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한참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던 이리아는 밖에서 소란이 들려오자마자 황급히 마법을 덧씌웠다.
하녀들은 뒤늦게 들어와 이리아의 목욕 시중을 들어 주었다. 이리아는 최대한 튀어나온 갈비뼈를 내려다보지 않으려고 애쓰며 하녀들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머리도 채 말리지 않은 채로 침대에 쓰러지다시피 누웠다.
사방이 고요하니 어젯밤 덱스터와의 대화부터 사냥터에서 줄리에타와 나누었던 이야기, 그 후 울려 퍼졌던 총성들이 환청이 되어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깨어 있는 게 지옥 같다. 차라리 빨리 잠들어 버리자는 마음에, 이리아는 축축이 젖은 베개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피곤해서 금방 잠들 순 있었지만, 꿈에서도 지옥인 건 매한가지였다.
꿈은 놀랍도록 생생했다. 꿈에는 전쟁터의 숲에서 덱스터가 잡았던 작은 토끼가 제일 먼저 등장했다. 그 후에는 틸다가 등장했고, 그 후에는 조금 전에 죽음을 맞이했던 늑대 우두머리가 등장했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울음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단지, 핏빛의 두 눈으로 이리아를 빤히 응시했을 뿐이다.
루퀼렘의 성경에선 모든 동물이 영혼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영혼은 살아생전에는 이성(理性)이란 것을 가지지 않지만, 사후에는 이성을 가지게 된다고 명시한다.
‘다, 다들 죽어서 인간처럼 이성을 가지게 된 거야…….’
이리아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눈들이 너무나도 인간다워 끔찍했다.
그녀의 꿈속에서, 루퀼렘의 성경은 진실이었다.
덱스터의 손에 죽은 토끼, 마물에게 물려 죽은 틸다, 그리고 총에 맞아 죽은 늑대는 모두 인간처럼 생각을 하며 이리아를 비난하고 있었다.
왜 가만히 있었어? 왜 죄 없는 동물들의 죽음을 방관했지?
‘아니야. 아니라고……!’
방관하고 싶어서 방관했던 게 아니다. 어쩔 수 없이, 상황이 여의치 않아 그들을 구해 주지 못했던 거다.
하지만 어쨌든, 결과는 똑같잖아?
아아. 이리아의 두 눈에서 눈물이 제멋대로 튀어나왔다. 그녀는 어두운 꿈속을 아무렇게나 박차고 달려 나갔다. 하지만, 죽은 동물들은 어디를 가나 따라왔다.
숨은 차고, 다리는 후들거렸다. 정신없이 달리던 이리아는 제 발에 걸려 철퍼덕 엎어졌고, 동시에 잠에서 깼다.
그녀는 이제 소리를 지를 힘조차 없어 무척이나 고요하게 눈을 떴다.
“아…….”
꿈에서 벗어나면 얼굴이 축축하게 젖어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이리아는 쿵쾅대는 심장을 부여잡고선 힘없이 몸을 일으켰다.
꿈을 상당히 오래 꿨던지 자기 전까지만 해도 어슴푸레했던 창밖은 어느덧 완전히 새까매진 상태였다. 호롱불 심지는 이미 한참 전에 타 버려 온 사방이 어두컴컴했지만, 달빛이 유난히 밝아 앞을 못 볼 정도는 아니었다.
루 아휜에게 잡히는 꿈, 덱스터와 결혼식을 올리는 꿈은 수도 없이 많이 꿔 왔다. 이밖에도 이리아는 약혼을 한 이후로 다양한 악몽들을 꿔 왔지만, 방금과 같은 꿈은 처음이었다. 어쩌면 그녀 인생 최악의 악몽이었다.
이리아는 창틀에 걸터앉아 또 한 번 죽은 동물들에게 깊은 애도를 표했다. 그들을 위해 조촐한 제사조차도 지내 줄 수 없다는 사실이 참 슬프고 암울했다.
자다 깬 것이었기에 여전히 피곤했으나 다시 잠들고 싶지는 않다. 이리아는 덱스터가 올 때까지,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을 구경했다.
생명체들이 이렇게나 많이 죽은 날에도 달빛과 밤하늘은 어김없이 아름답기만 했다.
이리아가 자는 줄 알았는지, 돌아온 덱스터는 노크도 없이 조용히 문을 열었다.
이리아는 목이 잠겨 버린 탓에 말을 하기 전, 기침을 몇 번 해야 했다.
“늦게 오셨네요, 공.”
“아…… 미안해. 혹여 날 기다리고 있던 건 아니지?”
이리아가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덱스터는 그런 그녀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방 안에 들어온 덱스터에게선 박하 향과 더불어 희미한 알코올 향이 났다.
취하진 않았지만 술을 마신 건 분명했다.
“오기 전에 카즈웰에게 한 소리 들었어. 그의 말에 따르면, 내가 대회의 위상을 전부 망쳐 놓았다더군.”
덱스터가 코웃음 치며 망토를 벗었다. 그의 허리춤에는 상당히 무게가 있는 권총이 걸려 있었는데, 탄창이 없었다. 아침에 방을 나서기 전 탄창을 아예 빼 버린 듯싶었다.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질문이었음에도, 이리아는 물었다.
“왜 오늘 한 마리도 안 잡으셨어요? 사냥, 좋아하시잖아요.”
“나만 좋아하지, 당신은 싫어하잖아.”
“제가 사냥을 싫어한다는 이유로 새 한 마리도 안 잡으셨다고요……?”
“그래.”
덱스터가 화병 뒤편에 숨겨 두었던 탄창을 뒤늦게 끼웠다.
철컥. 권총과 탄창의 이음새가 맞붙는 소리가 잠시 고요해진 방 안에서 선연히 울려 퍼졌다.
이리아는 여전히 창틀에 걸터앉은 채로 부산스레 움직이는 덱스터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덱스터는 이제 제 역할을 되찾은 권총을 베개 아래 숨겨 두고 있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이리아를 힐끗거리고선 말했다.
“당신과 결혼을 하면, 군단장 지위는 내려놓을 생각이야.”
“저 때문에 지금껏 이뤄 온 것들을 포기하실 필요 없어요, 하워드 공.”
“이건 오로지 내 선택이야. 당신처럼 예쁜 부인을 집에 두고, 전쟁터만 쏘다닐 순 없지.”
덱스터가 나직이 웃었지만, 이리아는 차마 그를 따라 웃을 수 없었다.
덱스터는 군인이 되어 목숨을 부지했던 남자인 만큼 공작이라는 직위보다 군단장이라는 직위가 더 중요했고, 이리아는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토록 중요한 직위를 그는 지금, 자신 때문에 포기하려고 한다.
숨통이 다시금 턱턱 막혀 왔다. 이리아는 최대한 머리를 비우려 노력하며 요동치는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어차피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덱스터는 결심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변함없이 풍채가 좋은 남자. 망토와 제복 겉옷을 벗었음에도, 달빛에 비치는 덱스터의 뒷모습은 거대했다.
불곰의 목을 오로지 손도끼로만 쳐 냈다고 했다. 덱스터의 근육 다부진 등은 그가 오늘 마음만 먹었다면 수십 마리의 동물들을 살육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몸소 증명하고 있었다.
생명을 존중해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 한들, 동물들을 사냥하지 않았다는 점에선 그가 진실로 고마웠다.
“……하워드 공.”
이리아의 발끝이 살포시 방바닥에 닿았다.
그녀는 소리 없이 다가가 덱스터의 허리께를 가볍게 그러안았다.
“오늘, 사냥을 하지 않아 줘서 정말 고마워요.”
이리아는 가진 게 없었고, 방 안은 서로의 눈빛을 보기엔 너무 어두우니 고마운 마음을 전하는 방법은 피부를 맞대는 것뿐이었다.
덱스터는 잠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다가,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가 허리께에 와 닿은 이리아의 작은 두 손을 감싸 쥐며 장난스레 속삭였다.
“맨정신으로는 이번이 처음이군. 당신의 포옹 한 번 받기가 이렇게 힘들어, 알아?”
이리아는 고개를 내젓지도, 그렇다고 끄덕이지도 않은 채로 가만히 덱스터를 안고만 있었다. 귓가서 들리는 덱스터의 심장 박동도 그녀의 것과 마찬가지로 몹시나 거칠게 뛰고 있었다.
이리아는 이날, 덱스터는 술을 마시면 금방 잠들어 버린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 이리아가 하녀들에게서 새 호롱불을 받아 왔을 때, 그는 이미 소파에 기대어 자고 있었다.
그러잖아도 심란한 판에, 어젯밤과 같은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 이리아는 쉽사리 떠나지 않는 덱스터의 온기를 거머쥐고선 침대에 드러누웠다.
총소리가 다시금 귓가에서 반복되었지만, 전보다는 한결 나은 듯했다.
그러나 이 밤도, 덱스터와 달리 이리아는 아주 오랜 시간 다시 잠들지 못했다.
***
이리아가 아침에 일어났을 때, 전날과 같이 이번에도 덱스터는 없었다. 어제는 대회의 채비를 하러 일찍이 나선 것이라면, 오늘은 영지를 떠나기 전 우즈웰 클로티어에게 미리 인사를 하러 간 것이었다.
이리아는 얼굴 앞에 베일을 드리우며 뒤늦게 침대맡의 새끼줄을 발견했다. 다른 이들은 한창 사냥에 바쁠 때, 할 일이 없던 덱스터가 심심하여 꼰 새끼줄 같았다.
볏짚 단 세 개로 꼰 듯, 새끼줄의 두께는 놀라울 정도로 가늘었다.
그 거대한 남자가 이토록 가느다란 새끼줄을 꼬았다니. 참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웃겼다.
곧 저택으로 돌아가 카즈웰 4세를 보지 않는다는 사실에 암울했던 기분이 조금이나마 괜찮아졌다. 이리아가 안도 어린 한숨을 내쉬며 레이스 장갑을 손목 끝까지 끌어 올릴 때,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덱스터는 문을 두 번 두드리지, 절대로 세 번 두드리지는 않았다. 이리아는 하녀들이 혹시 놓고 간 물건이 있었는가 싶어 의아한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
그러나 문 앞에 서 있는 이는 하녀가 아니었다. 그는 무척이나 근엄해 보이는 귀족의 수행인이었다.
“씨시 힐데어 님께 온 서신입니다.”
서신이라니. 비센티움에 친인척 하나 없는 이리아에게 서신이 올 일은 딱히 없었다.
이리아는 얼떨결에 서신을 받아 들었다. 혹시 줄리에타가 보낸 서신인가 싶었지만, 줄리에타는 절대로 아니라는 사실을 종이를 받자마자 깨달았다.
그녀는 종이가 부족했던 전쟁터에서 근무했던 시절의 습관이 있어, 양피지를 꽤 아끼는 편이었다. 줄리에타가 이렇게 비싸고 질 좋은 양피지를 고작 서신 보내는 데에 쓸 리가 없었다.
본능적으로 이 서신을 펼쳐 보면 안 된다는 생각이 이리아의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수행인의 새까만 두 눈동자는 그녀에게 암묵적으로 서신을 펼치라 명령하고 있었다.
이리아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양피지 윗부분을 들어 올렸다.
사냥 대회의 초대장에서 보았던 카즈웰 4세의 필체가 보이자마자, 그녀의 눈앞이 아찔해졌다.
특별한 내용 없이 카즈웰 4세는 단 두 단어만을 써 놓았다.
<씨시 힐데어.>
고작 이리아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인데도,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이름 두 글자가 다른 내용들보다도 훨씬 더 공포스러웠다.
“따라오시죠. 전하께서 부르십니다.”
두 다리가 후들거리는 단계를 지나, 다리의 감각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는 이리아의 발은 분명 땅을 밟고 있었지만, 꼭 하늘 위를 걷고 있는 느낌이었다.
대체 무슨 일로 부르는 거지? 대체 왜 나를?
‘혹시 기억을 해낸 걸까? 내가 이리아 아델리어와 닮았다는 사실을 알아챈 걸까?’
성을 가로지르는 그 짧은 순간에, 이리아의 머릿속에서는 수만 가지의 생각이 번쩍거리며 지나갔다.
별일 아닐 거라고, 그저 덱스터 하워드와 관련된 말을 전하기 위해서라고 믿으면서도, 어깨는 어느덧 주체할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
‘제국의 황태자가 아직 제대로 결혼을 하지도 않은 공작의 약혼녀를 따로 불러낼 일이 있던가? 덱스터 하워드는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그는…… 그는 지금 어디서 뭘 하는 중이지?’
그 어느 때보다도 덱스터가 간절했다. 이리아는 그가 제발 어디선가 마법처럼 나타나 주기를 바라고 또 바랐지만, 끝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카즈웰 4세는 성 뒤편의 널따란 호정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는 한 손으로는 소총을, 다른 쪽 손으로는 불이 붙은 담배를 잡고 있었다.
가출 계획에 결혼은 없었는데