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6/109)

45화

09.

덱스터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곧장 문을 닫았다. 그는 이리아를 로브에 꽁꽁 싸서 데려온 후, 루시어스에게까지도 그녀의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다.

온통 검은 이불 위에 누워 끙끙대는 대마법사 이리아 아델리어는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 같았다. 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그녀에게선 새빨간 머리카락을 가졌던 때는 없었던 신비로움이 흠뻑 풍겨 나왔다.

덱스터가 손에 들려 있던 쟁반을 내려 두었다. 그가 침대맡 의자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일어나서 먹어. 약을 먹으려면 조금이라도 음식이 들어가야 해.”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이리아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살짝 고개를 들었던 그녀는 덱스터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황급히 다시 베개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러잖아도 작았던 몸뚱어리가 더 작아졌다. 이리아는 갓 태어난 짐승처럼 필사적으로 제 몸을 웅크렸다.

덱스터는 이불 안에 숨어 바들바들 떨고 있는 이리아를 한참 바라보다가, 그녀의 어깨를 잡아 홱 돌려 버렸다.

옅게 눈물이 맺힌 두 황금빛 눈동자엔 불안감이 가득했다. 덱스터가 이리아 앞으로 죽을 뜬 수저를 들이밀었으나,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고 있을 뿐이었다.

죽에 독을 탔다고 오해라도 하는 건지, 덱스터가 몇 번이나 시도해도 이리아는 입을 벌리지 않았다.

고개를 양옆으로 필사적으로 내젓고 있는 그녀에게, 참다못한 덱스터가 소리쳤다.

“이대로 열병에 걸려 죽을 셈이야?! 약을 먹어야 체온이 떨어지지!”

“루, 루퀼렘…… 루퀼렘과…….”

이리아의 목소리는 집중해서 듣지 않으면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이나 거칠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의 창백한 볼을 타고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루퀼렘과 전쟁을 하지 말아 주세요, 하워드 공…….”

덱스터의 얼굴이 단박에 일그러졌다. 그는 무언가를 말하지 못해 답답하다는 듯, 입술을 몇 차례 달싹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덱스터가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 부드러운 말투로 일렀다.

“루퀼렘과 전쟁 따윈 안 해. 그러니까 제발 먹자, 응?”

“거, 거, 거짓말 마세요. 마……마법이 싫다면서요, 마법이 싫어서 모든 마법사의 며…… 멱을 따 버린다고 하셨잖아요!”

“빌어먹을…….”

쨍그랑. 덱스터가 들고 있던 수저를 그릇에 던져 넣었다. 그는 비에 젖은 검은 머리카락을 양손으로 우악스럽게 털어 내고선, 제 얼굴을 수차례 쓸어내렸다.

덱스터가 조금만 거친 행동을 보여도 불안해 죽을 것만 같다. 이리아는 터져 나오기 시작한 딸꾹질을 들키지 않기 위해 있는 힘껏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온몸이 흔들리는 딸꾹질을 숨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창백했던 그녀의 두 볼이 급기야 새파랗게 질리자, 덱스터의 얼굴은 더더욱 일그러졌다.

그가 한탄하는 듯 문장들을 쉴 틈 없이 토해 냈다.

“루퀼렘인의 멱을 다 따 버리겠다는 건 철없던 십 대 시절에 생각 없이 내뱉었던 말이야! 그 말을 한 지 무려 10년이 더 지났는데도, 사람들은 지금까지 내가 루퀼렘의 마법사들을 다 죽여 버릴 거라며 떠들어 대고 있어!”

히끅. 이리아의 어깨가 크게 요동쳤다.

그녀가 앞으로 내려온 하얀 머리칼 사이로 덱스터를 소심하게 바라보았다.

“그, 그럼 하워드 공께서는 루…… 루퀼렘과 전쟁을……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건가요?”

“내가 루퀼렘과 전쟁을 할 리가 없잖아, 이리아.”

덱스터가 고개를 돌려 유리잔에 물을 따르기 시작했다. 이리아는 어깨를 한껏 웅크린 채로 그의 모습을 빤히 응시했다.

이리아. 조금 전의 빗속에서도, 그리고 방금도 덱스터는 분명 ‘이리아’라고 했다.

어떻게 내 본명을 알고 있는 거지? 그녀는 본모습으로 덱스터를 만난 적이 없었다.

덱스터 하워드는 강렬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그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봤다면 분명 기억을 하고 있었을 텐데, 과거 이리아의 기억 속엔 그의 얼굴이 없었었다.

이리아의 마음속에서 의구심이 배가되어 갈 때, 덱스터가 그녀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그러고선, 창백한 손아귀에 물이 찬 유리잔을 냅다 쥐여 주었다.

이 유리잔은 대체 무슨 뜻인지. 재차 불안감이 퍼지기 시작한 그녀의 두 귓가에, 덱스터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기억 안 나? 당신이 열세 살이었을 때, 내 머리 위로 떨어뜨렸었잖아.”

이리아의 두 눈이 서서히 커졌다. 그녀는 흔들리는 눈망울로 바로 앞의 덱스터를 응시했다.

‘……열세 살.’

생각할 겨를이 없어 줄곧 잊고 살았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해일처럼 밀어닥쳤다.

열세 살. 루퀼렘 성 후원. 매캐했던 담배 냄새와 바깥세상의 이야기. 난간에 오도카니 남겨져 있던 새빨간 사과.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 보았던 검은 머리의 외국인.

8년 전의 그때처럼, 이리아는 손아귀의 유리컵을 놓치고 말았다. 컵이 와장창 깨지며 유리가 사방으로 튀었지만, 덱스터와 이리아는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리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저씨……?]

덱스터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답은 이미 그의 올곧은 두 눈동자 속에 쓰여 있었다.

덱스터는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 그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리아 아델리어는 모르는, 오직 그만의 이야기를.

***

사람들은 덱스터 하워드를 ‘하워드 공작’이라고 불렀지만, 사실 그는 공작이기 전에 군단장이었다.

황실 대신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황태자의 황위 계승과 반대되는 정책을 내세웠다는 이유로 남몰래 숙청되었고, 어머니는 황비에 의해 독살당했다.

당시 덱스터는 겨우 열 살이었음에도 어머니, 아버지가 황태자의 안정적인 권력을 위해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황실의 다음 희생양이 되지 않기 위해서 전쟁터로 도망쳤다.

덱스터 하워드는 야망이 크지 않은 남자였다. 그는 전쟁터에서 목숨만 보전하면 되었다. 하지만 목숨을 위해 싸우다 보니 어느덧 사람들 사이선 영웅이 되어 있었고, 눈 떠 보니 군단장의 지위였다.

직위의 첫 시작은 자작이었다. 덱스터는 황태자의 이종사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황실의 눈밖에 들어 직위를 가지지 못했었다. 그렇기에 그는 황실의 아이가 아닌 비센티움 제국의 군인으로서 자작의 직위를 얻어야 했고, 백작, 후작을 지나 마침내 ‘하워드 공작’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덱스터는 일평생을 칼과 총, 주변인의 죽음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루퀼렘을 죽도록 싫어했다.

그는 루퀼렘이 강조하는 안정, 평화, 고요가 오로지 배부른 자들의 이기적인 단어라고 생각했다. 루퀼렘의 평화주의적이고 낙관주의적인 태도가 같잖았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는, 루퀼렘이 가진 마법 또한 혐오했다.

‘……재수 없어.’

덱스터가 새벽하늘에 뜬 두 개의 달을 보며 연기를 내뿜었다. 그의 발아래에는 벌써 두 개의 담배꽁초가 나동그라져 있었다.

아직 자작의 지위에 머물던 스물의 덱스터는 황실의 명령으로 어쩔 수 없이 루퀼렘에 머무르는 참이었다. 얼마 전 루퀼렘 운하에서 실종된 비센티움 선원 다섯 명과 관련된 외교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신들이 긴급으로 파견되었는데, 그들을 호위하는 게 덱스터의 임무였다.

대체 어떻게 생긴 나라인지, 루퀼렘에서는 길에서 담배도 못 피우게 했다. 덱스터는 신하들의 눈을 피해 성을 돌고 돌다가, 잘 보이지 않는 난간 아래 장소를 발견해 그곳에서 몰래 흡연을 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세 번째 담배꽁초가 땅으로 떨어지는 찰나, 덱스터의 머리 위로 난데없이 물이 촥 쏟아졌다.

“이런 망할…….”

대체 어떤 놈이 물을 부었는지! 덱스터가 쌍욕을 뇌까리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2층 난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던 황금빛 눈동자 한 쌍이 쏙 들어갔다.

눈동자는 머뭇거리며 덱스터를 바라보았다가, 다시 쏙 들어가기를 반복했다.

난간 안쪽에서부터 상당히 앳된 소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미…… 미안해…….]

루퀼렘 상류층 특유의 억양이었다.

아이의 말에 대답할 능력은 충분히 있었지만, 덱스터는 그의 목소리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일부러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정원 위에 나동그라진 유리잔을 주워 2층을 향해 뻗어 올렸다. 난간 안쪽에서 조그마하고 창백한 팔이 튀어나와 유리잔을 채갔다. 기껏해 봤자 열 살 정도 될 것 같은 어린아이의 팔이었다.

루퀼렘인과 별로 엮이고 싶지 않았던 덱스터는 담배만 피우고 떠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2층의 소녀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아…… 아저씨, 입에 물고 있는 거 뭐야? 먹는 거야?]

새까만 눈썹이 꿈틀했다. 덱스터는 대답하고 싶지 않았지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겨우 스물이 된 그는 ‘아저씨’라 불릴 정도로 늙지 않았으니까.

[나 아저씨 아니다, 꼬마야. 그리고 이것도 먹는 거 아니야.]

[그, 그럼 뭔데?]

[몸에 엄청 나쁜 거. 너 같은 애는 피우면 안 돼.]

[그럼 아저씨는 그걸 왜 물고 있는 거야? 아저씨 몸 아픈 거 즐기는 사람이야?]

듣는 사람이 오해할 수 있는 소지가 상당히 큰 질문이었다.

덱스터가 미간을 찌푸리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루퀼렘 꼬마가 비센티움인인 그를 놀리려고 일부러 저런 질문을 하는 건가 싶었지만, 난간 밖으로 삐죽 튀어나온 황금빛 눈동자는 맑고 순수하기만 했다.

[그냥 피우니까 피우는 거야. 그리고 나 아저씨 아니라고 벌써 두 번째로 말하고 있다, 꼬마야.]

[모…… 몸에 안 좋으면 하지 마! 그러다가 아저씨 일찍 죽어!]

하! 덱스터가 실소를 터뜨렸다.

그는 총과 칼을 등에 이고 사는 군인이었다. 담배 때문에 일찍 죽는 확률보다 칼에 맞아서 죽는 확률이 더 높을 텐데. 꼬마의 되지도 않는 걱정이 참 같잖았다.

꼬마는 처음 만난 사람에게도 조잘조잘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덱스터가 물고 있던 담배를 버리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루퀼렘 성 후원의 2층 난간에 있는 여자아이.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상당한 고위층의 자녀인 것은 분명했다.

잘 됐어. 이참에 정보나 좀 뜯어가 볼까.

덱스터가 속에 남은 담배 연기를 모두 내뿜고선 입을 열었다.

[꼬마야, 너 이름이 뭐야?]

[그, 그건 비밀이야. 루루가 내 이름은 다른 사람들한테 함부로 알려 주면 안 된댔어. 아저씨는 이름이 뭐야?]

[네 이름 안 알려 줬잖아. 그럼 내 이름도 안 알려 줘.]

어차피 이름을 말해 줬다고 해도 알려 주지 않았을 테지만.

군인 덱스터 하워드의 이름은 꽤 알려져 있었기에 아이가 들으면 그의 정체를 바로 알 수도 있었다.

난간 안쪽에서 작게 칭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는 잠시 고민하다가, 마치 비밀 이야기를 하는 사람처럼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이름 대신 내 애칭을 알려 줄게.]

[……애칭? 뭔데?]

[리리.]

에즈메릴다 혼 루미에르 여왕, 루 아휜 성기사단장, 대마법사 아델리어를 시작으로 덱스터의 머릿속에 이름을 아는 루퀼렘 사람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하지만 그중에 아무도 ‘리리’라는 귀여운 애칭으로 불릴만한 이는 없었다.

[아저씨는 애칭 없어?]

[넌 내가 그런 거 있을 것 같냐……?]

[아니, 그냥 예의상으로 물어본 거였어.]

대체 뭐가 재미있는 건지, 아이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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