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08.
도대체 어떻게 저택에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카즈웰 4세에게 정체를 들킨 순간부터, 저택에 돌아올 때까지의 기억은 이리아의 머릿속에서 뭉텅이로 잘렸다. 덱스터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걸 보면, 사라진 기억 동안 표정 관리를 썩 못하지는 않은 듯하다.
이리아는 익숙한 침실 문턱을 넘자마자 기계처럼 미소 지었다. 욕조에 물을 채워지는 동안, 로샨이 그녀의 드레스 끈을 풀어 주었다.
“아가씨, 많이 피곤해 보이시네요. 빨리 주무셔야겠어요.”
네. 이리아가 기계처럼 답했다.
그녀는 덱스터의 저택에 들어온 후, 언제나 그랬듯 하녀들의 시중 아래 침대에 몸을 뉘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언제나 그랬듯, 로샨은 이리아가 제일 좋아하는 향초들을 켜 두고선 방문을 닫았다.
이리아는 샛노란 불빛이 일렁이는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불빛이 일렁이는 동안, 그녀는 몇 번이고 자신의 작은 몸이 하늘로 솟아올랐다가 땅으로 푹 기분이었다.
분명 침대 위에 누워 있는데도 등 뒤가 횅했다.
마차를 타기 전까지만 해도 미치도록 욱신거리던 두피에선 이제 아무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귓가에서 수백 번 메아리치던 카즈웰 4세의 목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았다.
들이닥친 현실들을 맨정신으로는 도무지 버틸 수가 없다.
차라리 모든 걸 놓아 버릴까. 비뚤어진 충동들이 이리아의 가슴 안쪽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순간이었다.
‘안 돼. 절대 안 돼! 정신 차려, 이리아 아델리어!’
짝. 손바닥이 뺨을 때리는 소리가 고요한 방 안에 매섭게 울려 퍼졌다.
이리아의 두 눈망울에 빠르게 초점이 돌아왔다. 그녀는 천장에서 일렁이는 불빛을 보지 않기 위해 몸을 옆으로 돌린 후,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 싸맸다.
전쟁에서 명분은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선전포고는 강자가 원한다고 해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나름의 이유가 있어야 선전포고도 할 수 있는 법이다.
카즈웰 4세는 루퀼렘과의 전쟁을 노리고 있다. 하지만 그는 현재 루퀼렘에 선전포고를 할 수 있는 마땅한 명분이 없었다.
그러니 카즈웰 4세는 이리아를 죽인 후, 그녀의 머리를 루퀼렘에 보내 루퀼렘이 먼저 전쟁을 시작하도록 유도할 셈이다. 꾀 많은 여우같이 먼저 전쟁을 시작하지도 않는 거다.
‘루퀼렘과의 전쟁은 절대로 안 돼.’
루퀼렘에는 유능한 마법사가 많았으나, 전쟁을 경험해 본 적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주변국들, 그리고 마물과 수도 없이 전쟁을 치러 온 비센티움과 싸우면 루퀼렘이 패배할 게 뻔했다.
그러니 지금으로써는 루퀼렘이 비센티움과 전쟁을 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 제일 중요했다.
‘……전쟁을 일어나게 하지 않으려면, 내가 죽지 않으면 돼.’
죽지 않으면 카즈웰 4세가 루퀼렘에 머리를 보낼 수도 없다. 그리고 머리가 가지 않으면, 전쟁도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카즈웰 4세는 이리아에게 자신의 손에 죽을지, 덱스터의 손에 죽을지 선택하라고 했다. 카즈웰은 덱스터에게 이리아의 정체를 직접 알려 주어서라도 그녀를 처리할 생각이었다.
카즈웰 4세, 아니면 덱스터 하워드. 대체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서 살아남을 수 있는 건지, 이리아의 머리는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애초에 카즈웰 4세가 준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도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마당이다. 생존의 해답을 알아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아냐. 처음부터 다시 침착하게 생각해 보자, 이리아 아델리어.’
이리아가 한숨을 쉬며 찡그린 얼굴을 폈다. 하지만 정자세로 눕기 위해 몸을 돌리자마자, 그녀의 미간은 다시금 크게 일그러졌다.
시야에 다시 드러난 침실이 이상하리만치 어두웠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샛노란 불빛이 일렁이고 있었는데, 널따란 천장은 까맣기만 했다.
이리아가 다급히 협탁의 향초들을 확인했다. 향초들은 모두 꺼져 희미한 연기 한 줄기만을 뱉어내는 중이었다.
‘대체 언제부터…… 촛불이 꺼져 있던 거지?’
당황한 이리아가 협탁 서랍을 찾아 어둠을 마구 더듬었다. 그곳에 콘라드가 준 라이터가 있었다.
하지만, 요란스레 움직이던 이리아의 손은 이내 허공에서 우뚝 멈추고 말았다.
창문 맡에서부터 희미한 화약 냄새가 풍겨오고 있었다. 막 총탄이 발사된 총에서만 나는 특유의 화약 냄새였다.
쿵쿵. 이리아의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그녀의 두 눈동자가 화약 냄새가 풍겨 오는 방향을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거대한 창문 앞에, 사람의 그림자가 있었다.
이리아의 입술은 비명을 지르기 위해 제멋대로 벌어졌다. 하지만 비명이 튀어나오기 바로 전, 그림자는 그녀의 앞으로 달려와 입가를 우악스레 틀어막았다.
“으읍……!”
차가운 가죽 장갑이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입과 코를 세게 짓이겼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리아는 그림자를 향해 손톱을 휘둘렀으나, 단 한 번도 닿지 못했다.
그림자는 능숙하게 이리아의 턱을 잡아 올리고선, 그녀의 목울대를 손날로 때렸다.
목청에서 숨이 넘어가는 듯한 괴상한 소리가 흘러나오며, 이리아는 순식간에 엄청난 고통에 휩싸였다.
언젠가 콘라드가 말해 줘서 안다. 목울대를 때리면, 사람은 일시적으로 목소리를 못 낸다.
콘라드는 흔히 옛 자객들이 비명을 지르지 못하도록 목표물의 목울대를 치곤 했다고 일러 줬었다. 많이 알려진 방법은 아니기에, 주로 체계적으로 훈련을 받은 자객들이 쓴다고도.
이리아는 꺽꺽대며 자객을 돌아보았다. 희미한 달빛에 휩싸인 그는 눈도 깜짝이지 않은 채로 그녀를 뚫어지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토록 체계적으로 훈련된 자객을 이리아에게 보낼 이는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카즈웰 4세.
참을성이 길지 않다더니, 그가 준 선택의 시간은 채 하루도 되지 않았던 거다.
입가가 놓였음에도, 비명을 지를 수가 없다. 사람들을 부를 수 없다면 도망이라도 쳐야 한다는 생각이 이리아의 뇌리를 강하게 지배했다.
이 자리서 자객에게 죽을 순 없다. 그녀의 죽음은, 곧 두 나라의 전쟁이었다.
이리아는 새빨개진 목을 부여잡은 채로 무작정 침대를 빠져나왔다. 그녀가 어둠을 더듬거리자, 손에 맞은 침실의 장식품들이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와장창. 물건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히 울렸지만, 복도는 계속해서 고요하기만 했다.
‘밤눈이 조금이라도 좋았더라면. 어둠을 조금이라도 더 잘 볼 수 있더라면……!’
어둠에 약한 루퀼렘인의 두 눈이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 달아나는 이리아가 의지할 수 있는 거라고는 달빛에 드러난 희끄무레한 그림자들과 탁한 화약 냄새뿐이었다.
문을 향해 제대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기억에 따라 두 다리를 움직였지만, 침실에 쓸데없는 장식품들이 너무 많은 탓에 계속해서 무언가가 옆구리에 부딪혔다. 목울대와 갈비뼈가 미친 듯이 쑤셨다.
저 멀리, 언뜻 문의 형상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이리아의 입가에 안도 어린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녀가 문을 향해 손을 뻗기 무섭게, 왼쪽 발목에 노끈이 걸렸다. 자객이 사전에 설치해 둔 덫이었다.
“으윽……!”
쿵. 단번에 넘어진 이리아의 이마와 눈두덩이 바닥과 충돌했다.
고통이 찾아오기도 전에 순간적으로 왼쪽 머리가 띵해지며, 눈앞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이마가 찢어졌는지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뜨끈한 피가 느껴졌다.
바들바들 떠는 이리아의 잇새서 고통 어린 신음성이 새어 나왔다.
너무 아프다. 온몸이 부서질 듯 아파서, 죽음이 곧 찾아오리라는 사실마저도 생각나지 않는다.
넘어진 이리아는 한참을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루퀼렘 성에서 대마법사로 태어나, 수많은 성기사들의 호위를 받고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그녀였다. 전쟁터에서 마물을 만나 다리를 찢기긴 했지만, 이토록 고통스럽지는 않았었다.
눈물이 아닌 피가 얼굴을 흠뻑 적신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리아는 미친 듯이 떨리는 손으로 겨우 눈꺼풀의 피를 닦아 냈다.
어떻게든 앞을 봐야 한다. 어떻게든 일어서야 해.
이리아가 우악스레 발목을 잡아당겨 걸린 노끈을 뜯어냈다. 노끈이 풀리며 발목 피부가 무참히 찢겼지만, 머리의 고통이 워낙 큰 탓에 아프진 않았다.
독하디독한 탄약 냄새가 이리아의 코를 찔렀다. 침실을 통째로 태워 버리려는 심산인지, 자객은 뇌관(雷管)에 화약과 규조토를 쑤셔 넣는 중이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지난번 전쟁터에서 마물을 상대했을 때, 공격 마법이 나오지 않았어. 그렇다면 분명 이번에도 공격 마법은 쓰지 못할 거야.’
루퀼렘과의 전쟁, 그리고 자신의 생명이 걸린 판에, 모습을 들키는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리아는 다른 방어 마법이라도 발동시키기 위해 손을 들어 올렸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두통이 정신 집중을 방해한 탓이었다.
마법을 쓸 수 없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앞은 제대로 볼 수 없고, 발목은 완전히 나가 버렸다. 이리아는 피비린내가 풍기는 바닥을 엉금엉금 기었다.
그녀가 향한 곳은 문이 아니었다.
이리아는 침대 아래에 반쯤 기어들어 무언가를 열심히 찾기 시작했다.
이내, 서늘한 강철이 손바닥 피부에 감겨 왔다.
‘……있다.’
이리아는 곧바로 덱스터가 숨겨 두었던 소총을 꺼내 들었다.
철컥. 총의 걸쇠가 부딪치는 소리는 창문 앞, 자객의 움직임을 멈추게 했다. 그가 바닥에 쓰러진 채로 소총을 조준한 이리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리아의 총구는 정확히 자객의 이마를 가리키고 있었다.
난생처음으로 인간을 향해 총을 들이대 본다. 이리아의 두 손바닥에서 흐른 땀은 온 방아쇠를 흥건하게 적셨다.
죽음보다도 두 나라의 전쟁이 코앞에 다가오자, 한심한 눈빛을 하던 루 아휜도 떠오르지 않았다.
삐-. 귓가에서 긴 이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최대한 떨지 않으려는 의지와 달리, 온몸은 자객을 겨냥한 순간부터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종교와 신념보다 내 국민들의 생명이 더 중요해. 쏘지 않으면 다들 전쟁으로 고통스럽게 죽을 거야.
‘지금 쏴야 해.’
쏴, 이리아 아델리어!
이리아가 두 눈꺼풀을 꽉 감았다.
동시에, 그녀의 검지가 방아쇠를 당겼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