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5/109)

44화

거대한 정원을 가진 만큼, 덱스터의 저택은 비센티움 도심에서 꽤 먼 곳에 있었다. 원래는 도심까지 말을 타고 가는 게 훨씬 빨랐지만, 덱스터는 몸이 좋지 않은 이리아를 배려하여 마차를 준비했다.

덱스터의 저택을 보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었다.

이리아는 마차에 오르고선, 지난 두 달을 함께했던 저택을 한참 응시했다. 그리고 새삼 자신이 저택에 정이 들었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고개를 돌렸다.

좁은 마차 안에 덱스터의 박하 향이 가득 채워졌다. 향 속에서는 드문드문 독한 알코올 냄새도 느껴졌다. 몸이 아팠던 이리아와 줄곧 함께 있었기 때문인 듯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이리아는 마차에 편하게 기댄 채로 덱스터의 박하 향을 한껏 들이마셨다.

둘은 도심 한가운데서 내렸다. 번화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날이 좋지 않은 탓인지,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수가 평소보다 적었다.

덱스터는 마부에게 근방의 성을 중심으로 크게 한 바퀴를 돈 후, 다시 오라고 일렀다.

이리아는 저 멀리 떠나가는 퀸터에게 마음속으로 마지막 작별 인사를 했다.

덱스터의 영지 안쪽 도심은 루퀼렘을 처음 탈출했을 때 맞이했던 북방의 도시보다 조금 더 큰 규모였다. 다른 때 같았다면 길거리에서 파는 소품들을 신기한 눈으로 구경했을 테지만, 지금은 관심이 가지 않았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이리아의 빨간 머리칼을 헤쳤다.

덱스터가 내려온 머리칼을 귀 뒤로 살며시 넘겨 주었다.

“날이 좋은 날에 진작 당신을 이곳에 데려올 걸 그랬어. 많이 후회되는군.”

“아녜요. 전 오늘 날씨도 좋아요.”

그림자가 생기지 않을 정도로 우중충한 낮. 도망가는 데는 딱 좋은 날씨였다.

덱스터의 보폭은 절뚝거리는 이리아의 것에 맞추어 한껏 작아져 있었다.

그가 이리아를 조심스레 어느 가게로 이끌었다.

짤랑, 문 위에 달린 종에서부터 경쾌한 소리가 났다. 문이 열리자마자, 달콤하고도 강렬한 냄새가 훅 끼쳐왔다.

이리아는 이미 아는 냄새.

다름 아닌 술 냄새였다.

“여…… 여긴 어떤 일을 하는 곳이에요?”

“술 파는 데야. 흔히 두 글자로 줄여서, ‘술집’이라고 하지.”

덱스터가 어깨를 작게 으쓱이며 덧붙였다.

“몸 상태가 영 별로인 당신한테 술을 먹일 생각은 없지만, 이곳 분위기가 퍽 좋거든. 이 동네에서는 유명해.”

이리아는 뒤늦게 가게를 둘러보았다.

덱스터의 말대로, 가게 분위기는 퍽 괜찮았다. 가게 한쪽에서는 동네의 작은 연주단이 악기를 켜고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신사들이 체스를 두는 중이었다. 어두운 가문비나무를 잘라 만든 배리어(*barrier: 바의 중앙 선반을 둘러싸고 있는 탁자) 안쪽에서는 바텐더가 화려한 손놀림으로 칵테일을 만들고 있었다.

덱스터는 원래는 술집에 들어올 생각이 아니었는데, 날이 좋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이곳을 선택한 듯했다. 그는 술을 사지 않는 대신 바텐더에게 줄 팁을 꺼냈다.

하지만 그런 덱스터를 이리아가 막았다. 그녀는 은근슬쩍 주변인들이 마시고 있는 칵테일을 살폈다.

“설마, 술 마시려고?”

“네. 한 잔만요.”

“몸도 성치 못하면서…….”

어차피 이것도 마지막이다. 루퀼렘에 가면 음주는 상상도 못 한다.

칵테일에 관해선 문외한인 이리아가 독한 술을 시키기 전에, 덱스터가 한발 빠르게 주문했다. 그가 주문한 잔은 신데렐라(*Cinderella: 도수가 없는 칵테일의 한 종류)였다.

덱스터는 따로 위스키를 시켜 마른 입술을 적셨다. 그가 술을 마시면서도 계속해서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한다는 걸 알아차리자마자, 이리아는 작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하워드 공이랑 함께 술잔을 기울인 적은 지금이 처음이네요.”

“우리는 항상 따로 마셨었지.”

“전에는 시도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는데, 함께 마시는 것도 괜찮은 것 같아요.”

덱스터의 한쪽 눈썹이 삐딱하게 치켜 올라갔다.

그는 잠시 이리아를 가만 바라보다가, 핼쑥해진 그녀의 뺨을 손등으로 살살 쓸었다.

이리아는 최대한 느리게 잔을 비워 나갔다. 잔이 술 한 방울도 남지 않았을 정도로 완벽하게 비워지자마자, 그녀가 자리서 일어났다.

“저……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들어왔을 때 화장실이 뒤쪽 복도에 있다는 것 정도는 확인했다. 분명 가게 뒷문도 함께 있을 테니, 그곳을 통하면 아마 쉽게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

진짜 마지막이야.

이 남자는 앞으로 다시는 만나서도 안 되고, 만날 일도 없다.

이리아가 줄곧 자신을 보고 있던 덱스터를 향해 최대한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건지, 덱스터의 미간이 순간 작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이리아는 그런 그를 가볍게 지나쳤다.

느릿했던 걸음은 덱스터의 시야를 벗어나자마자 빨라졌다. 그녀는 드레스를 틀어잡고선 있는 힘껏 뛰어 순식간에 가게를 벗어났다.

숨통은 금세 차올랐다. 땅에 닿을 때마다 다친 왼쪽 발목이 고통스러웠지만, 뜀박질을 멈출 순 없었다.

이리아는 좁은 골목을 가로지르며 수차례 행인들과 어깨를 부딪쳤다. 종종 그들의 욕설이 들려왔지만, 사과는 하지 않았다. 그럴 여유조차도 없었다.

우중충했던 하늘에서부턴 한 방울씩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리아가 무거운 케이프를 벗어 던졌을 땐, 어느덧 뿌연 장대비가 쏟아지는 중이었다.

빗방울 때문에 앞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이리아가 속눈썹에 아롱아롱 매달린 빗방울을 털어 내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 순간, 앞서가던 정수리가 무언가에 쿵 부딪혔다.

“아……!”

이리아의 온몸이 크게 휘청였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홱 들어 올렸다.

뿌연 장대비 속에서, 이리아의 시야에 맨 처음 들어온 것은 온통 검은 우산이었다.

제자리에 서 있던 그 짧은 시간에 빗줄기는 더더욱 굵어졌다. 밑창이 젖은 것도 모자라 구두 안쪽에 물이 차기 시작했다.

참 이상하게도, 우산에 부딪히는 순간부터 더는 다리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비 때문에 사방이 보이지 않는 세상 속에서 이리아는 검은 우산과 그녀, 단둘만이 남은 기분이었다.

우산은 이리아의 앞을 막아서는 듯 한참을 움직이지 않다가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이리아의 시선 또한, 우산을 따라 천천히 위로 올랐다.

우산만큼 새까만 정장 바지와 웃옷이 차례대로 드러났다. 이후 어깨 아래로 몇 가닥 내려온 하얀 머리카락을 보자마자, 이리아의 심장은 절로 벌름거리기 시작했다.

제발 더는 움직이지 말라는 그녀의 마음속 외침에도 불구하고, 우산은 끝까지 올라갔다.

우산 아래의 두 황금빛 눈동자는 이리아를 꿰뚫어 버릴 듯 강렬했다.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벌름거리던 심장은 급기야 뚝 떨어지고 말았다.

몰아치는 빗소리 사이서도, 루 아휜의 아름다운 목소리만은 선명하게 들려왔다.

[아가씨.]

……루……?

숨통이 턱 막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이리아의 두 발은 어느덧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는 중이었다.

[이런 곳에 계셨군요. 한참 찾았습니다.]

전쟁을 막기 위해선 비센티움 도심에서 루 아휜에게 잡혀도 좋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런 곳에서, 이렇게나 빨리 맞닥뜨릴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대체 어떻게 안 건지, 우연의 일치라기에는 저택을 나오자마자 무서울 정도로 정확히 찾아냈다. 그럴 리도 없고 그럴 수도 없지만, 루 아휜이 자신의 몸에 남몰래 추적 마법진을 그려 놨다고 의심될 정도였다.

루 아휜과의 만남은 분명 각오했던 일이었다. 루퀼렘 성에 다시 갇히는 것 또한 각오했던 일이다.

하지만 막상 자유의 박탈이 코앞으로 다가오니, 두려워지는 이 마음은 피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이리아는 이미 루 아휜을 피해 달아나고 있었다.

쏴아아-. 세찬 빗소리가 숨을 거칠게 들이마시는 이리아의 두 귓가를 아득하게 채웠다. 바늘 끝만큼 날카로운 빗줄기들은 뜀박질하는 그녀의 얼굴을 무참히 때려 박았다.

상처가 터져 버린 발목에서부터 피가 철철 흘러나왔다. 루 아휜은 빗물을 따라, 흐르는 새빨간 피를 따라 이리아를 쫓았다.

[거기 서세요! 아가씨-!!]

[싫어! 쫓아오지 마!]

도망치는 빨간 머리카락의 여인과 그녀를 쫓는 루퀼렘인은 행인 모두의 이목을 끌었다. 하지만 쏠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낄 틈마저도 없었다.

이리아의 머릿속엔, 루 아휜에게 잡히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 하나뿐이었다.

무작정 앞으로 달리는 이리아를 거슬러, 마법의 기운들이 루 아휜을 향해 몰아치기 시작했다. 루 아휜은 마법을 발동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또한 이리아와 마찬가지로 주문을 읊을 필요 따윈 없었다.

루 아휜이 손짓하자, 허공에서 거대한 사자가 나타나더니 이리아를 향해 돌진했다.

하늘을 달리는 사자는 순식간에 그녀를 따라잡고선 주둥아리를 쫙 벌렸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고 만 이리아는 사자의 끝없는 입 안을 보자마자 비명을 내질렀다.

그리고 동시에, 마법을 발동시켰다.

번쩍. 눈앞이 멀어 버릴 듯한 빛과 함께, 거대한 마법진이 비센티움의 도심 하늘에 생겨났다. 이리아의 새빨갰던 머리칼은 순식간에 하얗게 되돌아왔다.

매섭게 쏟아지던 빗방울들이 허공에서 일제히 멈추었다. 루 아휜과 그가 만들어 낸 사자는 이리아를 쫓던 자세 그대로, 행인들은 둘은 구경하던 자세 그대로 굳어 버렸다.

시간을 멈추는 마법은 이리아가 루퀼렘에 있던 시절, 빈번하게 쓴 마법이었다. 극한으로 치달은 육체가 살기 위해서 본능적으로 가장 익숙한 마법을 발동시킨 것이다.

뒤를 돌아볼 여유조차도 없었다. 이리아는 새하얀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시간이 멈춰 버린 비센티움 도심을 계속해서 달렸다.

루 아휜에게서, 그리고 그를 포함한 비센티움 도심의 모두에게서 최대한 멀어져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얼마나 달렸는지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마법은 길지 않았다.

두 다리는 바르르 떨리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이리아가 제자리에 멈춰 섰을 때, 하늘에 있던 마법진이 사라졌다.

시간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공중에 일제히 고정되었던 빗방울이 다시금 하나둘씩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비센티움 행인들의 시선은 갑자기 거리 한가운데 나타난 새하얀 루퀼렘인에게 쏠렸다.

머리카락 색을 바꿀 힘조차도 남아 있지 않다. 동물원에 갇힌 원숭이 신세란 게 바로 이런 걸까. 이리아 아델리어에겐 이제 더는 도망칠 곳도, 도망칠 기회도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서부터 사람들의 세찬 뜀박질 소리, 그리고 성난 개들이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찰병들이 오고 있었다.

‘아아…….’

툭, 투둑-. 이리아의 이마에 맞아떨어진 빗방울들이 뺨을 타고 눈물과 함께 흘러내렸다.

이리아는 두 눈을 지그시 감고선, 하늘을 향해 턱을 들어 올렸다.

참 이상하게도, 웃음이 계속해서 새어 나왔다.

그녀는 쏟아지는 비 한가운데서 우두커니 선 채, 울고 웃으며 마지막 생각을 했다.

‘이제 다 끝이다…….’

그리고 그 순간, 뜨겁고도 강인한 두 팔이 뒤에서 안아 왔다.

빗물에 흠뻑 젖어 버린 두 사람의 옷이 눅진하게 맞붙었다. 코를 찌르는 지독한 비 냄새 안에서도, 덱스터의 박하 향만은 선명했다.

그가 이리아를 품속에 부드럽게 그러안으며 속삭였다.

“돌아가자, 이리아.”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