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덱스터는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는 루퀼렘 소녀를 상대하고 싶지 않아졌다. 그는 뒤에서 들려오는 ‘아저씨, 어디 가?’도 무시하고서는, 한숨과 함께 자리를 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아이가 있던 그곳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젠장, 더러운 루퀼렘.’
성은 미치도록 넓은데, 담배를 태울 수 있는 곳은 딱 그 장소뿐이었다.
아이는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자마자 아는 척을 해 왔다. 발랄한 목소리가 덱스터의 신경을 긁었다.
[아저씨, 입에 문 그거 안 하면 안 돼? 이상한 냄새 나.]
[간접흡연을 하게 만든 건 미안하지만, 이 나라가 흡연자 배려를 너무 안 해 줘서 어쩔 수 없다, 꼬마야.]
[나 목 아픈 것 같아.]
아이가 말을 하기 무섭게 콜록콜록 기침을 터뜨렸다. 덱스터는 오만상을 찌푸리면서도 담뱃불을 껐다.
루퀼렘인은 싫었지만, 아이는 여자인 데다가 나이가 너무 어렸다.
[꼬마야, 너 몇 살이냐?]
[루루가 나는 열셋이랬어. 이제 곧 열넷이 될 거야.]
[열세 살이라기에는 손 크기가 참 쥐똥만 하군. 열세 살도 마법을 쓸 수 있나?]
[그럼, 당연하지!]
아이의 목소리에 뿌듯한 마음이 흠뻑 묻어 나왔다. 난간 밖으로 불쑥 튀어나온 창백한 손은 새벽하늘 속에 떠 있는 두 개의 달을 가리켰다.
[저것들도 다 내가 쏘아 올렸어!]
덱스터는 아이의 말을 듣자마자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저 거대한 달들을 겨우 열세 살짜리 꼬마가 어떻게 쏘아 올렸다는 건지! 대체 어느 상류층의 자녀인지는 모르겠으나, 아이의 언어 습관이 크게 잘못 형성되어 있었다.
[거짓말하면 못쓴다, 꼬마야. 네가 루퀼렘 사람만 아니었다면 나한테 엄청나게 혼났을 거야.]
[거짓말 아닌데…….]
[난 상대가 어리다고 장단 같은 거 못 맞춰 줘. 다음번에도 또 거짓말하면, 그때는 무조건 혼낼 거야.]
[지, 진짜로 거짓말 아닌데…….]
난간 안쪽에서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가 앉는 자세를 바꾸었는지, 덱스터의 머리 위로 새하얀 두 다리가 대롱대롱 튀어나왔다.
덱스터는 그의 머리맡에서 흔들리는 발을 빤히 응시했다. 루퀼렘 사람의 피부를 이토록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소문에 따르면, 루퀼렘 사람들은 멜라닌 세포 대신 마력을 만들어 내는 세포를 가진다고 한다. 그들의 피부는 시체처럼 창백하고 색이 쉽게 변하지 않으며, 한 번 상처가 나면 아무는 속도가 매우 더디기 때문에 의술을 통한 치료보다는 마법을 통한 치료를 선호한다고.
아이의 새하얀 발을 보고 있으니 문득 촉감이 궁금해졌다. 핏기가 하나도 없는 탓에 겉으로 보기에는 대리석처럼 딱딱하고 차가울 것 같았다.
덱스터가 손끝으로 아이의 발바닥을 살짝 쓸어 보았다.
‘아……?’
정말 놀랍게도, 새하얀 발바닥은 예상과 달리 무척이나 따뜻하고 보드라웠다. 어쩌면 비센티움 제국민의 피부보다도 더 고울 듯했다.
깜짝 놀란 덱스터가 다시 한번 발바닥을 매만지니 난간 안쪽에서 까르르, 아이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이는 그가 단순히 간지럼을 태우는 중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이는 한참 두 발을 동동 구르며 웃다가, 덱스터에게 물었다.
[아저씨, 나 아저씨 머리카락 한 번만 만져 보면 안 돼?]
[……내 머리는 왜?]
[나 까만 머리는 처음 봐!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
덱스터가 아이의 피부 촉감을 궁금해했듯, 아이도 덱스터의 머리카락 촉감을 궁금해하고 있었다.
별로 승낙하고 싶지 않았지만, 덱스터는 그가 이미 아이의 발바닥을 허락 없이 만져 버렸기에 안된다고 뺄 처지가 못 되었다.
그렇게 그는 결국,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루퀼렘 꼬마한테 머리카락을 내어 주고 말았다.
[아저씨 머리카락 엄청 부드럽다……. 틸다의 털보다 더 부드러운 것 같아.]
[틸다? 틸다가 누구야?]
[내 조랑말. 아저씨한테 자랑하고 싶을 정도로 새하얗고 예쁜 조랑말이야.]
[너는 말한테도 이름을 줘……? 루퀼렘인들은 원래 말한테 이름을 주나?]
[틸다는 내 친구야. 내가 세상으로 나올 때 수십 마리의 동물들이 함께 태어났는데, 틸다도 그때 태어났어. 나랑 생일이 같은 친구라구!]
덱스터는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루퀼렘 사람들의 생각들은 한낱 군인인 그가 이해하기에 너무 차원이 높았다. 그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놀고 있는 꼬마의 말은 더더욱.
비센티움인들은 원체 의도적으로 말들에게 이름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풍습을 잘 모르는 아이는, 친구와도 같은 말에게 이름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속상했다.
[그럼 아저씨 말도 이름이 없어?]
[난 딱히 짐승한테 이름을 줄 필요성을 못 느끼겠는데.]
[그럴 수가……. 그럼 내가 대신 지어 줘야겠다!]
아이는 덱스터의 머리를 매만지며 곰곰이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기나긴 침묵이 덱스터에게 담배를 당기게 만들 때 즈음, 아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이반-퀸트라’ 어때? 성에 사는 검은 잉어와 커다란 독수리의 이름이야!]
[첫 번째, 너무 길어. 두 번째, 구려.]
[아이반과 퀸트라는 성을 수호하는 여신의 동물들이야, 아저씨…….]
[구리다는 말은 취소.]
[그럼 아저씨 말한테 내가 준 이름 붙여 줄 거야?]
[아니.]
말이 끝나자마자 아이는 덱스터의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헝클어뜨리기 시작했다.
덱스터는 아이의 성격이 여린 목소리와 다르게 참 괴팍하다고 생각하며, 마지못해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훗날, 자신의 흑마에게 아이가 준 이름을 그대로 붙여 주리라곤 상상조차 못 했다. 하지만 ‘아이반-퀸트라’라는 이름이 너무 길어 부르기가 힘든 탓에 ‘퀸터’라고 줄여 불렀다고.
덱스터가 방으로 돌아왔을 때는 시간이 꽤 지나 있었다. 그는 담뱃갑을 꺼내 방 한구석에 처박아 두고선, 침대에 몸을 던졌다.
그는 씻지도 않은 채로 잠자리에 들며, 딱 하나만을 생각했다.
아.
집에 가고 싶다.
***
덱스터는 다음날에도 이름 모를 루퀼렘 꼬마를 만났다. 아이는 전날처럼 성 2층 난간에 다리를 대롱대롱 매달고선 루퀼렘의 동요를 부르고 있었다.
하얀 수리와 검은 잉어 사이의 마법사 아델리어
북쪽의 거룩한 땅, 루퀼렘의 긴 만년설 안에서 태어났네
영원한 밤 속에서 찾아온 다섯 뿔의 여신
아델리어는 여신의 구원을 위해 새벽하늘 두 개의 달을 쏘아 올렸네
가슴속 마른 심장을 내어 두어라, 아델리어
너의 마법만이 나를 숨 쉬게 만든단다
아델리어는 다섯 뿔의 여신에게 심장을 건넸더라
그녀의 등에는 긴 꼬리 수리의 날개가 힘차게 돋아났네
내 소중한 흡연 시간이 또 날아갔구나.
덱스터가 한숨을 푹 내쉬며 꺼냈던 담뱃갑을 주머니에 다시 쑤셔 넣었다.
아이는 덱스터를 보자마자 그에게 아는 척을 하려는 듯, 노래를 멈추고 발을 동동 굴러 대기 시작했다.
[아저씨, 오늘도 또 왔네!]
[너도 또 있네.]
[난 여기서 못 나가. 루루가 나가면 안 된댔어.]
덱스터의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섰다.
그는 아이가 자신의 예상보다 더 높은 직급의 자제라고 생각했다. 성 밖으로 아이를 함부로 내보내지 않는다는 것은 곧 부모의 과도한 보호를 의미했으니까.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출신이 어디인지 물어볼까. 덱스터는 머리맡의 새하얗고 조그마한 발을 보며 잠시 고민했다가, 아이의 순수한 일면을 믿고 입을 열었다.
[꼬마야, 너는 출신이 어디니?]
[아저씨 내 노래 못 들었어? 긴 만년설 안에서 태어났다고 했잖아!]
[그건 대마법사 아델리어의 이야기고. 너는 따로 특정한 출신이 있을 거 아니냐, 꼬마야.]
[……난 가끔 아저씨를 이해하지 못하겠어.]
[그건 내가 할 말이야.]
대화를 나눌수록 알 수 없는, 참 이상한 아이구나.
아이의 새하얀 발을 바라보는 덱스터의 얼굴이 단계적으로 일그러졌다. 그는 급기야 아이가 정신적인 장애를 가지고 있나 의심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아이는 천진난만했다. 덱스터는 난간을 꼭 붙잡고 있는 창백한 손을 확인하고선 물었다.
[밖에 나갈 수 없다면, 너는 종일 그곳에 앉아 있는 건가?]
[응. 특별한 날은 빼고.]
[앉아서 뭘 하는데? 변하지 않는 하늘 구경은 안 할 것 아니냐.]
[아저씨, 저기 호수 보여? 여기 앉아 있으면 저 호수로 세상을 볼 수 있어.]
아이의 손가락 끝에 거대한 호수가 있기는 했다. 그러나 거리가 너무 먼 탓에, 실루엣만 언뜻 보일 정도였다.
덱스터는 호수로 세상을 본다는 아이의 말에 한심스러운 실소를 터뜨렸다.
모든 루퀼렘인이 그런 건지, 아니면 아이가 더욱 특이한 건지는 몰라도, 아이와는 상식적인 대화를 나눌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생각의 끝을 놓아 버렸다. 진위 판단 없이 아이의 말에 무조건 장단을 맞춰 주기로 한 것이다.
[호수가 너무 먼데. 잘 보이긴 하나?]
[아니, 잘 안 보여.]
[그럼 왜 보는 거야?]
[여기서는 그나마 세상을 볼 방법이 저것밖에 없으니까.]
아이의 목소리에 슬픔이 묻어 나왔다. 덱스터의 시선은 여전히 난간을 꼭 붙잡고 있는 아이의 손에 있었다. 투명한 루퀼렘 성의 난간이 언뜻 보면 감옥의 쇠창살 같기도 했다.
아이는 상당히 긴 시간 말없이 호수를 응시하다가, 난간 밖 다리를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저씨는 뭐 하는 사람이야? 무슨 일을 하길래 다른 나라에 왔어?]
[난 그냥 상관의 명령에 따라 이곳저곳 돌아다녀. 겨우 열세 살짜리 외국 꼬맹이한테 떳떳하게 자랑할 수 있는 직업은 아니야.]
[이곳저곳 돌아다닌다고……? 진짜 재밌겠다!]
[아니. 딱히 재미있지는 않은데…….]
[아저씨, 나한테 바깥세상 이야기 좀 들려주면 안 돼? 듣고 싶어.]
아이의 목소리에서부터 기대감이 철철 넘쳐흘렀다. 아이는 덱스터를 음유시인이나 무역 상인 정도로 여기지, 군인이라고는 절대 생각지 않는 듯했다.
덱스터는 원체 아이와 어른 상관없이 모두에게 무뚝뚝한 사람이었다. 바깥세상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아이의 부탁을 거절해야 옳았다.
하지만 왜인지, 덱스터는 도무지 아이에게 단호히 ‘싫어’라며 고개를 내저을 수 없었다.
[난 이야기 재미있게 하는 재주 없어.]
[괜찮아. 재미없어도 잘 들을 수 있어!]
[중간에 잠들면 그냥 갈 거야.]
[잠 안 들게!]
덱스터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지독한 흡연자인 그는 바지 주머니 속 담뱃갑을 만지작거리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체 왜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외국 여자아이, 그것도 ‘루퀼렘’ 여자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지 그 자신도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덱스터는 이게 다 금단현상의 일종이라고 치부해 버렸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