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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42/109)

41화

이리아는 떨리는 손을 최대한 숨기며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렸다.

“부…… 부르셨습니까, 전하.”

“왔군.”

이름 모를 수행인은 카즈웰이 손짓을 하자마자 홀연히 떠나갔다. 이리아는 그녀와 카즈웰 4세, 둘만 남으니 더 미칠 것만 같았다.

‘대체,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카즈웰 4세는 이리아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는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하늘을 살피고 있을 뿐이었다.

산새들만이 지저귀는 호정 안쪽에 끔찍한 고요가 찾아왔다. 카즈웰 4세는 아주 오랜 시간 말을 하지 않았고, 이리아는 그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입 안이 말라 죽을 것만 같았다.

쿵쿵. 널뛰는 심장 소리 너머로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저 멀리서 성의 사용인들이 검은 천에 둘러싸인 무언가를 들고 오는 중이었다.

그래도 카즈웰 4세와 단둘이 있지는 않는구나. 안심한 이리아가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리는 순간, 사용인들이 검은 천들을 걷어 냈다.

그리고, 이리아는 단번에 굳어 버리고 말았다.

‘……안 돼…….’

눈앞이 아찔해지는 수준을 넘어, 온 세상이 어두컴컴해졌다. 그들이 들고 온 것은 비둘기가 갇힌 철제 새장들이었다.

천이 걷히자마자 비둘기들은 일제히 날개를 퍼덕이며 울부짖었다. 비록 짐승이어도 곧 자신들의 죽음이 불어닥치리라는 사실을 아는 걸까, 이리아의 귀에 그들의 울음소리는 절규와도 같이 들려왔다.

귀족들의 사냥놀이를 위해 태어나고 길러진 비둘기들이다. 사냥을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지만, 이 사실 정도는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공황에 빠진 이리아와 달리, 카즈웰 4세는 태연하게 담배를 태우며 말했다.

“하워드 공이 어제 나무에 앉은 산새 한 마리도 잡지 않았다는 사실이 심기에 몹시 거슬려서 불렀네, 힐데어 양.”

그가 들고 있던 소총을 이리아를 향해 내밀었다. 차마 몸 떨림을 숨기지 못한 이리아는 무척이나 힘겹게 소총을 받아들었다.

“제게 초, 총은 왜…….”

“전쟁터에 있었다 하니, 총을 쏘는 법은 당연히 배웠겠지?”

카즈웰 4세가 구둣발로 담배를 짓이기고선 턱짓했다. 사용인들이 하나둘씩 새장 잠금장치를 풀며 비둘기를 날려 보낼 준비를 했다.

“그대가 하워드 공 대신, 나를 위해 새를 한 마리 잡아 주어야겠어.”

아아. 안 돼. 살생만은 절대로 못 해…….

이리아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뜨거운 용암에 강제로 쑤셔 넣어지는 기분이었다.

두 손에 들린 카즈웰 4세의 소총을 당장이라도 던져 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녀의 의지와 달리, 몸은 움직일 기미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절대로, 절대로 생명을 헛되이 죽여서는 안 된다. 그건 루퀼렘 종교의 교리이며, 동시에 이리아 아델리어의 신념이기도 했다.

그러니 설령 하늘이 두 쪽 난다 하여도, 이리아는 결코 저 비둘기들을 죽일 수 없었다.

카즈웰 4세는 덱스터와 달랐다. 총을 잡기 싫어하고, 동물들의 죽음을 보고 싶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이 자리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만일 이 소총을 손에서 놓아 버린다면, 카즈웰 4세는 이리아의 정체에 관해 의심할 게 뻔했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이리아는 울부짖는 비둘기들과 제 손에 들린 소총을 몇 번이고 번갈아 바라보았다.

머리는 해답을 찾기 위해 열심히 돌아가는 듯싶었으나, 단지 그뿐이었다.

그녀의 목덜미가 식은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갈 때 즈음, 카즈웰 4세가 소리쳤다.

“열어라!”

철컥. 첫 번째 새장의 문이 열렸다.

갇혀 있던 비둘기는 곧바로 자유를 찾아 두 날개를 휘둘렀다. 새하얀 비둘기가 날아가는 장면이 이리아의 시야에 천천히 재생되었다.

어떻게든, 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 이리아는 바르르 떨리는 팔을 움직여 푸른 하늘을 향해 총구를 조준했다.

긴 소총의 가늠자 안쪽으로 비둘기의 왼쪽 날개가 들어왔다.

‘모, 못 쏴. 못 쏘겠어…….’

왼쪽 날개를 맞춰 떨어뜨릴 생각이었는데, 차마 방아쇠를 당길 수가 없었다.

결국, 이리아는 아무것도 없는 하늘을 향해 총구를 돌렸다.

거친 총성이 호정을 뒤흔들었다. 총에 맞지 않은 비둘기는 자유가 되어 훨훨 날아갔다.

눈썰미가 없는 이들은 이리아가 실수로 비둘기를 빗맞혔다고 생각하겠지만, 비센티움의 타고난 사냥꾼들은 그녀가 일부러 총구를 돌렸다는 사실을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이리아가 방아쇠를 당기자마자, 카즈웰 4세의 얼굴은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카즈웰 4세가 또 한 번 턱짓하자, 두 번째 철장이 열렸다. 그가 조금의 비소가 섞인 목소리로 뇌까리듯 말했다.

“날아가는 새는 잡지 못하나? 그럼 내 그대를 위해 기꺼이 친절을 베풀어 주지.”

이리아는 알지 못하는 독한 남성의 향수 냄새가 강하게 끼쳐 왔다. 어느덧 바로 뒤로 다가온 카즈웰 4세는, 이리아 대신 소총을 장전하며 속삭였다.

“잡아 놓으면, 확실히 목숨을 끊을 수 있겠지?”

바닥이 무너지는 기분이라는 게 바로 이런 걸까.

카즈웰 4세가 가까이 있든 말든, 이리아의 얼굴은 이미 눈물을 흘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맨정신으로는 몰아닥치는 이 현실을, 도무지 버틸 수가 없었다.

두 번째 철장을 열었던 사용인은 그 안의 날뛰는 비둘기를 꺼내 양 날개를 묶었다. 그 후, 자신의 머리 위로 비둘기를 들어 올렸다.

“쏘거라, 씨시 힐데어!”

쇠로 만들어진 총구는 울부짖는 비둘기만큼이나 요란스럽게 흔들렸다. 실핏줄이 터져 새빨갛게 충혈된 이리아의 두 눈은 가늠쇠와 함께 비둘기를 조준했다.

쏴야 한다.

반드시 쏴야 해!

이리아의 손가락이 방아쇠 위에 얹어졌다. 저 아득한 곳에서부터 카즈웰 4세의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방아쇠 위 손가락에 서서히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이리아가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비둘기의 움직임이 퍼뜩 멈추었다.

동공이 없는 새까만 눈동자가 이리아를 향했다. 시선이 맞추진 비둘기의 뒤로 지난밤 꿈에서 보이는 동물들의 환영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시 나타난 틸다는 변함없이 새하얀 말꼬리를 살랑이며 이리아를 빤히 응시했다.

지난날 허무하게 보내야 했던 나의 사랑스러운 조랑말. 이리아는 차마 총을 든 모습으로 틸다를 마주할 수 없어 두 눈꺼풀을 질끈 감아 버렸다.

그러나 그녀가 눈을 감기 무섭게 한 남자의 형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루…….’

그건 바로, 루 아휜의 형상이었다.

루 아휜은 이리아를 향한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다. 이리아는 지금 보이는 루 아휜이 진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음에도, 실망감 가득한 그의 눈빛을 버틸 수가 없었다.

방아쇠 위 손가락에서부터 힘이 서서히 빠져 갔다.

그렇게, 비둘기를 향했던 이리아의 총구가 내려가는 순간이었다.

탁. 카즈웰 4세의 거대한 손이 그녀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래, 얼굴이 상당히 익숙하더니만…….]

그의 잇새서 튀어나온 루퀼렘어를 듣자마자, 이리아의 세상은 제자리서 멈춰 버렸다.

동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까만 카즈웰 4세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맹렬하게 빛났다. 그는 이리아의 어깨를 거칠게 돌린 후, 머리 위의 베일을 찢어 버리듯 벗겼다.

그녀의 맨얼굴을 바로 앞에서 보자마자, 카즈웰 4세의 입꼬리가 더욱 간드러지게 올라갔다.

[덱스터 하워드는 네 정체를 아나? 이리아 아델리어!]

다른 사람은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이 널따란 호정에 울려 퍼졌다.

쿵. 이리아의 두 손에 들려 있던 소총이 아래로 낙하했다.

맹렬하게 뛰던 심장은 급기야 멎어 버렸고, 목덜미에서 흘러내린 땀은 어느덧 드레스 뒷부분을 전부 적신 채였다.

온몸이 싸늘하게 식어 갔다. 한때 뜨거운 용암에 담가진 듯했던 몸은 이제 서늘한 심해 속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었다.

끝이 없는, 깊고도 깊은 심해 속으로.

[표정을 보니 덱스터 하워드는 모르는 모양이군.]

우뚝 멎어 버린 이리아의 심장을 알아챈 카즈웰 4세의 양 눈꼬리가 거친 곡선을 그렸다.

그가 이리아의 새빨간 머리카락을 무참히 휘어잡았다. 순간적으로 정수리에 엄청난 고통이 일자, 비명과 함께 루퀼렘어가 제멋대로 튀어나왔다.

[이……이거 놔-!!]

[그럴 순 없지. 언제 마법을 써서 달아날지 모르잖나?]

카즈웰이 움켜쥔 머리카락을 뒤로 잡아당겼다. 이리아의 턱은 그의 엄청난 손힘을 따라 저절로 하늘을 향해 치켜 들렸다.

카즈웰 4세의 손이 위로 올라갈수록, 이리아의 발꿈치도 더더욱 올라갔다. 두꺼운 드레스 자락 아래, 까치발을 든 그녀의 두 다리가 바르르 떨렸다.

카즈웰 4세는 흥분감을 감추지 않고선 계속해서 웃었다. 그가 이리아의 눈앞에 얼굴을 들이밀며 소리쳤다.

[덱스터 하워드가 알면 눈이 뒤집히겠어. 자기 약혼녀가 루퀼렘의 대마법사라니!]

아아. 이리아의 잇새서 힘없는 탄식이 새어 나왔다. 붉게 충혈된 그녀의 왼쪽 눈에서부터 끝내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카즈웰 4세가 제 바지 뒷주머니에서 리볼버를 꺼냈다. 은빛의 리볼버에는 여섯 개의 탄환이 모두 들어가 있었다.

[그래, 이참에 루퀼렘을 먹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녹빛의 눈동자 위로 리볼버의 잔상이 맺혔다. 리볼버의 총구는 무척이나 천천히 움직였다.

그것은 이리아의 어깨를 넘어, 이리아가 차마 쏘지 못한 비둘기를 향했다.

탕. 거친 총성이 울리고 화약 냄새가 퍼지자, 이리아의 등 뒤에선 작은 짐승의 사체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다섯 개의 탄환이 장착된 총구는 곧 이리아의 관자놀이 위에 닿아 왔다.

[선택해라, 이리아 아델리어. 나한테 죽을 건지, 아니면 덱스터 하워드에게 죽을 건지.]

카즈웰 4세는 열을 받아 뜨거워진 리볼버를 이리아의 피부 위로 세게 눌렀다. 그가 어느덧 흥건하게 젖은 그녀의 두 뺨을 보며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결과는 둘 다 같아. 나한테 죽으면, 네 목을 루퀼렘에 보내 전쟁을 시작하고, 덱스터 하워드에게 죽으면 그놈이 네 목을 루퀼렘에 보내 전쟁을 시작하겠지.]

저 아득한 곳에서 들려오던 카즈웰 4세의 웃음소리는, 아주 긴 시간 후에야 잦아들었다.

카즈웰 4세가 힘이 다 빠져 버린 이리아의 머리채를 놓았다. 이리아는 단박에 추락하여 서늘한 땅바닥 위로 고꾸라졌다.

카즈웰 4세가 손을 털자, 머리카락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의 손아귀 아래서 강제로 뜯긴 머리카락들은 마법이 풀려 온통 새하얬다.

카즈웰 4세는 주저앉은 이리아를 향해 비소를 날린 후, 여유롭게 등을 돌렸다. 그가 비둘기를 가져온 성의 사용인들에게 손짓하고선 마지막으로 말했다.

[빠르게 선택하는 게 좋을 거다, 대마법사. 난 참을성이 그리 많지 않아.]

카즈웰 4세를 포함한 사람들의 발소리가 서서히 작아졌다. 이리아는 그들의 발소리가 완벽하게 사라진 이후에도, 한참 널따란 호정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아아…….’

턱 끝에 아롱아롱 매달려 있던 눈물이 떨어져 바닥에 진한 자국을 남겼다. 둥그런 눈물 자국들은 아주 긴 시간 지워지지 않았다.

이제, 정체를 들켜 버린 이리아 아델리어에게 남은 건 단 하나였다.

절망.

완벽한 절망뿐이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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