티움과 달리 건물의 벽이나 천장 위에 직접 그림을 그려 넣는 풍습을 가졌는데, 루퀼렘 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배정된 침실로 돌아가던 덱스터는 아치형의 거대한 복도 천장에 새겨진 그림을 초점 없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구름 속에 휩싸인 두 여인이 그림의 양극단에서 서로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한 명은 하얀 머리를 가지고 다른 한 명은 다섯 개의 뿔을 가진 걸 보아, 대마법사 이리아 아델리어와 루퀼렘의 여신인 듯했다. 그림 속의 두 여인 모두 외모는 평범한 인간다웠으나, 계속 쳐다보기엔 조금 거북한 기분이 들었다.

복도 끝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덱스터는 그림 속 이리아 아델리어를 구경하는 것을 멈추고 다가오는 호크 로슨을 바라보았다. 그는 루퀼렘에 온 비센티움 사자 중에서 유일하게 루퀼렘 문자를 다룰 수 있는 자였다.

호크 로슨은 덱스터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내내 모습이 보이지 않던데. 어딜 갔던 거냐, 하워드?”

“성 뒤편에서 담배 한 개비 태웠습니다.”

딱히 대답을 바라고 했던 질문은 아니었던 듯, 호크 로슨은 고개도 끄덕이지 않았다.

고지식한 귀족답게 머리카락을 한 올도 빠짐없이 뒤로 넘긴 그는 천장의 그림을 올려다보며 혀를 찼다.

“루퀼렘 인간들, 실존하는지도 모르는 여신의 모습을 성 온 구석에 끄적거려놨더군. 이제는 저 뿔 끄트머리만 봐도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야.”

“여신은 그렇다 쳐도, 대마법사 이리아 아델리어는 실존하는 인물이지 않습니까?”

“실존하지. 소문으로는.”

그림 속 이리아 아델리어를 응시하는 호크 로스의 눈동자 속엔 반감이 그득했다.

“나는 이번이 다섯 번째 루퀼렘 성 방문이야. 그런데 단 한 번도 이리아 아델리어의 모습을 본 적이 없어. 언제나 말로만 접했을 뿐이지.”

“루퀼렘인들이 일부러 그녀를 숨기는 게 아닐까요?”

“뭐……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야. 이리아 아델리어가 다섯 살짜리 꼬맹이라는 소문도 있고, 다섯 살은 아니지만 엄청난 추녀라는 소문도 있으니.”

덱스터가 다시 턱을 들어 올렸다.

추녀라는 소문이 무색하게,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세세하게 표현된 대마법사 이리아 아델리어는 엄청나게 아름다웠다. 만일 이리아 아델리어가 그림대로 생겼다면, 미모만으로 비센티움과 루퀼렘을 통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호크 로슨은 그림 속 이리아 아델리어의 모습을 믿지 않는 듯했다. 그는 복도에서 지나다니는 루퀼렘인들의 눈치도 살피지 않고선 호탕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한 나라의 군주가 추녀라니, 내가 루퀼렘인이라도 숨기고 싶겠어!”

그는 한참을 더 박장대소하다가, 덱스터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만일 이번에 이리아 아델리어를 본다면, 내 자네에게 크게 한턱내지. 자네처럼 가난한 자작은 일평생 먹기 힘든 만큼 비싼 음식으로 말이야.”

앞머리에 가린 덱스터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그는 멀어지는 호크 로슨의 뒷모습을 향해 욕설을 뇌까렸다.

“재수 없는 새끼…….”

호위의 임무를 맡은 덱스터가 루퀼렘에서 해야 하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는 어제와 같이, 침실에 들어서자마자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그 루퀼렘 꼬맹이 때문인지, 아니면 호크 로슨 때문인지는 몰라도, 생전 아프지 않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덱스터는 불이 붙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문 채로 두 눈을 감았다. 새까만 눈꺼풀 위로 그림 속 이리아 아델리어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무서울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 겨우 스물의 덱스터 하워드는 훗날 이리아 아델리어와 결혼할 남자가 참 좋겠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

***

다음 날, 덱스터는 아침 식사를 끝내자마자 루퀼렘 성 뒤편으로 향했다. 하루의 첫 담배를 태우러 가는 거지, 절대로 그 이름 모를 루퀼렘 꼬마를 보러 가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덱스터는 성 뒤편에 자리를 잡기도 전에 무의식적으로 2층 난간을 살폈다.

난간 안쪽은 다른 때와 달리, 무척이나 조용했다. 아이의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덱스터는 오랜만에 담배 한 개비를 끝까지 태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두 번째 담배를 꺼내는 순간, 벌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새된 고함이 쩌렁쩌렁 울렸다.

[싫어! 안 할 거야! 안 해-!!]

[하셔야 합니다, 아가씨. 아가씨의 의무잖아요.]

[이것도 의무, 저것도 의무! 의무란 말 좀 그만해! 그딴 단어 지긋지긋해!]

[아가씨…….]

[만지지 마!]

무언가를 쳐 내는 소리. 물건을 던지는 소리와 유리가 깨지는 소리. 그 뒤로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이어졌다.

계속되는 서러운 울음 사이로 남자의 미성(美聲)이 끼어들었다.

[아가씨의 출생은 저희와는 달라요. 고귀한 몸으로 태어나셨으니, 하기 싫다는 이유로 의무를 피하실 수는…….]

[내가, 내가 이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줄 알아?! 나도 이렇게 태어나기 싫었어! 평범한 마법사로 태어나고 싶었단 말이야-!!]

아이는 숨이 찬지, 끅끅거리면서도 멈추지 않고 비명을 내질렀다.

[왜 나는 이 방에 갇혀서 온종일 마법석만 만들어야 해? 왜 나는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거야? 왜…… 왜 나는 이렇게 살아야 해? 다른 사람들은 살고 싶은 대로 사는데, 왜 나만 그런 자유가 없어?]

성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의 비명은 차츰 흐느낌으로 변해 갔다.

아이는 한참을 서럽게 울다가, 숨을 고르며 최대한 단호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나가. 꼴도 보기 싫어.]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닫히자마자 아이는 언제 침착함을 되찾았냐는 듯, 또다시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덱스터는 곧이어, 난간 끄트머리서 툭 튀어나온 두 다리를 마주할 수 있었다.

아이는 난간에 이마를 콩콩 박으며 흐느꼈다.

[아, 아저씨는 좋겠다. 아저씨는 자…… 자유롭잖아. 나, 나도 자유로워지고 싶어…….]

[자유가 꼭 좋지만은 않아. 저 밖은 지옥이란다, 꼬마야.]

[사…… 상관없어. 나한테는 여, 여기도 이미 지옥이란 말야…….]

허. 덱스터가 코웃음 치며 담배 끄트머리를 빨아들였다.

그는 겨우 열 살의 나이에 부모와 직위를 잃어 군대를 전전한 남자였다. 의무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만일 그가 울고 있는 루퀼렘 아이였다면 주어진 환경에 만족하며 고분고분 사람들의 말을 따랐을 것이다.

‘넌 배가 불렀구나, 꼬마야…….’

덱스터가 아이의 나이였을 적에는 군인들에게 맞아 가며 고된 심부름을 했었다. 불평 한마디 내뱉는 것조차 불가능했었기에, 그는 투정을 부리는 아이의 행동이 부러우면서도 싫었다.

기분이 상한 덱스터가 괜히 빈 담뱃갑을 구기며 일렀다.

[그만 짜. 난 어린애 울음소리 싫어해.]

아이가 울음을 멈추기 위해서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눈물은 어찌어찌 틀어막을 수 있었지만, 튀어나오는 딸꾹질까지는 손쓸 방법이 없었다.

히끅, 히끅. 불규칙한 딸꾹질 소리가 루퀼렘 성 후원을 울렸다.

그래, 딸꾹질까지는 어떻게 할 수 없겠지. 덱스터는 한숨을 내쉬었지만, 핀잔을 주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힘겨워하는 아이에게 툭 던지듯 말했다.

[그럼 가출을 해. 너 마법 쓸 수 있다면서? 마법을 쓸 수 있다면 가출하기도 더 쉽겠군.]

[나…… 난 이제 겨우 열세 살이야, 아저씨! 루루가 아저씨를 본다면 나한테 이상한 걸 가르친다며 분명 혼을 낼 거야!]

[열세 살이 너무 어리면, 스물이 되어 나가든가. 스무 살이 되어 집을 나가면 그건 가출(家出)도 아니지, 출가(出家)지.]

[스, 스무 살……?]

[그래. 스물이 되면, 네가 집을 나가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을걸. 아니, 오히려 나가게 만들 수도 있겠군.]

비센티움의 명문가 여인들은 흔히 성인이 되는 순간, 다른 가문으로 시집을 간다. 이는 봉건제가 시작된 이후로부터 시작된 비센티움의 뿌리 깊은 문화 중 하나였다.

루퀼렘의 문화 따위 모르는 덱스터는 루퀼렘의 명문가 여인들도 비센티움과 마찬가지로 성인이 되는 순간, 다른 가문으로 시집을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덱스터의 생각이 크게 틀린 건 아니었지만, 그는 난간 안쪽의 아이가 ‘평범한’ 비센티움의 명문가 여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스물이 되어서 무사히 집을 나오면 내가 칭찬해 주마. 그러니까 눈물 그만 짜.]

[우웅…….]

대답 이후로, 아이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출을 하라니, 누가 들어도 형편없고 말이 안 되는 조언이었다. 덱스터 또한 별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었기에, 아이가 조언을 사뭇 심각하게 받아들였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아이가 침묵을 유지하는 동안, 덱스터는 아이의 발가락을 구경했다. 작고 창백한 발가락들은 정신없이 굴러가는 아이의 두뇌만큼이나 열심히 꼼지락대고 있었다.

덱스터가 무의식적으로 발가락을 만지려는 찰나, 아이가 기침을 터뜨리며 말했다.

[아저씨, 아저씨한테서 또 이상한 냄새 나.]

“아, 이런…….”

딸꾹질과 기침을 동시에 터뜨리는 아이의 모습은 참 못 볼 꼴이었다. 덱스터는 뒤늦게 그의 실수를 깨달아 허둥지둥 담뱃불을 껐다.

어느덧 기침을 멈춘 아이의 눈동자가 난간 밖으로 빼꼼 튀어나왔다. 아이의 두 황금빛 눈동자는 눈물로 젖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커다랗고 똘망똘망했다.

[아저씨가 입에 물고 있는 그거, 안 하면 내가 칭찬해 줄게.]

[미안하지만 네 칭찬 따위 필요 없어.]

[그래……? 아저씨 참 특이하다. 다른 사람들은 내 칭찬을 받으려고 밤새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아, 그래. 덱스터는 성의 없는 맞장구를 쳤다.

덱스터가 담뱃재 뭍은 소매를 털어 내는 동안, 아이는 계속해서 빤히 그를 내려다보았다. 무언가를 자세히 재 보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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